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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2화)
1. 도래(渡來)(2)
한숨 돌리고 동굴 입구에 경계병을 세우고 나서야 문 대위는 구해 온 민간인들에게 어떻게 된 연유인지를 들을 수 있었다.
3명의 민간인 일행 중 의사와 간호사는 10여 일 전 이곳 아프가니스탄으로 기독교 청년 단체 소속의 대학생 10여 명과 함께 봉사를 왔다고 했다. 나머지 한 명의 남자는 이곳 현지에서 3년 넘게 선교 활동을 하고 있는 선교사로서, 이번에 봉사를 하러 온 일행을 안내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고 했다.
문 대위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의사의 설명으로는 사단이 벌어진 것은 정신 나간 대학생들 때문이었다.
대학생들은 의사와 간호사와 선교사가 마을 사람들을 진료하고 통역을 하고 있는 사이에 마을 모스크에 몰래 들어가서 찬송을 불렀단다.
그걸 우연히 본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탈레반이었고 기막힌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그들 모두를 감금했다.
대학생들과 분리되어 감금되어 있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선교사는 그들을 마을로 안내했던 안내원이 구해 주는 바람에 운 좋게 타고 왔던 차 한 대로 구사일생으로 탈출을 할 수 있었고 그렇게 도망치다가 험한 산길에서 자동차가 전복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문무혁 대위는 혀를 찼다.
죽으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회교 사원에서 찬송가를 부르다니.
탈레반 대대 병력이 쫓던 목표는 자신의 분대일 거라 생각했던 애초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종교적 광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탈레반들은 자신들의 성지를 더럽힌 선교사 일행을 아마도 자신들의 신변의 안전 따위는 도외시한 채 뒤쫓았으리라. 거기에 멋모르는 문 대위의 분대가 끼어든 것이고.
문 대위는 탈레반들이 왜 평화유지군 캠프 지척에서 그렇게 대담한 행보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다시 대대 본부에 대학생 일행이 잡혀 있다는 마을의 좌표를 보고했다.
그때였다. 담담히 의사가 문무혁 대위에게 하는 말을 듣고 있던 선교사가 패닉에 빠진 것은.
선교사는 갑자기 이교도들이 받을 불비에 대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영원히 받을 지옥의 고통에 대해서도 장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일행이 만류에도 굴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던 선교사의 눈에 점점 초점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기독교에서 방언이라고 하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내뱉으며 자신을 자해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던 문 대위의 명령으로 눈 흰자위를 뒤집고 발광하는 선교사를 겨우 제압해서 수갑을 채우고 재갈을 물려 한숨 돌리려는 찰나에 전 분대원이 의식을 잃어 버린 것이다.
“정리해 봅시다.”
문무혁 대위는 김준성 중사와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어제 밤부터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희가 가지고 있는 GPS 수신기가 8개입니다. 그런데 단 한 개도 위성 신호를 못 받는 경우는 있기 어렵습니다. 확률상으로도 그렇고요. 물론 전원은 풀로 차 있습니다.”
김준성 중사의 말마따나 분대원들이 한 개씩 가지고 있는 GPS 수신기 8대가 동시에 고장 나는 것은 확률상 희박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군 지급용으로 국방부에서 급하게 민수용을 구입해서 나눠 준 물건이긴 했지만 제품의 신뢰성은 좋았다.
더불어 말이 GPS 수신기지 민수용이기 때문에 가능한 PMP 기능은 물건을 지급받은 분대원들을 열광시키기 충분했다. 영화와 mp3를 플레이할 수 있는 기능은 숙영 중의 무료함을 달래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분대원들이 가지고 있는 GPS 수신기에는 야동과 영화 그리고 음악들이 몇 기가바이트씩 들어 있을 터였다. 물론 문 대위의 GPS 수신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물건이 지급되고 나서 분대원들 사이에서 어디서나 GPS 수신기를 충전할 수 있는 태양열 충전 키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기도 했었다.
“그리고 저기 널브러져 있는 괴물들은 어떻고요. 대위님께 오기 전에 잠깐 살펴봤더니 도저히 인간이 아닙니다. 멧돼지처럼 불쑥 튀어나온 이빨하며 녹색 피부. 아참! 그러고 보니 피도 녹색이던걸요.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그렇게 생긴 생명체는 지구에 존재하지 않습니다.”평소에도 무척이나 군대 경험이나 작전 경험이 풍부하고 생각이 깊어 문무혁 대위가 의지하는 바가 큰 김준성 중사의 말은 문무혁 대위의 생각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 대위는 이준혁 상병과 송채민 상병 간의 대화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크…….”
문무혁 대위는 말꼬리를 흐렸다.
어렸을 때 즐겨 보던 판타지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차원 이동이라도 일어난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뭐라 해도 문무혁 대위는 대한민국의 최고 최강의 교육을 받은 해병대 장교였다. 비이성적인 말을 꺼내기는 지금까지 받아 온 교육의 힘이 너무 컸다. 차원 이동이라니.
하지만 겨우 생각을 감추고 있는 문 대위에게 이곳이 지구가 아니고 다른 세상이라는 증거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동굴 입구에 호를 파고 K3를 거치하던 송채민 상병이 허겁지겁 문무혁 대위와 김준성 중사가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하늘을 보세요, 하늘! 항공! 항공! 항공!”
거대한 새였다. 아니, 박쥐였다. 아니, 드래곤?
뭐라 표현하기 힘든 생명체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오크들의 시체들이 쌓여 있는 공터 중앙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동체의 길이가 10m 정도로 보이는 생명체는 고개를 들어 크게 한 번 괴성을 내뱉고는 분대원들을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숙여 녹색 인간들의 시체를 먹기 시작했다.
오도독. 오독. 까드득. 까드드득.
녹색 인간들의 뼈가 괴물의 입에서 부셔지는 소리가 근 30m 떨어져 있는 문 대위와 김 중사에게까지 들려왔다.
이성이고 나발이고 저 정도면 확실했다. 어렸을 때 무던히도 좋아했던 판타지 소설 속의 생명체. 문무혁 대위는 김준성 중사를 바라봤다.
“여긴 지구가 아니군요. 확실하네요. 저건 와이번이군요. 먹히는 놈은 오크고…….”
김준성 중사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오크가 뭔지 와이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저따위 괴물이 지구에 살지 않는 것은 확실하지요.”
“확실히 하려면 잡아 보는 게 좋겠지요, 김 중사님.”
“저 정도면 K100탄으로는 어림도 없겠네요. 송 상병, 동굴에 RPG 많이 있더라 한 방 쏴서 잡아라.”
헐레벌떡 뛰어온 송채민 상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뛰어온 길을 다시 돌아갔다.
잠시 후 RPG―7이 발사되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분대원들 서로가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4발이 동시에 발사되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된 와이번은 가죽이 화살을 튕겨 내고, 칼날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고 되어 있었지만, 균질 압연 강판을 300mm이상 관통하는 RPG―7의 위력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RPG―7 4방을 맞은 와이번은 문자 그대로 조각조각 분해되어 버렸다.
“휴∼ 애들이 조금 과했네요. 흥분한 듯도 싶고. 어찌 되었든 이제부터는 탄약 관리를 철저히 해야겠네요. 어제 우리 분대가 탈레반의 무기 비트에 숨어든 것도 어쩌면 신의 뜻이겠지요. 지구도 아닌 곳에서 고생할 텐데 이거라도 가져가거라라는…….”
김 중사가 말꼬리를 흐리자 문무혁 대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휴∼”
“…….”
김준성 중사도 말을 잊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김 중사님이 재물 조사 좀 해 주세요. 그래야 앞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네요”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마치고 눈앞에 펼쳐져 있는 참상을 바라보았다.
분대에서 가장 활발하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를 꼽으라고 하면 누구나 이준혁 상병을 지목했다.
대학에서 행정학과를 다니다 휴학하고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 이준혁 상병은 지금 이곳이 자신이 그렇게도 좋아하던 판타지 세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송 상병님, 분명 여기는 판타지 세계라고요. 아까 그 괴물 보셨잖습니까. 오크와 와이번이 사는 곳이 판타지 세상 말고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곳은 백퍼센트 판타지 세계라니까요”
언제 가져왔는지 RPG―7 4발에 박살난 와이번 조각을 대검으로 쿡쿡 찌르던 이준혁 상병은 자신과 가장 죽이 맞는 K3 사수 송 상병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래. 내 생각도 그런 거 같다. 그런데 판타지 세계로 넘어오면 입고 있던 옷이 유니크 아이템이 된다던지 아니면 몸이 가벼워져서 훨훨 날아다닌다던지 하는 거 아니었냐?”
“그건 책마다 다르잖아요.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복식 호흡을 하면 소드 마스터가 될지 누가 알겠어요. 근데 송 상병님, 이거 보세요. 이 와이번 가죽 아무리 대검으로 찔러도 흠집도 안 나네요.”
이 상병의 말마따나 와이번 가죽은 대단했다.
가죽 부위에 대검을 대고 돌멩이로 자루를 쳐도 가죽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대단하긴 하네. 그나저나 걱정이다. 이제 어떻게 하냐. 여기 말도 배워야 하고 검술도 배워야 하고 복식 호흡에… 근데 여기 엘프도 있겠지? 난 나중에 엘프하고 결혼하련다. 크크크.”
“지랄들을 해요. 이것들이!”
둘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던 채명훈 하사가 벗은 전투모로 이준혁 일병과 송채민 상병의 머리를 툭툭 쳤다.
“어떻게 살아남을지를 먼저 걱정을 해야지. 쓸데없는 소리들 작작하고 호 다 팠으면 나랑 동굴에 들어가서 재물 조사나 하자. 김 중사님 혼자 고생하시는데.”
“네네.”
이준혁 상병과 송채민 상병이 동굴로 향하자 뒤따르던 채명훈 하사는 송채민 상병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송 상병, 근데 엘프가 뭐냐?”
“크크크. 채 하사님. 채 하사님은 영화도 안 보셨나 봐요. 거 있잖아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귀 뾰족하고 활 무지하게 잘 쏘는 사람들. 엘프는 남자고 여자고 엄청 예쁘다고요. 기억 안 나세요?”
“아∼ 그게 엘프구나.”
채명훈 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영화는 봤다.
‘나도 엘프랑 결혼해야지. 암, 암.’
채명훈 하사는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했다.
동굴 입구에 대충 호를 파서 일차 저지선을 만들어 진지를 구축하고 전원이 모인 시간은 어느덧 어둠이 내려오는 시간이었다.
시계상으로 19시인데 주위가 조금씩 어두워지는 걸로 봐서는 이곳의 하루의 길이는 지구와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다들 모였나?”
“넵, 모였습니다.”
문무혁 대위는 주변에 모인 부대원들과 민간인인 의사와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선교사는 아직도 제정신이 아닌지 동굴 입구에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다들 짐작하고 있겠지만 아마도 여기는 지구가 아닌 것 같다. 아까 괴물들도 그렇고 어제 우리가 이동할 때의 지형지물도 동굴 안쪽을 제외하면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문무혁은 생각해 왔던 말을 내뱉었다.
“알고 있습니다. 대위님.”
“오크라니까요, 오크.”
“와이번도 나왔어요. 여긴 판타지 세계라고요.”
“판타지는 무슨. 아직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판타지? 이 상병 넌 만화를 너무 많이 봤어.”
“에이, 무슨 말씀을. 하늘을 보세요, 하늘! 자고로 판타지 세계의 기본은 달이 2개 있는 것이라고요.”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던 분대원들의 말을 듣던 문무혁 대위는 마지막 이준혁 상병이 흥분해 하늘을 삿대질하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달이 두 개였다.
지구의 하늘에 있는 것과 거의 흡사하게 생긴 달이 한 개, 그리고 그것보다 좀 더 작고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두 번째 달이 첫 번째 달을 조금 가리며 바로 옆에 떠 있었다.
“휴∼”
문무혁 대위는 이곳에 떨어지고 나서 자신이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는지 문득 생각했다.
“자, 자. 조용! 조용!”
문무혁 대위는 하늘을 쳐다보며 수군대는 분대원들을 조용히 시킨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판타지 세계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여기가 지구가 아닌 것만은 확실한 듯싶다. 하지만 그 말이 곧 이 상병의 말대로 여기가 드래곤에 엘프에 마법사들이 넘치는 판타지 세계라는 말은 아니다. 여기 있는 11명이 인간의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다들 진지 구축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으리라 믿는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제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무혁 대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7명의 분대원들과 민간인 2명을 둘러보았다.
“우선 생각이 나는 것이 우리의 생존이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동굴에 상당량의 탄약과 무기가 있다. 아마 탈레반의 비트일 거라 생각되는데 아까 김 중사의 보고로는 약간의 비상 식량과 발전기, 몇 드럼의 연료도 저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는 아까처럼 와이번 잡는데 4발씩이나 RPG를 사용하면 안 된다. 일단 탄약과 모든 무기, 장비, 식량 일체의 관리는 김 중사가 맡는다. 그리고 오늘 밤부터는 2명씩 교대로 불침번을 서야 된다. 물론 나도 함께하겠다.”
보름달이라 그런지, 아니면 한 개 더 있는 달 때문인지 몰라도 지구보다 더 밝은 달빛 덕분에 주변은 밝았다.
“일단 지금부터 조를 짜도록 하고 조를 짜는 것과 사주경계 담당은 박재훈 병장이 맡아라.”
“네, 알겠습니다. 대위님.”
어떻게 해병대에 입대했는지 모를 정도로 작고 마른 왜소한 체격의 박재훈 병장은 도수가 높은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어찌 보면 분대에서 아버지 역할을 김준성 중사가 맞고 있다면 어머니 역할은 명령을 받은 박재훈 병장의 담당이었다.
그는 분대원들 중에 체구가 가장 왜소하고 볼품없었지만, 분대원들이 보내는 신뢰는 어쩌면 문무혁 대위의 그것을 능가했다. 항상 말이 없고 조용한 박재훈 병장은 말보다는 행동,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타입이었다.
문 대위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이곳에서의 첫날밤 불침번 선정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