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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3화)
1. 도래(渡來)(3)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흩어지는 분대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문무혁 대위를 지금껏 조용히 듣고 있던 김성한 박사가 불렀다.
“아, 네. 김 박사님, 무슨 일이십니까?”
김성한 박사는 35세의 건장한 체격을 가진 정형외과 전문의였다.
근 10여 일간 펼쳐졌던 아프가니스탄 봉사 활동 동안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덥수룩한 수염이 얼굴에 뒤덮인 그의 모습은 드라마에 나오는 샤프한 외과 의사라기보다는 사극에 나오는 산적 두목처럼 보였다.
경상북도 북부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을 산골에서 자랐다. 그래도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서 그는 지방 사립대의 의대를 턱걸이로 입학할 수 있었다.
겨우겨우 의대 공부를 따라가던 김 박사는 의대 성적이나 국가 고시 성적이 좋지 못해서 바로 대학병원 인턴으로 들어갈 실력이 되지 못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공중 보건의로 전라남도의 한 섬에서 근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왔다.
성실히 근무하는 그를 좋게 본, 자신이 근무하던 섬의 개척 교회 목사가 자신의 교회가 속한 교단 소속의 기독 계열 병원을 소개시켜 준 것이다. 덕분에 그는 그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어렵게 들어간 인턴 과정 때도 김성한 박사는 동기들 중에서 실력이 특출하지 못했다. 그래서 레지던트 과정에 올라갈 때 가장 인기가 있는 성형외과나 내과는 엄두도 못 내고 가장 인기 없는 정형외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겨우겨우 전문의를 딴 김성한 박사는 서울의 조그마한 종합병원에 월급 의사로 취직했다.
그리고 운명적인 날이 찾아왔다. 정신없이 교통사고 환자들을 상대로 수술방을 드나들던 어느 날 자신의 은인이나 다름없던 목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이다. 목사는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날 봉사단에 의사로서 참여해 볼 생각이 없냐는 권유를 해 왔다.
처음에는 솔직히 무슨 소리인가 했다.
아무리 자신의 앞날이 어두울 때 그가 자신을 잘 봐서 앞길을 터 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전쟁 중인 나라에 봉사 활동이라니.
솔직히 김성한 박사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기독 계열의 병원에 들어가기 위하여, 또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교회를 나가는 시늉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김성한이란 사람은 무신론자였다. 아니, 무신론자라기보다는 신에 대한 회의론자에 가까웠다.
그런 그가 공중 보건의 시절 우연찮게 목사와의 인연이 있었고, 신문이나 방송을 달구는 종교 비리와는 먼 목사의 모습에서 그리고 그가 자신의 앞길을 터 준 것에 대하여 상당한 수준의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가진 호감의 수준이 전쟁터에 봉사 활동을 갈 정도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헌금이나 몇 푼 바란다면 그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그랬던 김성한 박사가 아프가니스탄에 온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 찾아온 목사를 만나기 위하여 병원 인근에 있는 조그마한 커피 전문점에 갔을 때 본 목사와 동행한 한 여인 때문이었다.
그 여인은 지금 자신의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간호사 민유라였다.
아직 총각이었던 그가 함께 봉사 활동을 간다는 간호사 민유라에게 첫눈에 반해 버린 것이다. 산적 같은 외모 때문인지 아니면 의사가 되기 위해서 발버둥 치느라 바빠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전문의 1년차인 그는 연예 경험이 전무했다.
이제 전문의를 따고 삶에 여유가 생겨서 결혼을 생각하고 있던 그의 눈앞에 나타난 민유라는 보통의 미모를 넘어선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민유라의 간청과 목사의 부탁에 홀라당 넘어간 김성한 박사는 그 자리에서 바로 목사의 제안을 승낙하고 병원에 휴가를 얻었다. 그리고 보름간 민유라와 함께 지내면서 상당히 친밀한 사이로 발전한 사이였다.
“아, 예.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이 우리가 살던 지구가 아니라는 것은 알겠습니다. 달이 두 개에 저 괴물들 하며 도저히 우리가 살던 세상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김성한 박사는 문무혁 대위를 바라보았다. 그가 문무혁 대위를 만난 것은 겨우 하루 전인 바로 어제였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문 대위의 행동을 보건데 확실히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어제 탈레반들에게 쫓기면서도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분대원들을 지휘하고 민간인인 그들을 다독거리지 않았던가.
다만 꾹 다문, 조금 얼굴에 비해 커 보이는 입매에서 상당한 고집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건장하고 잘생긴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아까 어느 분이 말씀하신 대로 이곳이 판타지 세상이라면 여긴 아마도 우주의 다른 별이라기보다는 다른 차원이라고 하는 편이 맞을 듯합니다. 저도 예전 보건의 시절 자투리 시간에 판타지 소설이니 무협 소설들을 탐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의 인간이 다른 차원으로 가고 환생을 하는 것은 허무맹랑한 소설 속의 이야기들이라 생각했었지만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도저히 이성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지금의 상황이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예를 들자면 물이나 공기,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까지 소설처럼 저희 인간들에게 해롭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습니다. 상당한 주의가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저와 여기 민 간호사가 여러분들이 작업하실 때 몇 가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마는…….”
김성한 박사는 잠시 숨을 돌리며 묵묵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문무혁 대위의 얼굴을 보았다.
사실 지금 겉으로 표현을 안 하고 있어서 그렇지 저 무뚝뚝하게 보이는 장교도 마음속으로는 상당한 불안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자신이 인턴 시절에 각 의국을 돌며 수련할 때 약간의 정신과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문 대위의 모습에서 그가 현실을 잊고 그냥 자신을 판타지 소설 속의 주인공에 대입해서 합리화시키는 자기 합리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일 아까 거의 몰살시키다시피 한 오크들의 피가 빨간색이었다면 아무리 훈련이 잘된 해병대 수색대일지라도 인원의 절반 정도는 패닉에 빠졌을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도 피의 색깔이 초록색이라 심리적 쇼크가 덜했던 것이다.
마치 예전 대한민국에서 엄청난 유행을 했던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청소년 버전은 피의 색깔을 파란색으로 해서 발매를 했었던 것처럼 사람은 그런 단순한 색깔의 변화에도 자기 합리화가 가능한 동물이었다.
“일단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곳의 제반 상황과 생존 등 모든 사항은 문 대위님께서 담당하시겠지만 당장 오늘 저녁부터라도 한 분씩 잠시 저와 대화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아니, 제가 오늘 밤을 새면서 불침번을 서는 전 분대원들과 면담을 해 보겠습니다. 개개인의 차이는 분명 있을 테지만 지금 여러분들은 상당한 쇼크 상태에 빠져 계십니다. 아까의 대화를 들어보면 모든 분대원들이 무의식적으로 부정적인 단어를 단 한마디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곳은 판타지 세상이고 분대원들 개개인이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인 것처럼, 이곳에서는 결코 죽지 않고 영웅처럼 살 것이라 생각해 버리는 자기 방어 기재를 발동해 버리는 것이지요. 물론 이곳이 우주의 다른 별인지 다른 차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상황은 현실입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전혀 정보가 없는 세상에 툭 하고 떨어진 것이지요.”
“박사님 말씀이 옳습니다. 저도 사관학교 시절에 군사 심리학을 조금 배웠습니다. 지금 분대원들 심리 상태는 아마 온라인 게임에서 자신의 캐릭터에 감정을 이입한 상태와 비슷할 테지요. 다행히 지금까지는 괜찮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 피로 증세가 급격하게 몰려올 겁니다.”
문무혁 대위는 김성한 박사의 지적이 고마웠다.
사실 자신이 인간의 심리에 대하여 알아야 얼마나 알 것인가?
분대원들과 함께 지내 온 자신이 분대원들을 다독거리는 것보다는 의사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김성한 박사가 분대원들을 다독거리는 것이 효과가 좋으리라 생각했다. 자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래 직위에 껌벅 죽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니, 어떻게 될까요?”
사실 김성한 박사 자신은 전혀 군 경험이 없다.
의대를 마치고 바로 공중보건의로 근무해서 병역을 마쳤기 때문에 다른 성적이 좋은 동기들처럼 군의관으로 복무해 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기를 소지한 군인들이 느끼는 불안감보다 민간인 신분인 그의 불안감의 정도가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박사님, 큰 걱정 마십시오 천만다행인 것이 동굴 속에 당분간 저희가 사용할 무기와 식량이 있습니다. 앞으로가 걱정이긴 합니다만 이곳이 판타지 세상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어떤 세상인지 모르겠지만 저런 아인류가 존재하고 미개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일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고 지구처럼 문명이 발달했다면 저런 미개한 종족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겠지요. 그래서 인간이 있더라도 지구보다는 한참 떨어진 문명 수준일 거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지금 첫 번째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저희 일행의 생존과 무사 귀환입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이 문명을 보유한, 보유했다면 대화 가능한 종족이 살고 있냐는 것이겠지요. 만일 이곳이 판타지 세상이라서 그런 인간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그들과 소통해 나아가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겁니다.”
문무혁 대위는 단숨에 말을 내뱉고는 마음속에 있던 한마디를 덧붙였다.
“여기로 우리가 왔다면 분명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최선을 다해서 찾아봐야지요.”
“네.”
김성한 박사는 뒤돌아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문무혁 대위의 등을 보았다.
“휴∼”
절로 한숨이 나오는 김 박사였다.

다행히 밤새 별다른 사건 없이 새로운 세상에서의 첫날이 밝았다.
가지고 있는 물이 분대원들의 수통에 든 소량의 물밖에 없었기 때문에 문무혁 대위는 채명훈 하사, 송채민 상병, 이준혁 상병, 세 사람에게 오크 마을 주변 정찰과 더불어 식수원을 찾는 임무를 부여했다.
다행히도 동굴에 식량이 상당량 저장되어 있어서 당분간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되었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식수였다. 하지만 이곳이 오크들의 주거지라면 식수원이 주변에 있을 것이 확실했다.
명령을 받은 세 사람은 무장을 하고 공터 주변의 숲으로 들어가서 원을 그리면서 정찰 반경을 넓혀 갔다. 숲은 상식을 뒤엎는 규모였다. 마을에서 숲으로 단 10m만 들어가도 마을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풀숲이었다.
보통 숲이라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듬성듬성 있고 그사이에 풀밭에 햇볕이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영화 속의 장면은 순 거짓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 사람은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나오기 전에 전술 행군을 두 번 해 본 경험이 있었다. 포항에서 강릉까지 산속으로만 행군하는 전술 행군은 피를 토할 만큼 힘들었지만 그 경험이 지금 현 상황을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는데 도움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K2 소총을 들고 앞장서서 일행을 이끌던 채명훈 하사가 오른쪽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본 이준혁 상병과 송채민 상병은 신속히 좌우를 경계했다.
“정말 대단한 숲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 천리 행군할 때 백두대간을 종단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엄청나네요.”
“은폐는 안 되겠지만 풀을 쳐 내야겠다. 이대로는 사주 경계는커녕 방향 감각도 잊어 버리겠다.”
채명훈 하사와 이준혁 상병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송채민 상병도 의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은밀하게 주위를 정찰하는 것을 포기했다. 일단 이준혁 상병이 오크들이 들고 설치던 칼로 잡목과 수풀을 헤쳐 나가며 길을 냈다. 다행히 지형이 평지라서 나무만 피하면 길을 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세 사람은 수십 미터마다 선두를 바꾸면서 공터 주위의 숲을 뒤졌다. 두세 시간을 점점 반경을 넓혀 가며 수색을 하자 폭이 10여 미터쯤 되어 보이는 하천이 나타났다. 하천은 오크 마을을 빙 둘러 흐르고 있어서 오크 마을의 자연 장벽이 되어 주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하천 물은 맑디맑았고 그대로 음용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전부 수통을 채우자. 마을에 돌아가서 야전 정수킷에 정수해서 먹으면 괜찮겠지. 안전하게 그냥 먹어도 되는지는 의사 양반한테 가서 물어보고.”
“넵, 채 하사님.”
“넵.”
오크들의 영역이어서인지 마을 주변에는 자잘한 곤충류 이외에 다른 동물들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세 사람은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하며 오크 마을로 향했다. 하천에서부터 오크 마을까지는 그래도 오크들이 자주 왕래를 했는지 조그마한 오솔길이 자연적으로 생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길이 있을 줄 알았으면 무작정 숲으로 들어가지 말고 주변부터 탐색해 볼 것을 그랬습니다. 쩝.”
오크 마을로 향하는 길에 이준혁 상병이 전투모를 벗고 머리를 벅벅 긁으며 채 하사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그랬으면 이렇게 생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하!”
채명훈 하사가 생각하기도 괜한 헛고생을 한듯해서 어이없었는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