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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4화)
1. 도래(渡來)(4)
마을에 남아 있던 나머지 분대원들은 모두 야전삽으로 구덩이를 팠다. 오크의 시체를 전부 묻기 위해서였다.
현재 이곳의 날씨가 여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더운 편에 속했기 때문에 오크의 시체들이 썩기 시작하면 위생에 문제가 생김은 물론 일단 이 오크 마을을 근거지로 삼기로 했으니 주변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한편으로는 오크 시체를 먹기 위하여 와이번이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서 이기도 했다. 다행히 동굴과 마을 사이의 공터 한편에 상당한 크기의 구덩이가 있었고 땅이 단단하지 않아 상당한 속도로 작업을 진척시킬 수 있었다.
비상 상황에 대비해서 완전 군장에 총까지 둘러메고 삽질을 하는 것은 아무리 강도 높은 훈련에 단련되어 있는 분대원들이라고는 하지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어서 작업을 하는 분대원들의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들어 가고 있었다.
문무혁 대위와 김성한 박사는 문명이나 인간의 단서를 찾기 위하여 텅 빈 오크 마을을 수색했다. 문무혁 대위가 쥐어준 K5권총을 손에 든 김성한 박사와 K2 소총을 든 문 대위는 조용한 마을의 중심으로 향했다.
오크 마을의 중심에는 조그마한 광장과 대략 교실 한 개 정도 넓이의 통나무집 한 채와 그보다 작은 두 채의 통나무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운데의 통나무집 입구에는 십여 개의 통나무 기둥이 두 줄로 세워져 있었고 그 기둥 위에는 무언지 모를 뿔 달린 짐승의 머리뼈가 장승의 머리처럼 매달려 상당히 기괴하게 보였다.
“마치 북미 인디언과 바이킹의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박사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게 보입니다. 저 천막 윗부분에 연기가 빠져나가게 뚫려 있는 형상은 인디언의 천막과 비슷하게 보이는군요. 통나무집은 잘 모르겠지만요.”
“예전에 마이클 크라이튼이라는 소설가가 지은 13번째 전사라는 소설이 영화화된 것을 본 적이 있거든요. 거기서 나오던 바이킹들의 통나무집과 겉모습이 비슷하게 보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도 그 영화를 본 기억이 납니다. 하여튼 저 정도 집을 지을 정도면 오크라는 놈들도 저희 처음 생각보다는 상당한 정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되겠네요.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요.”
어제 밤 잠 한 숨도 제대로 못 자고 자칭 판타지 마니아인 이준혁 상병에게 시달림을 당한 문무혁 대위였다.
그가 이준혁 상병에게 듣기로는 오크들의 수준은 거의 인도네시아 섬에 사는 문명을 접하지 못한 원주민보다도 못한 수준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었는데, 의외로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지금 문 대위의 눈앞에 있는 통나무집은 견고한 짜임새를 가지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 세상의 문명의 정도가 이것이 다라면 오크와 공존해야 될지도 모르겠네요. 허 참.”
문무혁 대위의 넋두리가 이어졌다.
“아닙니다, 문 대위님. 그들이 걸치고 있던 가죽옷이나 무기의 수준을 보면 사실 거의 석기시대 수준으로 보입니다. 도저히 이런 통나무집을 정교하게 지을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는군요.”
“하긴 그렇군요. 오늘 수거한 몇몇 자루의 검들도 말이 검이지 그냥 철판을 대충 돌에 갈아서 손잡이에 가죽을 감은 것뿐이었으니까요. 이 정도 집을 지으려면 톱이나 공구들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어야 할 텐데 무기가 그 정도라면 조금 이상은 합니다.”
어느 문명이나 가장 먼저 발달하는 것은 무기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유물 중에서도 가장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는 것은 무기 아니던가?
문무혁 대위도 김성한 박사의 말에 동의했다.
문 대위가 김 박사에게 주의를 주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별다른 위협은 없는 듯합니다. 이제 들어갈 테니 김 박사님은 여기서 절 엄호해 주십시오. 뭐 별다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주변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권총 조심하시구요. 슬라이드를 당겨 놨으니 방아쇠만 당기시면 발사됩니다.”
김 박사는 자신의 손에 들린 묵직한 권총을 내려다보았다. 오크가 나타나면 이 권총으로 오크를 죽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 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통나무집은 습기나 곤충을 막기 위하여서인지 지상으로부터 약 1m 정도 띄워 건축되어 있었다. 문무혁 대위는 K2 소총의 안전핀을 자동으로 놓고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집 안은 직사각형 구조를 하고 있었다. 입구 쪽 벽을 제외하고는 삼면의 벽에 밖의 기둥에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수많은 동물의 머리뼈가 장식되어 있었고 뼈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의자가 입구 맞은편에 놓여 있었다. 아마도 오크 마을의 지도자 자리인 것처럼 보였다.
문무혁 대위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별다른 건 없습니다. 그냥 족장의 집무실이나 강당처럼 보이더군요. 다만 뼈 장식물이 많이 있었구요. 이제 오른쪽 집으로 갑니다. 역시 엄호해 주세요.”
문무혁 대위는 오른쪽 통나무집으로 갔다.
중앙의 통나무집의 절반 규모의 통나무집이었다. 중앙의 통나무집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견고하게 지어진 것은 중앙의 통나무집과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중앙의 통나무집은 판자를 달아 여닫을 수 있는 창문이 몇 개 달려 있었으나, 오른쪽 집은 창문이 있긴 하지만 사람 팔목 두께의 통나무로 창살이 쳐져 있었고 문에는 나무 지렛대로 자물쇠가 되어 있었다.
“박사님, 여기 좀 보세요.”
문무혁 대위는 김성한 박사에게 손짓해 문에 달려 있는 지렛대를 보여 주었다.
“문을 안에서 잠그는 게 아니라 밖에서 잠그는 것이네요. 안에 무언가 가둬 놓는 용도로 쓰이나 봅니다.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 대위의 설명에 김성한 박사는 손에 든 권총을 다시 한 번 매만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정찰을 마치고 오크 마을로 돌아온 3인조는 오크 마을을 지나쳐 일행들이 있는 동굴로 가기로 했다. 호기심 병이 발동한 것이다.
“냄새 엄청 나는구먼.”
채 하사는 손으로 코를 싸맸다.
“이놈의 오크들은 위생 관념도 없나 봅니다. 그냥 집 앞에 똥을 싸질러 놨네요.
송 상병이 맞장구쳤다.
“채 하사님, 저쪽에 대위님과 의사 양반이 있는데요? 두 분이서 뭐하시는 거죠?”
이준혁 상병이 마을 중앙에서 문 대위와 김 박사가 무언가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채 하사에게 보고했다.
“가 보자. 사주경계 철저히 하고.”
“네∼ 넵.”
“필승! 대위님, 저희 돌아왔습니다.”
3명의 분대원은 문무혁 대위 앞에서 멋지게 경례를 했다.
“아, 마침 잘됐다. 보고는 잠시 후에 하도록 하고 이 상병은 박사님과 밖을 경계해라. 그리고 채 하사와 송 상병은 나와 같이 이 집을 수색한다.”
1년 넘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수색 활동을 했던 분대원들이라 문무혁 대위의 짧은 명령에도 즉각 반응했다. 이준혁 상병은 K2 소총을 무릎쏴 자세로 거치하고 사주경계를 했고, 채명훈 하사와 송채민 상병은 소총을 들고 문 양쪽에 섰다.
“자. 셋에 들어간다. 하나. 둘. 셋.”
문 대위의 나지막한 신호가 떨어지자 채명훈 하사가 문의 지렛대를 총신으로 치움과 동시에 문 대위는 발로 문을 걷어찼다.
꽝!
* * *
마인즈는 하룻밤을 꼬박 두려움에 떨다가 한낮이 되어서야 잠이 들어 있었다.
그는 오크들에게 잡혀와 오크족장의 집을 짓고 창고와 자신의 거처 겸 감옥을 지을 때보다 더욱 큰 공포에 빠져 있었다. 어제 오후에 느닷없이 들려온 수많은 천둥소리와 몇 km 밖에서도 들린다는 와이번의 피어 소리하며 그 뒤를 이어 들려온 엄청난 굉음.
그 광음들이 들려온 후부터 갑자기 어미 오크들이 새끼 오크들을 데리고 황급히 숲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급한지 그들이 그렇게 귀하게 여기는 쇠붙이 한 조각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겨우 자기들의 새끼들만 데리고 허둥지둥 숲으로 사라졌다.
마인즈는 처음에는 숲에서 상위 먹이사슬을 형성하고 있는 트롤이나 오우거 아니면 오크 대부족이 마을을 습격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 봐도 처음의 콩 볶는 듯한 소음과 천둥소리 와이번의 울부짖음이 지나고 나서는 오크 마을에 정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이대로 이 마을의 오크들이 사라진다면 갇혀 있는 마인즈는 그대로 굶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평소 저녁이 되면 음식을 가져다주던 오크도 당연히 오지 않아 어제 저녁부터 한낮이 지난 오늘까지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상태로 긴장하고 있던 마인즈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깜박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꽝!
“RhaWkrak! thsemfdj!”
“dnawlrdlwlak!”
마인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비몽사몽간에 잠에서 깨어나자 황토색의 얼룩무늬 옷을 입고 같은 무늬의 투구를 둘러쓴 3명이 마인즈가 갇혀 있던 창고로 뛰어들어 와 검은 쇠막대를 자신에게 들이대며 처음 들어 보는 말로 자신을 윽박질렀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마인즈는 살려달라 말하며 본능적으로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렸다.
그는 프랑켄 왕국에서의 최북단에 위치한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의 목수였다.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의 영주인 레겐스 남작의 명을 받고 마차의 바퀴를 만들 나무를 구하기 위하여 남작령에서도 가장 북쪽에 자리한 어둠의 숲으로 왔다.
원래 마차나 수레의 바퀴의 재료로 쓰이는 나무는 자작나무가 많이 쓰였다. 구하기 쉽고 가공이 쉬워서 많이 사용하는 자작나무로 만든 바퀴는 가격도 싸고 만들기도 쉬웠지만, 이번에 새로 만들 마차는 남작이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을 관할하는 변경 백인 뷔르츠 백작에게 선물로 보낼 물건인지라 남작령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는 스틸폴이란 나무를 특별히 사용하기로 한 것이다.
스틸폴이란 나무는 단단하기가 거의 쇠와 같고 쇠보다는 가볍고 탄력이 좋아 마차 바퀴의 재료로는 최상의 재료였다. 다만 대륙에서 자라는 지역이 어둠의 숲 단 한 곳이라 벌목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어둠의 숲은 유로핀 대륙의 북서쪽에 자리한 4대 금지 중 한 곳이다.
드래곤들이 산다고 전해지는 대륙 동쪽의 드래곤 산맥, 대륙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 대륙에서 가장 높은 올림포스 산맥, 온갖 마물들이 득실거리는 남쪽의 영원의 늪과 함께 한 개 기사단이 들어가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죽음의 절지 중의 절지가 어둠의 숲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스틸폴이란 나무가 어둠의 숲에서도 가장 가장자리에 자라는 편이라 몬스터만 조심하면 스틸폴을 벌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물론 대량으로 벌목하거나 한다면 숲의 몬스터들이 소리를 듣고 몰려 나와 벌목이 불가능해지지만 마인즈가 만들 마차의 바퀴 재료로 쓸 나무 한두 그루쯤은 조심해서 벌목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마인즈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마인즈 일행이 어둠의 숲 초입에서 벌목할 스틸폴 나무를 찾고 있을 때 정말 운이 나쁘게도 오크 무리에게 습격을 당한 것이다.
마인즈 이외의 모든 일행이 살해당했고 그가 목수인 것을 안 오크들에 의해서 그만이 살아남아 오크 마을로 잡혀 왔다. 그날 이후로 마인즈는 오크들이 시키는 대로 오크들의 생필품이나 집을 만들며 지냈다.
다행히 마인즈의 솜씨가 레겐스부르크 남작령 직영 공방의 수석장인일 정도로 좋았기 때문에 오크들이 그의 효용 가치를 높이 쳐 주어 잡아먹히지는 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