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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5화)
1. 도래(渡來)(5)
그가 오크 마을에 잡혀 온 지도 벌써 1년 반이란 시간이 흘렀다. 예전부터 마인즈는 대장장이나 자신처럼 목수 또는 특별한 기술을 가진 자들을 오크들이 납치하면 자신들의 노예로 삼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래서 오크들의 요구를 성심껏 들어주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탈출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크 마을에서 무사히 탈출해서 어둠의 숲 밖으로 도망간다는 것은 어둠의 숲이 가진 무시무시한 명성을 생각할 때 자살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행동이었다.
마인즈를 잡아 놓고 있던 오크들은 어둠의 숲에 살고 있는 오크 부족 중에서도 가장 작은 편에 속하는 듯 무리의 수가 200을 넘지 않았다. 어둠의 숲이 아니라면 200정도 규모의 부족이라면 3년 정도 지나면 거의 600에 이를 정도로 부족원의 숫자가 늘어날 테지만 이곳은 어둠의 숲.
오크들의 번식 능력이 아무리 좋다한들 식량의 수급 문제와 자연적으로 사냥 등을 하면서 도태되는 숫자도 무시 못해서 마인즈가 처음 잡혀 왔을 때나 지금이나 전체 부족원의 숫자는 그다지 변함이 없었다. 물론 지금은 문 대위 일행에게 몰살당해서 부족이라는 명칭을 붙이기 힘들어졌지만 말이다.
그래도 잡혀 있는 동안 오크들에게 기술을 인정받아서 그다지 불편함이 없게 살고 있던 마인즈는 지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창고에서 끌려나와 보니 그를 끌고 나온 병사 이외에도 하얀색 가운을 입은 남자 한 명과 병사 한 명이 더 서 있었다.
마인즈가 비록 비천한 목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남작령 직영 공방의 수석 목수였기 때문에 글도 알고 있었고 남작령에 가끔 가다 오는 뷔르츠 백작령의 사절단이나 상인들을 보거나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보통의 남작령 사람들보다는 상당한 수준의 견문을 쌓고 있었다.
마인즈는 근본적으로 상당히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방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매입하러 온 상인들에게 맥주 한 잔을 대접하며 먼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그만의 은밀한 낙이었다. 비록 자신은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수로 봉사하고 있었지만 선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듣는 상인들의 먼 나라의 이야기는 이야기만으로도 마치 마인즈 자신이 직접 미지의 세상을 여행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고 그는 그런 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었다.
그랬던 그였기에 먼 나라의 풍물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군인들의 복장이나 손에 들려 있는 쇠막대기 그리고 발에 신고 있는 가죽신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 상병. 니 말이 맞나 보다. 저 꼬락서니 봐라.”
말없이 잡아온 인간을 보던 문무혁 대위가 이준혁 상병에게 말했다.
채명훈 하사와 송채민 상병도 문무혁 대위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렇죠? 봐요. 제 말이 맞지. 여긴 완전히 판타지 세계라고요.”
이준혁 상병이 잘난 체를 하면 평소 같았으면 핀잔을 주거나, 뒤통수를 갈겼을 채명훈 하사도 이번에는 별 말이 없었다.
오크와 와이번, 그리고 마포로 만든 허름한 옷을 입은 파란 눈에 초록색 머리의 중년남자!
“이제 마법사와 드래곤만 나타나면 되겠군요.”
옆에서 김성한 박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김 박사의 말에 동감하던 문 대위는 채 하사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채 하사, 물은 구했나?”
“넵! 마을 동쪽으로 약 200m 정도만 나가면 마을을 감싸고 개울이 흐르고 있습니다. 수질은 육안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맑아 보였습니다. 그냥 음용해도 별 이상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야전 정수킷으로 정수하고 끓여 먹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문무혁 대위의 질문에 채명훈 하사는 수색 상황 보고를 했다.
“그래, 수고 했다. 물이 가까운 곳에 있다니 정말 다행이다. 일단 동굴로 가서 확인해 보기로 하고 돌아가자. 이 상병하고 송 상병은 저 사람 감시 잘해라.”
* * *
동굴과 마을 사이 공터 한편의 움푹 파인 지형에 오크의 시체들을 던져 넣고 있던 정진영 상병은 온몸이 끈적끈적한 기분을 참기가 어려웠다.
한성대학교 기계공학과를 다니다가 해병대에 자원입대한 그는 방학 때 식물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가 처음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한 열대 식물원에 들어갔을 때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상쾌함과 약간의 눅눅함을 느꼈지만 그는 불쾌할 정도의 끈적거림을 느꼈다. 단순이 피부에 옷이 달라붙는 끈적거림이 아니라 숨을 쉴 때도 허파까지 끈적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이후로 정 상병은 그때 느꼈던 것보다 몇 배나 되는 끈적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아르바이트할 때도 그랬듯이 며칠 시간이 지나서 적응이 되면 끈적거림은 사라질 테지만 지금은 오뉴월 복날 근처의 강아지처럼 헥헥대고 있었다.
“정 상병아, 괜찮아? 힘들면 잠시 쉬어라.”
힘들어 하는 정 상병이 안쓰러웠는지 박 병장이 신경을 써 줬다.
“아, 박 병장님. 괜찮습니다. 조금 몸 상태가 안 좋은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여기 물 좀 마셔라”
박재훈 병장은 수통에 조금 남은 몇 모금의 물을 정진영 상병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정진영 상병은 약간은 이상 체질을 타고 났다. 감이 좋다고나 할까? 아님, 요즘 젊은 사람들 말대로 촉이 좋다고 할까.
어렸을 때부터 그가 불안한 기분이 들면 이상하게도 자신이나 주변에서 사고가 생기고는 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그런 기분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다. 선의로 했던 그의 행동의 결과는 학우들의 따돌림으로 나타났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으로 변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어두운 인생을 보내던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자신의 성격을 개조하기 위하여 많은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의 연장선에서 최종적으로 해병대로의 자원입대를 결심한 것이다.
내성적이고 자신의 세계에 파묻혀 지내던 정진영 상병은 해병대 생활이 처음에는 죽을 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같은 부대 선임인 박재훈 병장 덕분에 지금은 입대 때와는 정반대일 정도로 성격이 변해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박재훈 병장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박 병장을 따라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지원했던 정 상병이다.
조진 병장은 동굴 입구에서 어제 패닉에 빠졌던 선교사를 보살피고 있는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선교사는 아직도 정신이 나간 듯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기랄.”
조진 병장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다. 정치가의 아들로 결코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나 성공적인 삶만을 살아온 그는 아버지의 국회의원 선거 때문에 반강제로 해병대에 입대했다. 2선의 국회의원이었던 조진 병장의 아버지는 해병대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쌍수를 들어 찬성하는 골수 친미 정치인이었다.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와 상대 당에서 자기 자식은 군대 안 보내고 남의 자식만 사지로 보낸다는 공세를 펴 오자 그는 상대 당의 정치 공세를 막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을 해병대에 자원입대시켰다.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조진 병장은 맑은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유산 상속에서 제외한다는 아버지의 협박에 못 이겨 시민권을 포기하고 해병대에 입대한 그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재수 없이 키가 2m에 육박하고 덩치마저 좋다는 이유로 사단 수색대 훈련을 이수한 조진 병장은 영어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되고 만 것이다.
물론 파병은 지원제였다. 하지만 조진 병장이 휴가 시 사회에서 저지른 폭행 사고 때문에 군 영창에 갈 처지가 되자 그의 아버지가 약간의 뒷거래로 파병 지원서에 사인하게 하였고 미군과의 연합 작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어 자원을 확보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던 해병대 지휘부는 그의 지원을 당연히 환영했다.
“제기랄. 제기랄.”
조진 병장은 눈앞의 오크 시체를 번쩍 들어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야∼ 조 병장이 역시 한 힘 하는구만, 남들은 질질 끄는 괴물 시체를 혼자서 번쩍 드네.”
그 옆에서 또 다른 오크 시체를 질질 끌고 구덩이로 오던 김준성 중사가 한마디했다.
“원래 우리 사단에서 힘 하면 조 병장 아닙니까? 덕분에 참호 씨름에서 1위한 것도 우리 분대구요.”
박 병장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랬었지. 어찌 됐던 엄청난 건 확실해. 이곳이 이 상병 말대로 정말 판타지 세계라면 조 병장은 장군감이구만”
“그렇죠. 판타지 세계라면 힘이 세면 장땡 아닙니까? 조 병장도 조선시대라면 완전 장군감이죠. 하하!”
조진 병장은 두 사람의 실없는 농담을 듣고 있다가 장군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자신도 운동을 정말 좋아하고 유학 시절 미식축구, 승마, 펜싱 등 안 해 본 운동이 없었다.
‘그래, 판타지 세계라면 이 꼴 저 꼴 안 보고 살아도 되겠지. 꼴 보기 싫은 두 사람을 작살 내 버려도 될 테고.’
조진 병장은 오크 시체를 나르다 말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새로운 세계에서 맞는 두 번째 밤이 찾아왔다.
어김없이 두 개의 달이 떴고 식사를 마친 분대원들과 민간인 3인은 동굴 입구로 모였다. 오크들의 시체도 분대원들이 힘을 모아 다 묻었고 그사이에 동굴에 있던 5갤런통으로 물도 떠와 저녁은 비상식량으로 때울 수 있었다.
비록 물만 끓여 부으면 되는 동결 건조 비빔밥이었지만 물이 없어 어제 하루 종일 먹었던 칼로리 바에 비하면 천국의 맛이나 다름없었다.
“마인즈. 짭짭. 뜨거워, 후후.”
박재훈 병장은 그들이 수색 작전을 나갈 때 가지고 나가는 이틀치의 비상식량 6봉지 중 그래도 맵지 않은 야채 비빔밥을 마인즈에게 주었다.
약간의 몸짓 발짓으로 박 병장은 마인즈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마인즈는 어젯밤부터 꼬박 굶은지라 자신을 감시하고 있던 병사가 주는 뜨거운 물이 든 봉지를 얼른 받아 들었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좋은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김성한 박사는 마인즈의 억양이 독일 사람이 영어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말을 했다.
의학은 독일의 영향력이 매우 큰지라 학술회의에서 독일 의사들이 발표하는 것을 몇 번 들어본 경험이 있는 김성한 박사의 말은 정확할 것이다.
취조 과정에서 문 대위 일행은 마인즈가 하는 말의 어순이 영어와 같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마인즈의 발음은 마치 지구에서 필리핀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 영어를 갓 배워 하는 것처럼 툭툭 튀었으나 억양은 말꼬리를 위로 치켜 발음하는 것이 독일어와 비슷하게 들리기도 했다.
문무혁 대위는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한쪽 구석에서 박재훈 병장의 감시를 받으면서 허겁지겁 식사를 하고 있는 마인즈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는 김성한 박사에게 다가갔다.
“김 박사님, 어떻습니까?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정보가 최고입니다. 빠른 시간 내에 저 사람, 마인즈라 했던가요? 하여튼 저 사람과 대화가 되어야 할 텐데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선 여기 이 알파벳을 보십시오.”
김성한 박사는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마인즈가 적어 준 겁니다. 다행히 이곳에서 쓰는 문자는 표음문자이고, 구조가 알파벳 26자와 같습니다. 문장의 어순도 영어와 비슷한 것 같구요. 어떤 면에선 영어보다 더 단순한 면도 있습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일 이곳의 글자가 중국어처럼 표의문자였으면 정말 황당할 뻔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얼마나 해독이 어려웠는지 아는 문무혁 대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다행입니다.”
“일단 지금부터 단어장을 만들 겁니다. 그러다 보면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물론 시간은 걸리겠지만요.”
“시간이야 어쩔 수 없지요. 그래도 박사님께서 수고 좀 해 주십시오.”
문무혁 대위는 김성한 박사에게 당부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김성한 박사였다.
군대라는 조직에서 자신의 명령만을 받들고 있는 부하들에게 약한 모습이나 망설이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문 대위님, 걱정 마십시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식량 사정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정찰 나오셨다 이렇게 된 거라 그다지 식량을 많이 가지고 다니시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김성한 박사는 자신이 방금 먹은 동결 건조 비빔밥 빈 봉지를 흔들었다.
“당분간… 한 보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동굴에 쌀과 밀가루 그리고 말린 과일과 육포 소금 따위가 상당히 있습니다. 야채가 없어서 걱정이 조금 되기는 하지만, 숲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찾을 수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