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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6화)
1. 도래(渡來)(6)
“아! 박사님, 이거요. 잠시만요.”
두 사람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민유라 간호사가 손을 흔들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조그마한 배낭을 열었다.
“이건 저희가 봉사하러 갔던 마을에서 시험 삼아 재배해 보려 했던 채소의 씨앗들입니다. 그 사건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것들이에요. 시험 재배용이라 얼마 되지는 않지만요”
민유라 간호사가 연 배낭에는 말 그대로 보물들이 들어 있었다.
적상추, 청상추, 무, 부추, 고추, 알타리무, 청갓, 쪽파, 시금치, 옥수수 씨앗들이었다.
“세상에 이런 보물이 있었군요. 아까 괜찮다는 말은 했지만 사실 정말 걱정이 많았습니다. 당장 괴혈병이 걱정이 됐거든요. 말이 그렇지 이곳에서 과일이나 채소를 구할 일도 깜깜했고요. 감사합니다.”
문 대위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비타민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았을 때 야채만 많이 먹어도 걸리지 않는 괴혈병 때문에 십자군 원정대부터 시작해서 신대륙으로 향하는 선원들이나,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서 장기간 항해를 하던 선원들이 얼마나 많이 목숨을 잃었는지 잘 알고 있는 문무혁 대위의 눈에는 알루미늄 봉지에 담겨 있는 씨앗들이 보물처럼 보였다.
이것들만 잘 키우면, 특히 상추야 금방 자라니 채소 걱정은 덜 수 있을 터였다.
민유라 간호사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저희를 구하시다가 이런 곳까지 오시게 됐는데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그리고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흰 군인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그런데 선교사 양반은 어떻습니까?”
문무혁 대위는 이곳에 오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따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누구를 탓할 것인가.
“피 전도사님은… 아! 저분은 교회 전도사님이라고 하시네요.”
민유라는 자기 자리인 양 하루 종일 동굴 입구를 떠나지 않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피성기를 가리켰다.
“여기 오기 전 패닉을 일으킨 것은 그냥 무서워서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보다 더 심한 것이 이곳에 오고 나서 겪은 쇼크예요.”
민유라는 피성기를 가리키던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문무혁 대위와 김성한 박사의 눈길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 자연스럽게 밤하늘로 향했다.
“저 달 두 개가 문제의 원인이죠.”
“잘 이해가 안 되네요.”
“믿음의 문제이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에게 이계의 존재, 괴물의 존재, 두 달의 존재는 지금까지 피 전도사님이 믿고 있던 신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으니까요. 지구가 태양을 도는가 아니면 태양이 지구를 도는가로 200여 년 넘게 분쟁을 벌인 곳이 기독교지요. 아마 지금 피 전도사님은 자기 자신의 삶 자체가 부정되는 느낌이 드시겠지요. 가장 믿던 신에게 사기당한 기분이실 테니까요.”
문무혁 대위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런 말씀 드리면 그렇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민 간호사님도 아프가니스탄에 기독교 봉사하러 오신 것 아닌가요? 민 간호사님은 괜찮다는 건가요?”
민유라는 문 대위의 질문에 잠시 생각을 가다듬는 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조금 전 피성기 전도사의 이야기를 하며 흥분된 모습을 보이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를 믿어요.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을 믿지요. 하지만 단순히 성경의 구절에 얽매이고 싶지는 않네요. 제 오만일지는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 이슬람교 사원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행위를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군요.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께서 그런 행위로 인한 분쟁과 다툼 그리고 죽음을 보고 기뻐하시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요.”
문무혁 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는다고 다 같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문무혁 대위 옆에서는 김성한 박사가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민유라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송 상병, 너 고향이 시골이지?”
문무혁 대위는 김성한 박사와 민유라와의 대화를 마치고 분대원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당연하게도 분대원들의 인적 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 다행히 분대원 중에는 벽촌 시골에서 농업 고등학교를 나와 농사만 짓다 해병대에 온 송채민 상병이 있었다.
“그럼요. 대위님도 알다시피 지리산 자락에서 농사만 짓다가 세상 구경하고 싶어서 해병대 지원한 거 아닙니까? 흐흐흐흐.”
“이것 좀 봐라. 이거 키울 수 있겠냐?”
송채민 상병은 문무혁 대위가 건네준 씨앗들을 받아 들고 앞뒤를 살펴보았다.
“흠. 병충해에 강한 품종이네요. 수확량은 떨어지지만 씨앗도 얻을 수 있고요. 근데 몇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여기 주신 씨앗 중에 상추는 노지에서 키우기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이 상추는 비가 오면 며칠 사이에 그냥 녹아 버립니다. 제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예전 상추는 안 그랬다는데, 요즘 상추는 계량이 되어서 야들야들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이 상추를 키울 때는 하우스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우스를 만들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움막이라도 지어서 보온을 하고 비를 막아 주어야겠죠.”
농사만 지었다는 송 상병답게 즉시 답이 나왔다.
“그리고 나머지도 여기 날씨 상황을 봐서 파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무작정 뿌렸다가 그냥 날려 먹을 수 있거든요. 상추야 간이로 움막을 만들어서 먼저 키우고요.”
“그래 그건 너한테 맡기마. 그리고 넌 앞으로 우리 농수산부 장관이다. 무조건 너만 믿을 테니 우리가 빨리 먹을 수 있게만 해라.”
“하하! 걱정 마십시오. 씨앗까지 다 받을 테니 걱정 하덜덜 마세요.”
문무혁 대위의 당부에 송채민 상병은 자신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탁탁 쳤다.
문무혁 대위의 스타일이었다. 임무를 맡기면 거의 무조건적인 신임. 그리고 잘못되면 자신이 책임지는 스타일. 아랫사람으로서는 최고의 상관이라 할 만했다.
“중사님. 이젠 아주 고기를 쓸어 담으시네요. 대단하십니다.”
“정 상병. 헛소리하지 말고 그쪽 잘 잡아. 안 그래도 지금 식량 사정이 안 좋은데.”
“네네. 걱정 마십시오.”
유로핀 대륙―마인즈가 알려 준―에 문무혁 대위 일행이 온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분대원들이 휴대했던 식량이나 동굴에 있던 식량들이 줄어들자 벌써 오래전부터 일행들은 채집 활동과 사냥 그리고 마을을 감싸고 돌고 있는 개울에서 물고기 잡기를 하고 있었다.
낚시가 취미였던 김준성 중사는 노끈의 올을 풀어서 그물을 만들고, 탄피를 잘라 갈아서 낚싯바늘을 만들었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분대원들이 해병대 훈련소가 있던 포항의 강을 따서 명명한 형산강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강이라 부르기에는 모자람이 있었으나 상당한 폭의 개울이었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어서 형산강의 명명은 한 사람의 반대만을 제외하고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반대 의견을 낸 사람은 이준혁 상병이었다. 이준혁 상병은 여긴 판타지 세계이므로 이곳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주장을 했으나, 분대 제일 졸병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분대원은 한 명도 없었다.
일행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 숲이 울창하고 지형이 거의 평탄한 지역이라서 그런지 형산강의 유속은 그다지 빠르지 않았고 수량도 풍부했다. 무엇보다도 다행스러운 것은 물고기가 풍부하다는 점이었다. 김준성 중사는 물 만난 고기마냥 물고기를 잡아 훈제를 했다.
포로 아닌 포로로 잡혀 있는 마인즈의 취조 결과와 이곳 나무 몇 그루를 잘라 나이테를 확인해 본 결과 이곳의 날씨는 지구의 캐나다 남부 내지는 미국의 북부 기온을 가진 곳으로 생각되어 겨울이 추울 것이라는 것이 분대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일행이 유로핀 대륙에 떨어진 때가 늦은 여름 무렵이라서 지금으로서는 무엇보다도 겨울을 나기 위한 월동 준비가 절실한 시기였다.
“얼른 배를 따고 내장은 모아라. 젓갈 담가야 되니까.”
“중사님도 별걱정을 다하십니다. 한두 번 해 보는 일입니까? 걱정 마시고 많이만 잡으세요. 하하하하!”
“그런데 이제 몸은 다 나은 거지? 안색은 많이 좋아 보인다마는.”
“그럼요. 처음 한 2주일은 죽겠더니 지금은 멀쩡합니다.”
처음 왔을 때 누구보다 고생했던 정진영 상병이여서 분대원들의 걱정은 컸다.
김성한 박사도 도저히 원인을 파악할 수 없어서 혹시나 풍토병을 앓는 것이 아닌지 분대원들을 긴장시키기도 했었던 정 상병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김 박사님께 알려라. 알았지?”
“넵! 넵! 흐흐.”
두 사람이 물고기를 잡아 배를 가르고 젓갈과 훈제할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그들의 옆에는 소총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일행이 자리 잡고 있는 오크 마을이 배후에는 돌산이 있고 나머지 삼면을 빙 둘러서 형산강이 흐르는 지형이라서 그런지 강과 마을 사이에는 위험 동물은 없었지만 강 반대편도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처음에 훈제를 하기 위해 물고기 배를 따서 그냥 강가에 버렸는데, 그 냄새를 맡은 고블린 떼들이 나타나서 설치는 바람에 상당한 양의 탄약을 소비하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가 제일 편한 일이여. 송 상병 봐라 날마다 땅 파느라 뺑이 치고 있잖아.”
“그건 그렇죠. 그래도 요즘은 그 뭐시더라… 목사 양반이 함께하잖아요. 한동안 반쯤 죽어 지내더니 요새는 살아났는지 송 상병을 꽤 도와주던데요?”
“목사가 아니고 전도사라고 하더라. 며칠 못 버티고 죽을 것 같더니만 그래도 살아나서 다행이지. 하여튼 걱정거리 하나는 덜었다고 봐야지. 자자, 대충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서 훈제하자.”
손질한 물고기와 내장을 담은 5갤론 통을 짊어지고 마을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길은 가볍기만 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이제 어느 정도 유로핀 대륙 생활에 익숙해진 것이다.
일행이 유로핀 대륙에 떨어지고 나서 가장 적응을 못한 사람은 선교사인 피성기였다. 그를 파견한 한국 교회의 전도사였다는 그는 처음 며칠은 몇 번이고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조용히 마을 공터 한편에서 송채민 상병이 경작하는 채마밭에 나타나 채소 기르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그렇게 며칠을 지내더니, 요즘은 천성이 낙천적이고 밝은 송채민 상병과 짝짜꿍이 맞았는지 오크 마을의 천막 몇 개를 부셔서 온실을 만드느니, 형산강에서부터 물을 끌어와야 한다느니 하며 원주민인 마인즈를 데리고 설치고 있었다.
자신의 탓으로만 느껴지는 봉사단 대학생들.
나포와 일련의 사건으로 인한 유로핀 대륙으로 차원 이동.
그리고 생존을 위한 일행의 몸부림.
지구가 아닌 곳에 존재하는 마인즈라는 남자.
자신이 믿던 것에 대한 부정 자책감 등등의 감정이 몰아쳐 금방이라도 미칠 것 같던 피성기 선교사를 구원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인즈의 존재였다.
피성기 선교사를 항상 주시하던 문무혁 대위는 그의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서, 김성한 박사에게 부탁했던 유로핀 대륙의 공용어인 유로어의 사전 편찬을 그에게 맡겼다.
문무혁 일행이 떨어진 새로운 세상에 인간이 살고 있고 그들의 문명이 상당 수준 지구의 중세와 비슷하다는 것을 마인즈를 통하여 알게 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였다. 그 정보를 알기 위한 방법으로 가장 선결되어야 할 과제는 바로 언어였다.
문무혁 대위는 사전 편찬의 임무를 피성기 선교사에게 맡기며 그 중요성을 몇 번이고 역설했다.
그의 주의를 사전으로 돌리기 위한 시도였다. 한편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도 3년여를 버티며 선교 활동을 한 사람이니, 어느 정도 새로운 곳에 대한 적응력은 있으리라 문 대위는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문 대위의 바람대로 피성기 선교사는 그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덕분에 피성기 선교사는 일행 중 김성한 박사와 더불어 대륙 공용어라는 유로어에 가장 먼저 숙달된 사람이 되었다. 유로어의 어순은 일행에는 행운이게도 일행들에게 익숙한 영어의 어순과 같았고, 철자 문법 조어법상의 불규칙성이 없어서 지구의 에스페란토와 매우 비슷한, 상당히 배우기 쉬운 언어였다.
그들이 유로핀 대륙에 떨어진 지 한 달이 된 지금 피성기 선교사와 마인즈는 손짓 발짓 그림 그리고 마인즈가 주워 들은 한글과 유로어로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있을 정도가 될 수 있었다.
피성기 선교사는 자신을 괴롭히던 성경의 모순점에 대한 생각들을 잠시 접고 이곳 세계에 적응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뇌리를 사로잡는 잡념을 없애려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언어를 배워서 마인즈에게 이곳의 신에 대한 것을 알아내려는 생각이 강했다. 그가 왜 이곳의 신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지는 그만의 비밀이었다.
이곳에 도착해서 의식을 찾기 전에 그에게 나타난 현상. 그 현상을 이해하지 못해서 피성기 자신은 갈등을 겪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마인즈에게 우연히 들은 한 가지 단어 ‘여호와’ 아직 그 단어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여호와란 단어를 말할 때 마인즈의 표정과 자세에서 경건함이 묻어 나오는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자신이 생각하는 그 단어가 맞을 거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