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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10화)
2. 접촉(3)
채명훈 하사와 송채민 상병, 이준혁 상병은 마을 촌장이 내준 통나무집에서 마을 사람들의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츠 마을은 약 40호의 가구가 살고 있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어둠의 숲 인근이라서 그런지 마을 전체가 허술하기는 하지만 목책으로 둘러 싸여 있는 폼이 그런 대로 안전해 보였다.
세 사람이 허락을 받고 마을로 들어오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촌장에게 뇌물을 바치는 일이었다.
일행들도 아끼고 아껴서 먹던 설탕 한 봉지에 이방인을 경계하던 촌장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마인즈에게 얻은 정보로 이곳은 단 음식이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일행의 비장의 무기였다.
촌장은 그들을 비어 있는 오두막에 남겨 두고,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모아 회의에 들어갔다. 채명훈 하사가 내어 놓은 소금과 밀의 교환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지구에서도 중세시대에는 소금은 엄청난 귀중품이었다.
프랑스 왕정 몰락의 시작을 알린 베르사이유 궁전 건축의 토대도 소금 위에 이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프랑스 혁명도 국왕의 사치 자금을 대기 위해 소금에 부여하던 막대한 세금을 못 이긴 민중들의 반발에 의하여 일어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일인당 일주일에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되는 소금의 양이 법으로 정해져 있을 정도였으니 프랑스의 왕정이 소금 때문에 무너졌다는 말이 영 헛말은 아니었다.
더불어 그 당시 지중해에서 생산된 소금이 대상들을 통해 사하라 사막을 넘어 중부 아프리카까지 가면 같은 무게의 황금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귀중한 물건이었다.
이곳도 그다지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일행의 판단이었고, 그 판단은 정확했다.
잠시 후 통나무집에서 쉬고 있던 세 사람에게 회의를 마친 촌장이 찾아왔다. 촌장은 아쉬운 표정을 얼굴 한 가득 보이며 채명훈 하사에게 말했다.
“소금을 전부 사고 싶지만 저희가 가진 식량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산속에 있는 마을이라서 농사를 많이 지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됩니다. 마을에 여유가 되는 밀을 전부 합하더라도 아까 주신 소금의 절반 정도만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채명훈 하사가 내놓은 소금은 10kg이었다. 아직 송채민 상병과 이준혁 상병의 배낭에도 각각 10kg의 소금이 더 있었다.
채명훈 하사는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하시죠. 저희가 가져온 소금을 전부 드리지요. 앞으로도 계속 거래를 해야 될 터이니 여유가 되시는 밀만 받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마을도 다른 마을과 거래를 하지 않으십니까?”
촌장은 소금을 더 준다는 말에 반색을 했다. 그리고 방법을 찾았다는 듯이 말했다.
“저희가 채집한 약초 그리고 인근 숲에서 잡는 동물의 가죽을 사러 오는 상인이 남작령에서 일 년에 두 번 옵니다. 늦가을에 한 번, 초봄에 한 번 이렇게요. 가을에는 저희가 모아 놓은 약초를 밀과 잡곡으로 바꾸어 주고, 봄에는 겨울 내내 모아 놓은 짐승가죽을 생필품과 바꾸어 주지요. 이제 곧 봄이니 올 때가 됐습니다. 소금을 주고, 밀을 가져다 달라고 하면 아마 기뻐할 겁니다.”
옆에서 채명훈 하사와 촌장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준혁 상병은 채명훈 하사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소금을 밀과 바꾼다고 하면 상인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소금이야 저희는 아직 넉넉하지만, 이곳에서는 귀중품이나 다름없잖습니까?”
“맞습니다.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나면 이곳 사람들 제명에 못 죽을 걸요.”
송채민 상병의 맞장구가 이어졌다.
사실 이런 궁벽한 화전민 마을에 밀로 바꿀 소금이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을 터였다. 상인이 남작령에 소문이라도 내면 분명 암염 광산이라도 나온 줄 알고 영주가 군사를 파견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촌장님. 들으셨다시피 잘못하면 소금 때문에 마을에 평지풍파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소금은 그냥 마을에서만 소비하십시오. 아니, 앞으로 마을에서 소비하시는 소금은 저희가 무상으로 공급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희가 몬스터 부산물을 가져올 테니, 그것을 상인과 밀로 바꿀 수 있게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것도 따로 사례하겠습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촌장은 마법사의 가디언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말이 소금이지 소금은 척박한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촌장은 있는 살림 없는 살림 다 꺼내서 세 사람을 대접했다.
마을 주민 자신들도 아끼고 아껴 보관해 놓은 맥주통을 꺼내 놓자 세 사람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보고 촌장이 혹시 이들의 주인이라는 마법사가 흑마법사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일순했을 만큼 그들은 기뻐했다.
새로운 세상에 떨어지고 나서 본의 아니게 6개월 동안 금주를 한 3명의 해병대 수색대원들에게 맥주는 생명수와 다름없었다.
하츠 마을 촌장에게 얻어 온 맥주 한 통과 밀가루 두 포대를 짊어지고 자랑스럽게 오크 마을로 귀환한 세 명의 해병은 초조히 소식을 기다리던 동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 환영은 고생한 세 명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맥주로 향한 것이었다.
봄이 되어 들판의 눈이 녹자마자 문무혁 대위는 일행들에게 어느새인가 삼총사로 불리는 채명훈 하사, 송채민 상병, 이준혁 상병을 데리고 하츠 마을로 향했다.
일행들의 근거지인 오크 마을에서 하츠 마을까지는 걸어서 하루 거리였다. 문무혁 대위는 마인즈가 만들어 준 손수레에 그동안 꾸준하게 잡아서 모아 놓은 오크의 이빨과 뼈, 그리고 와이번의 가죽과 뼈 등을 싣고, 길을 알고 있는 삼총사와 함께 하츠 마을로 향했다.
그가 직접 하츠 마을로 향하는 것은 하츠 마을에 일행의 근거지를 만들 수 있을지 살펴보려 함이었다.
요르크를 구해 주고 설탕과 소금으로 촌장의 믿음을 얻었다는 판단이 서자 문 대위 일행은 다음 단계의 계획으로 하츠 마을로 근거지를 옮기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비록 화전민들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라고는 하나 일행이 유로핀 대륙에서 살아가려면 어차피 이들의 세상에 적응할 접촉점이 필요했다. 그 접촉점이 무력이 약하고 실제로 도망자 신세인 하츠 마을 사람들이라면 일행이 그들의 보호자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데 별 무리가 없을 듯싶었다.
그리고 아무리 일행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어둠의 숲이라고는 하지만 일상적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일행의 안전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차원에서라도 어둠의 숲을 벗어나는 것은 중요했다. 더불어 사람다운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일행의 욕구도 더 이상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 * *
문무혁 대위 일행이 하츠 마을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을 때 하츠 마을에는 또 다른 한 무리의 일행이 접근하고 있었다.
일행의 선두에서 3대의 짐마차를 이끌고 있는 상인 일행과 또 다른 마차에 타고 있는 로브를 입은 여자였다.
“마법사님. 이제 거진 다 왔습니다. 불편하신 곳은 없으시지요?”
레겐스부르크의 상인인 로펜은 자신의 불운을 저주했다.
그는 눈이 녹아서 통행이 가능해지는 봄이 되면 어둠의 숲 인근의 화전민 마을을 돌면서 그들이 겨우내 모아 놓은 짐승 가죽을 식량과 생필품으로 교환해 주는 일을 몇 년째 해 오고 있었다.
영지 내의 마을이나 시장을 이용하지 못하는 도망자 신세인 화전민 마을 사람들과의 거래는 소상인이었던 그를 몇 년 사이에 남작령에서 가장 급속히 발전하는 상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어둠의 숲 근방으로 가는 상행이라 위험했지만 그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의외로 어둠의 숲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별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화전민들이 숲 인근에서 살 수 있을 것인가?
화전민들과의 거래는 거저먹기나 다름없었다. 올해도 봄이 오자 어김없이 로펜은 이번 상행으로 얻을 막대한 이익에 즐거운 콧노래를 부르면서 안면이 있는 몇 명의 용병을 고용해서 화전민 마을을 돌 준비를 했다.
그런데 그런 로펜을 막무가내로 찾아온, 지금 자신들 뒤에서 졸래졸래 따라오고 있는 마차에 타고 있는 여자로 인해서 그의 즐거운 기분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무작정 자신을 어둠의 숲으로 안내를 하라는 여자를 로펜은 처음에는 무시하고 욕을 해 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손에 만들어낸 불덩어리를 본 순간 입에서 나온 욕을 바로 집어삼킬 수밖에 없었다.
옛 속담에 마법사와 처갓집은 멀수록 좋다고 했다. 그만큼 일반 사람들에게 마법사가 보여 주는 능력은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로펜은 마음속으로 툴툴거릴지라도 불만을 입 밖으로 낼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에미린 홀더는 어둠의 숲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가슴이 설레 옴을 느꼈다.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프랑켄 왕국 왕립 마법청의 연구사인 그녀는 마나 유동의 탐지를 연구하고 있었다. 마나는 무한한 것이 아니다. 물통에서 물을 한 바가지 퍼내면 그 빈자리를 주변의 마나가 채운다. 그때 마나는 흐른다는 가설을 세운 그녀는 마나가 흐르는 것을 감지만 할 수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마법의 발현을 탐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이 20세에 4서클 유저가 되서 왕국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마법사인 그녀는 자신의 연구를 이루기 위해서 속해 있던 마탑을 나와 왕립 마법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법사들은 국가에 소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강했으나 어찌 됐든 가장 많은 금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왕립 마법청이었다.
그녀의 연구가 성공해서 마나의 발현을 감지할 수 있다면 군사적으로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이 되자 왕립 마법청에서도 에미린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녀가 만들어낸 마나 유동 감지 마법진은 실패로 돌아갔다. 마법진 바로 옆에서 마법을 펼쳐도 마법진은 전혀 감지를 하지 못했다.
에미린의 낙담은 컸다. 자신이 존경하는 사부의 만류도 뿌리치고 들어온 왕립 마법청이었다. 천재라고 떠받침만 받던 그녀에게 실패는 더할 수 없는 실망으로 다가왔다.
실의에 빠져 있던 어느 날 밤이었다. 멍하니 자신의 실험 노트를 쳐다보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마나 유동 마법진이 빛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그래 내 마법진은 실패한 것이 아냐. 다만 아직 마나 유동에 대한 민감도가 높지 않아서 대규모 마법이 아니면 감지가 되지 않았을 뿐이야.’
마차에 혼자 앉아서 밖을 물끄러미 바라다보며 지난 일을 회상하던 에미린은 조그마한 입을 앙다물었다. 고집이 세 보이는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에미린은 곧장 마나 유동 감지 마법진의 작동 사실을 상부에 알렸다. 하지만 마나 유동 감지 마법진의 성과를 보기 위해서 온 왕립 마법청 청장의 7서클 마법에도 마법진은 작동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로 에미린의 연구에 대한 지원도 끊어졌고 그녀는 왕립 마법청에 속해 있는 많은 마법사들이 하는 것처럼 군사적 용도의 마법 연구에 투입되었다.
에미린은 자신의 연구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마법진이 작동했을 때 마법진이 가리킨 위치는 대륙의 4대 금지 중 한 곳이라는 어둠의 숲이었다.
에미린이 지금 험한 산길을 달리는 마차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는 것은 자신의 연구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직접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천재 특유의 독선과 자신의 연구에 대한 확신이 더해져서 그녀는 분명 어둠의 숲에서 7서클의 마법의 몇 십 배 되는 마법의 발현이 있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에미린은 그 증거를 찾기 위해 그녀가 어둠의 숲으로 가겠다는 요청을 수락하지 않은 왕립 마법청을 무단이탈해 어둠의 숲으로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