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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11화)
2. 접촉(4)
로펜은 그의 눈앞에 펼쳐진 행운에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물건이 무엇이던가. 돈이 있다고 해도 쉽사리 구할 수 없는 귀하디귀한 와이번의 뼈와 가죽 아닌가?
비록 많이 훼손됐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라면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었다. 로펜의 눈에는 지금껏 툴툴거리면서 모시고 온 여 마법사마저 행운의 여신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이런 귀한 물건을 어떻게…….”
“그건 로펜 님께서 아실 일은 아니고, 일단 얼마나 쳐 주실 수 있는지 그것부터 제시 하시지요”
로펜을 상대하고 있는 사람은 이준혁 상병이었다. 판타지 세계의 전문가답게(?) 상당이 능숙하게 전문용어(?)인 ‘제시’까지 사용하며 거래를 하고 있는 이 상병의 모습은 거래의 거 자도 모르는 나머지 일행들 눈에는 참으로 늠름하게 보였다.
“현재 제가 수중에 가진 돈이 얼마 안 됩니다만, 남작령에서 바로 가져다 드릴 수 있습니다.”
로펜은 하츠 마을 촌장에게 소개받은 사냥꾼들이 귀인으로 보였다. 이 거래만 성사시킨다면 그를 장돌뱅이라고 늘 놀리는 레겐스부르크의 제일 상인인 부르터의 돼지 같은 코를 지금보다 훨씬 더 납작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깐 제시를 해 보시라고요. 아니면 딴 곳에 알아보구요.”
급한 로펜의 마음과는 달리 그의 눈앞에 있는 이 오리엔탈 사냥꾼은 녹록하지 않았다. 아니, 녹록하다기보다는 거래가 상당히 능숙했다.
물론 로펜은 판타지 마니아인 이 상병이 온라인 게임에서 아이템을 팔 때 하던 행동을 그에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던가? 등짐 장사로 시작했던 장사를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에서도 손꼽히는 중견 상회로 일구어낸 사람 아니던가.
“최고로 쳐 드리면 50골드까지 쳐 드릴 수 있겠습니다. 상태가 좋았다면 월등히 더 좋은 가격을 쳐드릴 수 있겠지만 원체 훼손이 심해서요.”
로펜의 말마따나 RPG 4발에 조각난 와이번의 시체는 파편에 가까웠다.
“흠, 대장님, 어떻게 할까요?”
이준혁 상병은 더 이상 자신의 선에서 결정하기 어려운지 문무혁 대위를 바라보았다. 바깥세상으로 나오면서 호칭을 정리해서 일행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대위라는 호칭을 버리고 대장으로 부르기로 약속하고 있었다.
“흠… 이곳 사인 가족 한 달 생활비가 4골드 정도라고 했나? 그 정도면 괜찮을 듯싶다.”
문 대위라고 해서 뾰쪽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와이번이 비싸다는 이야기는 마인즈에게 들었지만 목수인 마인즈가 정확한 가치를 알 리 없었고, 문 대위가 아는 이곳의 물가 수준에 대한 정보라고는 4골드 정도면 4인 가족이 넉넉하게 한 달을 생활할 수 있는 돈이라더라 하는 정도였다.
문 대위는 마음 편하게 4골드를 100만원으로 계산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저 상인이 제시한 50골드는 1,250만원이라는 거금이 된다. 오크 어금니니 하는 것들은 빼고도 말이다.
결심을 굳힌 문 대위가 거래를 성사시키려는 찰라 뒤쪽에서 뾰쪽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안 돼요. 50골드라니… 최소한 200골드의 값어치는 있어요.”
상인과 문 대위 일행이 거래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던 에미린이었다.
에미린은 마법사라서 실험에 사용되는 몬스터 부산물의 가격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을 로펜이 부르자 무심결에 간섭을 하고 만 것이다.
문 대위는 갑자기 튀어나온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초록색 눈에 로브 사이로 살짝 보이는 금발이 돋보이는 엄청난 미인이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사기는 면했습니다.”
문무혁 대위는 쓰고 있던 전투모를 벗어서 오른손에 들고 살짝 목례를 했다.
“별말씀을요. 너무 터무니없는 가격이라서 잠시 참견한 것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로펜은 미칠 지경이었다. 막 입에 들어온 떡을 삼키려는 순간에 저 여자 마법사가 뒤통수를 친 것이다. 저 여자가 마법사만 아니었다면 로펜은 아마도 죽도록 매질을 했을 것이다.
“운송비도 있고, 여기까지 상행을 하는 위험 부담도 있는 겁니다. 백작령의 마법 상점에 가시면 그 가격에 팔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산속에서는 저도 위험 부담이 있는지라…….”
로펜은 열심히 자신을 변명했다. 로펜의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제시한 가격이 터무니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래에 갑자기 끼어든 여인의 말에도 불구하고 문 대위는 로펜이 말한 가격에 와이번의 부산물들을 팔아 치울 생각이었다. 일행들이 하츠 마을에 정착하려면 남작령에 한 명 정도 교류가 있는 상인이 있는 것은 전혀 해가 될 일이 아니었다.
그가 생각을 가다듬고 있는 도중에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자보자 하니 거 너무들 하시는구먼.”
거래하고 있던 로펜과 문 대위 일행의 사이에 반질반질하게 기름칠이 되어 있는 잘 손질된 레더 아머를 입은 건장한 사내가 끼어들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그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와이번 부산물이 실려 있는 수레를 걷어찼다.
그의 이름은 로펜의 친구이기도 한 용병 브렌튼이었다.
브렌튼은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의 용병 중 유일하게 오러를 다룰 줄 아는 용병이었다. 남작령의 기사들에게는 못 미쳐도, 검에 살짝 오러를 비칠 수 있는 소드 익스퍼드 초급의 강자인지라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에서는 목에 힘을 주고 다니는 축에 속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인 로펜의 의뢰로 용병 네 명을 이끌고 상행에 따라나선 브렌튼은 지금 상황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의 상식으로는 근본도 모르는 사냥꾼 녀석들이 와이번을 잡았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6서클 마법사와 마법사를 근접 방어해 줄 중갑주를 입은 기사 네댓 명은 있어야 겨우 잡을 수 있는 몬스터가 와이번이다. 그나마도 싸우다가 와이번이 도망가면 닭 쫓는 개마냥 그냥 쳐다볼 수밖에 없는 잡기 힘든 몬스터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와이번의 시체를 들고 거래를 하려는 놈들이 아마도 어디에선가 동족끼리 싸우다 죽은 와이번 시체를 운 좋게 발견해서 한몫 단단히 챙기려는 무리일 거로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냥꾼 녀석들이 떳떳한 신분도 아닐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떳떳하다면 당당히 뷔르츠 백작령에 있는 마법 상점에 가서 물건을 팔지, 이런 화전민 마을에서 친구에게는 미안한 소리지만 장돌뱅이 상인에게 귀하디귀한 와이번 부산물을 팔지는 않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어이 친구들!”
브렌튼은 가래침을 칙 뱉었다.
자고로 기선 제압이 중요한 것이다.
도발하기 전에 이미 브렌튼은 사냥꾼 무리를 살펴보았다.
그는 별다른 무장을 하지 않고, 나무와 쇠로된 막대기만 들고 있는 사냥꾼들의 모습이 전혀 위험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로펜에게 진 신세를 갚는 좋은 기회로 여기기로 했다.
브렌튼은 슬며시 오른손을 칼 손잡이에 올리며 사냥꾼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냥꾼들의 우두머리는 보통 사람들보다 월등히 큰 자신의 체격에도 뒤지지 않는 건장한 사내였지만 브렌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네놈들이 잡은 와이번도 아닌 듯싶은데 어른들이 좋게좋게 말할 때 그냥 팔아라. 큰 코 다치지 말고.”
로펜은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가자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친구인 브렌튼의 말이 맞는 것이다. 저놈들도 약점이 있다면, 비싸게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브렌튼의 위협에 돌아온 것은 비아냥거림이었다.
“저놈 뭐래요. 꼭 산적같이 생긴 놈이.”
브렌튼에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사람은 문 대위 뒤에서 상황을 보고 있던 이준혁 상병이었다. 그의 뒤에는 송채민 상병이 어느새 AK―47 소총을 들어 브렌튼을 겨냥하고 있었다.
브렌튼은 기가 막혔다. 좋게 말로 하려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저런 놈들은 매가 약인 것이다.
생각과 동시에 브렌튼은 자신의 애병인 롱소드를 뽑았다.
아니, 뽑으려 했다.
탕!
“큭!”
브렌튼의 도발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에미린은 눈을 의심했다.
천지를 진동하는 천둥소리와 함께 용병의 검집에서 반쯤 뽑혀 나오던 롱소드가 절반으로 깨져 나갔고 사냥꾼 일행을 위협하던 브렌튼은 손아귀가 찢어져 피를 철철 흘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에미린은 처음에는 사냥꾼 일행 중에 마법사가 있어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닌가를 의심했다. 하지만 마법 사용 시 나타나는 마나의 유동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금방 의심을 거두었다. 대신 사냥꾼 일행이 들고 있는 막대기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로펜의 일행인 일꾼 두 명이 브렌튼을 부축해서 뒤편으로 데려갔고, 와이번 부산물을 싣고 있는 수레를 사이에 두고 로펜을 호위하고 온 용병들과 사냥꾼 일행의 대치가 이루어졌다.
그때였다. 두 무리의 사이에 있던 수레에 실린 와이번의 부산물들이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탕! 탕!
“다들 꼼짝 말아라. 움직이면 머리에 구멍을 내주마!”
문 대위 일행과 로펜 일행이 대치하고 있던 공터 옆의 건물 지붕에서 위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브렌튼이 롱소드를 꺼내려 할 때 총을 발사한 사람은 거래가 시작되기 전에 공터 주변 집의 지붕에 올라가 있던 채명훈 하사였다. 상인 일행 중에 검을 소지한 사람이 몇 명 있는 것을 보고 건물의 지붕에 올라가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용병 중 한 사람이 칼을 꺼내려 하자 이를 저지한 것이다.
로펜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천둥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칼이 터져 나가고 수레에 실려 있는 와이번 가죽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것을 보았다. 그나마 브렌튼이 데리고 온 용병들은 간신히 서 있었으나 자신이 데리고 온 일꾼들은 땅 바닥에 주저앉아서 벌벌 떨고 있었다.
문 대위는 상황이 더 악화되기 전에 거래를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이 상인을 잘 구슬려서 이용하려던 계획이 깨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제 그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펜 님. 로펜 님이 말씀하신 가격, 아, 50골드라고 하셨던가요? 절충해서 100골드에 팔도록 하죠. 덤으로 나머지 오크 이빨 등도 그냥 드리지요.”
문 대위는 로펜이 이상한 생각을 못하도록 바로 덧붙였다.
“로펜 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이대로 한 번 싸워 볼까요?”
로펜은 자신들을 마주보고 있는 사냥꾼 일행이 보통 사람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보통 사냥꾼들이 저런 마법 무구를 가지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어떡할 거요, 상인 양반? 한 번 붙어도 우리는 괜찮은데.”
이준혁 상병이 AK―47 소총을 앞으로 내밀며 위협했다.
로펜은 사냥꾼의 말보다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마법 무구가 더 두려웠다.
“아닙니다. 대장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면 따라야지요, 암요. 암요. 말씀하신 대로 사겠습니다.”
로펜 일행과 문 대위 일행의 대치는 그렇게 싱겁게 끝을 맺었다.
문 대위 일행은 필요한 물자를 조달받을 수 있어 좋았고, 로펜은 그래도 시세보다 헐값에 와이번 부산물을 살 수 있어서 좋았다.
에미린은 두 무리의 대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고 있었다.
사냥꾼 일행의 무기는 아무리 봐도 마법 무구는 아니었다. 사냥꾼 일행이 들고 있는 무기는 사용될 때 그 어떤 마나의 유동도 발생시키지 않았다.
“여봐요, 사냥꾼!”
이준혁 상병이 와이번의 대가로 가져올 물건의 목록을 로펜에게 알려주고 있을 때 에미린은 사냥꾼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를 찾아갔다.
“그 무기는 뭐죠? 마법 무구는 아닌 듯싶은데.”
문 대위는 자신의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따지듯 물어보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로펜과의 거래에 끼어들었던 여인이었다.
자그마한 몸을 로브로 감추고는 있었으나 드러난 하얀 얼굴에 점점이 박힌 주근깨에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자신을 쳐다보며 따지듯 물어보는 모습에 문 대위는 너무 귀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서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문 대위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여인이 누군지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무기의 정체를 알려 준다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되었다.
“왜 웃는 거죠? 내가 물어보는 것이 그렇게 우스운가요?”
에미린은 사냥꾼 대장이 웃는 모습에 발끈했다.
4서클 유저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마법사인 자신을 면전에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4서클 마법사면 웬만한 남작 영지에서는 수석 마법사로 서로 앞다투어 초빙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녀 앞에 서 있는 이 남자는 자신을 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가?
문무혁 대위는 자신에게 따지는 여인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츠 마을에 사는 여인은 분명 아닌 듯싶었다. 입고 있는 로브의 재질도 상당히 고급품처럼 보였고 무엇보다도 하츠 마을 여인들의 고생에 찌든 얼굴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아닙니다, 레이디. 그쪽이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문 대위는 하츠 마을에 전혀 어울리는 않아 보이는 이 여인에게 흥미가 생겼다.
물론 6개월 동안 접하지 못한 여자와의 대화가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오크 마을에 민유라 간호사가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 아니던가.
“그리고 일단! 감사드립니다. 조금 전에 거래할 때 레이디의 지적이 없었다면 저희가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무언가를 물어보시려면, 자신이 누군지를 먼저 소개하는 것이 예의 아닐까요? 더불어! 저에게 레이디께서 하신 질문에 대답할 의무는 없어 보이는군요.”
에미린은 문 대위의 조리 있는 대꾸에 할 말을 잃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