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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12화)
2. 접촉(5)
그녀는 당당한 문 대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찬찬히 살펴보았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외모는 참으로 독특했다.
오리엔탈의 전형적인 얼굴 생김새는 그렇더라 하더라도, 검은 가죽 구두에 황토색 얼룩무늬 옷을 위아래로 입고, 상의 위에는 주머니가 많이 달린 두터운 조끼를 걸쳐 입었다. 거기에다가 같은 무늬의 동그란 투구를 쓰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신기한 모습이었다.
“저, 그게 아니라…….”
순간 에미린은 말을 더듬었다. 외모와는 상반되게 너무나 정중하게 자신의 실수를 질책하는 문무혁 대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너무도 놀라운 그들의 무기에 정신이 팔려 예의도 없이 달려든 것은 분명 실수였다.
에미린은 자신의 실수를 한탄했다. 일단 사냥꾼들의 무기에 대한 호기심이 컸고, 그들의 외모가 너무 허름하게 보여 무의식중에 아랫사람 대하듯이 한 것이다.
당당하고, 조리 있게 말하는 사냥꾼 대장의 말투는 어눌했고 예법에 맞지도 않았지만,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말하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에미린을 기를 죽였다.
사실 문 대위로서는 능숙하지 않은 유로어를 틀릴까 봐 조심해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문 대위의 조리 있는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에미린이 말을 더듬는 실수를 한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녀는 홀더 자작의 딸이자, 4서클 마법사의 신분이었다. 아마도 자신의 신분을 알리면 그의 행동도 바뀌고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 서리라 그녀는 확신했다.
에미린의 생각이 이어지고 있을 때 문 대위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인가요, 레이디?”
문 대위의 장난스런 질책이 이어졌다.
에미린은 로브에 달린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고, 로브의 양편을 살짝 손으로 잡은 다음 귀족가의 영애답게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에미린 드 홀더. 홀더 자작가의 여식입니다. 왕립 마법청의 ‘4’서클 마법사이기도 하지요. 다시 한 번 조금 전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사실 유로핀 대륙의 귀족법에 의하면, 에미린이 한 인사는 동등한 귀족에게나 할 만한 인사였다. 문 대위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보아 줘도 자작의 영애인 에미린의 인사를 받을 만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당황한 에미린은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에미린의 정중한 인사에 이번에는 문 대위가 당황할 차례였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좀 전까지 천방지축으로 남의 일에 끼어들고, 자신을 윽박지르던 여인이 갑자기 귀족의 영애로 변해 정숙한 모습을 보이자 그도 놀란 것이다. 더군다나, 자작의 딸내미에 문 대위가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어 하는 마법사라니.
“아? 아! 예.”
이번에는 문 대위가 말을 더듬을 차례였다.
“이제 저의 소개를 했으니 그쪽의 이름 알 수 있을까요?”
문 대위는 눈앞의 깜찍한 귀족 따님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다행스럽게도 문 대위를 구원해 주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대위님, 여기 계셨군요. 시장하실 텐데 식사를 하셔야죠. 요르크에게 부탁해서 빵하고 스튜를 준비했습니다. 요르크 마누라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어서 가시죠.”
에미린과 문 대위 사이에 이준혁 상병이 끼어든 것이다.
그가 문 대위에게 한 말은 ‘대위’란 낱말만 빼고는 능숙한 유로어였다.
문 대위는 이 상병이 대장이라 부르기로 한 것을 깜박 잊고, 대위를 한국말로 발음 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난감한 상황을 구원해 준 이 상병을 반겼다.
“그래, 알았다. 상인과 거래는 잘 마쳤고?”
“넵. 이야기를 해 보니 그 로펜이란 놈, 나쁜 놈 같이는 안 보이더라고요. 손이 찢어진 용병이란 놈도 성격이 급해서 그렇지 괜찮아 보이고요.”
“그래? 하기야 그 용병이 나설 때도 우리 물건을 강탈하려는 폼은 아니었지. 흠.”
“네. 두 사람이 어릴 적부터 불알친구라서 나선 모양이더라고요. 사실…….”
이 상병은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미린을 흘깃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중간에 그 일만 없었으면 쉽게 끝날 거래였죠. 괜히 일이 벌어져서 채 하사님만 고생했죠, 뭐. 잘못돼서 그 용병에게 맞았으며 골로 갔을 텐데. 채 하사님의 솜씨야 죽이지만요. 흐흐.”
에미린은 새로 등장한 사냥꾼 일행과 사냥꾼 대장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봐요. ‘대위’가 무슨 말이죠? 대장이란 말인가요? 아니면 기사단장? 뭐죠? 그리고 ‘하사’는 무슨 뜻이죠?”
“헉!”
이준혁 상병은 자신의 실수를 알아채고 급히 입을 손으로 가렸다.
물론 그런 행동은 당연하게 이들의 정체에 의심을 품고 끼어들 찬스만 노리고 있던 에미린에게 좋은 꼬투리를 주었다.
식식거리며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는 에미린을 손을 들어 저지한 문 대위는 결심을 굳혔다.
“자자, 레이디도 시장하시죠? 식사나 함께하시죠. 이 상병 앞장서라.”
문 대위는 자신을 4서클 마법사에 자작의 딸이라고 소개한 여인을 일행의 유로핀 대륙 정착에 고리로 삼기로 결심했다.
하츠 마을과 교류를 시작했고, 레겐스부르크 남작령과의 교류의 물꼬도 로펜이라는 상인을 통해서 텄다. 일행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문 대위는 이 세상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이 철없어 보이는 귀족 아가씨를 이용하는데 한 점의 망설임도 없었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코가 석 자나 빠진 이 상병은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사람을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요르크의 집으로 안내했다.
* * *
문 대위 일행은 마을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로펜에게 선금조로 받은 마차 한 대에 가득 실린 밀가루와 잡곡 그리고 하츠 마을에서 조달해 온 몇 가지 말린 채소들은 육포와 훈제한 물고기로만 겨울을 지냈던 일행들에게는 가뭄 속의 단비 같았다.
에미린은 문 대위로부터 자신들은 어둠의 숲에서 연구를 하는 마법사의 가디언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바로 어둠의 숲 행을 결정했다. 문 대위 일행이 아니더라도 혼자서라도 어둠의 숲으로 들어갈 각오가 돼 있던 에미린인지라 결정은 빨랐다.
문 대위로서는 뜻밖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이 철없는 아가씨를 근거지인 오크 마을로 데려가나 하는 궁리를 하고 있던 찰나에 뜻밖에도 너무나 순순히 동행을 승낙하는 에미린의 모습에 그는 이 아가씨의 정신 상태를 의심했다.
하지만 에미린이 어둠의 숲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 듣고 나서는 그 의심을 풀었다. 에미린의 설명대로라면 그녀가 개발한 마나 유동 감지 마법진에 감지되었다는 거대한 마나의 유동이 자신들을 지구에서 이 세상으로 데리고 온 원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미린이 감지했다는 거대한 마나의 유동 원인만 파악하면, 혹시나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하고, 살아남는 것에만 중점을 두던 일행의 삶의 방식이 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어찌 됐든 인간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 아니던가.
에미린은 문 대위 일행과 어둠의 숲으로 들어오면서 어이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일행이 어둠의 숲에 막 들어섰을 때였다. 단독 생활을 하는 몬스터인 오우거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오우거는 두 발 몬스터의 대왕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몬스터로 오러를 다룰 줄 아는 기사 서너 명이 합공을 해야 겨우 잡을 수 있는 괴물이었다.
그녀는 황망하게 마법 스태프를 꺼내 오우거를 향해 4서클의 최고 공격마법인 파이어 스피어의 주문을 외웠다. 그때였다. 자신의 옆에 있던 송 상병이라고 불리던 사냥꾼이 말을 걸어온 것은.
“저거 비싸요?”
에미린은 송채민 상병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멍해져 외우던 파이어 스피어 주문의 흐름을 놓쳐 버렸다.
“안 비싸요?”
멍하게 있던 그녀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송 상병의 얼굴은 정말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네, 비싸요. 많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했다.
“아∼ 비싸구나. 근데 와이번보다 비싸요?”
이 무슨 쓸데없는 대화란 말인가? 눈앞에는 육상의 제왕이라는 오우거가 사람의 몸뚱이만한 몽둥이를 들고 표호를 지르고 있는데 왜 오우거의 가격이 중요한지 그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와이번보다는 싸요. 하지만 무지 비싼 몬스터예요.”
에미린은 송 상병에게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자신에게 오우거의 가격을 묻는 송 상병의 눈빛은 진지했고, 더불어 초롱초롱했다.
“대위님, 비싸답니다.”
송 상병의 말에 문무혁 대위와 놀라서 날뛰는 말을 다독거리느라 여념이 없던 채명훈 하사가 대꾸했다.
“그래. 가죽에 상처 내지 말고 잡아라. 와이번처럼 가격이 똥 되면 안 된다.”
“걱정 마십시오. 한 방에 끝내야죠. 저가 이래 봬도 특등사수 아닙니까?”
잠시 후 에미린은 머리에 구멍이 뻥 뚫려 땅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오우거의 시체를 볼 수 있었다.
가디언 일행이 총이라 알려 준 무기 한 방에 무시무시한 오우거가 죽은 것이다.
에미린은 이들을 따라오기로 한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들의 주인인 이름 모를 대마법사의 실험으로 자신의 마나 유동 감지 마법진이 반응을 했다는 가설이었다.
대륙의 금지 중의 금지인 어둠의 숲에서 사는 것도 놀라운데 천공의 제왕 와이번은 닭 잡 듯이 하고, 육상의 제왕 오우거를 길가에 돌아다니는 개 잡 듯이 하는 무서운 실력의 수하를 둔 마법사였다. 저들이 들고 있는 무기도 분명 숲의 마법사가 만들어 준 것일 터였다.
그 정도 마법 실력이면 왕실 마법청의 청장이나 자신의 사부보다 월등히 앞선 실력일 것이 뻔했다.
“대마법사님을 뵙습니다.”
김성한 박사는 어처구니가 없어 자신의 앞에서 딴청을 피우고 있는 문무혁 대위와 한쪽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멋지게 인사를 하고 있는 에미린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는 마나의 길의 말석에 서 있는 홀더 자작가의 에미린 드 홀더라고 합니다. 대마법사님이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 박사는 문 대위가 원망스러웠다. 대마법사라니.
“4서클 마법사이기도 하답니다. 숲에서 연구하시는 ‘대’마법사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해서 모시고 왔습니다.”
“끄응.”
김 박사는 문 대위를 향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미린을 데리고 오기 전에 문 대위는 그간의 사정과 에미린에게 들은 거대한 마나의 유동 이야기를 자신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그 마나의 유동이 일행이 지구로 돌아 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전 닥터 김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런 인사를 받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어서 일어나세요.”
팔자에도 없는 대마법사 역할을 하게 된 김 박사는 에미린을 일으켰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문 대위는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아리송한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