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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13화)
2. 접촉(6)


일행들은 유로핀 대륙에 온 뒤로 처음으로 잔치를 벌였다.
차린 음식은 별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하츠 마을에서 조달해 온 맥주와 빵, 향신료와 소금을 뿌려 구운 사슴 고기, 김준성 중사가 잡아 온 신선한 물고기 구이를 먹고 마시는 일행은 그동안 유로핀 대륙에서의 노고를 서로에게 치하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어느 정도 먹고 마시고 나자 문 대위는 앞으로 나섰다.
“계획했던 대로 저희 일행이 하츠 마을로 이주할 시기가 됐습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모두의 노력 덕분에 순조롭게 유로핀 대륙에 정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이제 본격적으로 이 세상에 나아가려 합니다.”
문 대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의 눈초리에서 가벼운 긴장감을 느꼈다. 불안 할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이곳 세상의 사람이 아닌 일행은 지금처럼 살 수는 없었다. 지금 일행의 생활 수준은 아마도 조선시대 산골의 생활과 비슷한 정도일 것이 분명했다.
더불어 서로 표현은 안 하고 있지만 일행의 성비도 문제가 됐다. 혈기 왕성한 장정 10명에 여성 한 명,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결론은 하나였다.
“겨울에 의논해서 결정한 대로 저희는 이제 세상을 향해 나아가려 합니다. 이미 대충 계획을 알고 계시리라 믿지만, 정확한 계획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저희 중 일부 인원은 오크 마을을 근거지로 삼을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하츠 마을로 갈 겁니다. 그리고 하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겁니다.”
문무혁 대위는 앞에 놓인 맥주가 담긴 나무잔을 들었다. 목이 타 왔다.
“물론 지속적으로 인원을 교대할 겁니다. 그러니 먼저 남는다고 해서 불만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럼 먼저 남으실 분은…….”
전 일행의 눈이 문 대위에게 쏠렸다.
“김 박사님과 민 간호사님. 그리고 김 중사, 정 상병 이렇게 4명이 먼저 남습니다. 김 박사님과 민 간호사님에게는 미리 이유를 말씀드렸으니 넘어가고, 저와 김 중사 둘 중에 한 명은 아무래도 이곳을 지켜야 될 듯싶습니다. 먼저 김 중사님이 수고 좀 해 주세요.”
김준성 중사는 고개를 끄덕거려 동의를 표했다.
마을로 나아가더라도 이곳에 있는 무기와 장비들은 누군가 책임지고 지켜야 했기에 당연한 이야기였다.
“정 상병은 우리들 중 유일하게 동굴에 있는 기계들을 다룰 줄 압니다. 그래서 이곳에 남아 하츠 마을에서 우리가 필요한 물건들을 제작해 주었으면 합니다. 하츠 마을에 가면 하다못해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맥주를 담을 잔조차도 귀한 물건입니다. 솔직히 하츠 마을이 화전민 촌이라서 그다지 이곳보다 나을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정 상병에게 부탁을 하기로 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맥주만 안 떨어지게 조달해 주시면 됩니다. 하하!”
정 상병이 사람 좋은 웃음을 띠며 흔쾌히 동의를 했다.
“그럼 대충 이렇게 정하는 걸로 하고 건배를 합시다.”
문 대위는 앞에 놓인 맥주잔을 들었다.
문 대위의 말이 마무리될 무렵, 말없이 문 대위의 말을 듣고 있던 박재훈 병장이 손을 들었다.
“대위님. 할 말이 있습니다.”
“박 병장. 그래 할 말 있으면 해.”
박재훈 병장은 문 대위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자신에게 주목하고 있는 일행을 둘러보았다.
눈에 끼고 있던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린 박 병장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싶더니 무언가 결심을 했는지 말을 이어 나갔다.
“다름이 아니라 이제 저희 일행의 관계를 한 번쯤 되짚어야 할 시기가 된 것 같아서요.”
그 뒤로 이어진 박 병장의 말은 일행을 충격과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사실 일행들 모두 조금씩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박 병장이 밖으로 꺼낸 것이다.
“저는 우리 일행의 위치를 재정립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문 대위님께서 저희 일행을 잘 이끌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만, 앞으로는 조금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저희들의 관계 말입니다. 현실을 한 번 보죠. 이곳은 지구가 아닙니다. 한국은 더더욱 아니지요. 그럼 저희의 신분은 군인입니까? 국방부는 어디 있지요? 실제로 저는 이미 한 달 전에 전역했을 몸입니다.”
열변을 토하는 박재훈 병장을 바라보는 일행의 마음속에는 긍정과 의아함이 교차했다.
분명 박재훈 병장의 말이 맞았다. 박 병장은 지구에 있었다면 분명 민간인 신분이었다. 그리고 일반병인 분대원들도 분명 전역을 할 시기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아무리 군대에서 고참 또는 졸병이라고 하더라도 그 관계가 사회까지 이루어지라는 법은 없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박 병장이 제대 이후에 문무혁 대위에게 ‘아저씨’ 또는 ‘어이∼’ 하고 불러도 나무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그들이 속해 있는 대한민국 해군 해병대라는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분명 박 병장의 말은 확실히 옳았다.
하지만 박 병장의 말을 듣는 일행이 긍정과 함께 의아함을 느낀 것은 다름 아니라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박재훈 병장이기 때문이었다.
박재훈 병장은 분대원 중 가장 키도 작고,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솔선수범하고 합리적인 행동으로 문무혁 대위 이하 분대원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반농담으로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그가 가진 분대 내에서 존재감은 대단했다.
그래서 그가 이런 분란을 일으키리라고는 일행은 상상할 수 없었다.
박재훈 병장은 일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여러분께 묻습니다. 문 대위님께서 저희의 지도자가 될 당위성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문 대위님이 지금까지 잘못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확실히 해 두고 싶습니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음을 뿌린 듯 싸늘해졌다.
박재훈 병장은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병장이고 병 중 선임이지만 저희 분대원들에게 지금은 어떤 명분으로 명령을 내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후임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리는 분명 대한민국에서 부여한 계급에 있겠지요.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솔직히 저희가 지금 당장은 몰라도 앞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이런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박 병장의 말을 듣고 있는 김준성 중사가 들고 있던 맥주잔을 탁자에 내려쳤다.
“야! 박 병장, 너 인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연히 우리 대장은 문 대위님이지. 문 대위님 말고 누가 대장을 하겠어?”
씩씩거리던 김 중사는 덧붙였다.
“좆까지 말라고 해.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인 겨. 지랄 옆차기하는 소리하지 마!”
김 중사의 위압적인 소리에도 박 병장은 한 점 흔들림이 없었다.
“분명 김 중사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저는 이러든 저러든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이준혁 상병을 한 번 볼까요? 이대로 언제까지 분대 막내만 해야 됩니까?”
“전 괜찮은데…….”
불똥이 자신에게 튀자 이준혁 상병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도 말했다.
“저도 박 병장님 말에 찬성입니다.”
조진 병장이었다. 가진 바 능력도 뛰어나고 후임들에게 잘하는 남자다운 성격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모난 구석이 있어서 알게 모르게 후임들에게 경원시 되는 경우가 많은 사람이었다.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분명 나중 말이 나올 겁니다. 이런 말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김 중사님이 문 대위님보다 나이가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박 병장님보다 두 살이 많지요. 언제까지 이런 관계로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일행은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내무반에는 에미린과 마인즈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6개월을 문 대위 일행과 살아온 마인즈는 일행의 다툼을 그러려니 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지만, 에미린이 보는 일행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표정과 억양으로만 봐도 분명 다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장에게 대드는 부하와 침묵을 지키고 있는 대장의 모습이 에미린에게는 생경함으로 다가왔다. 그런 토론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대마법사의 모습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마인즈. 저들 왜 저래요?”
“신경 쓰실 거 없습니다, 아가씨. 무슨 일이 있거나 무슨 문제를 결정할 때 저렇게들 모두 모여서 토론을 하더군요. 토론할 때는 위아래도 없습니다. 저러다가도 결론이 나면 군말 없이 전부 그 의견에 따르더라고요.”
반년을 일행과 함께 살았고, 더듬더듬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마인즈는 문무혁 대위 일행이 대륙의 보통 사람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의 신기함도 그랬지만, 무언가 만들 때 그들이 내어 놓는 설계도에 표시된 숫자나 방식 같은 것은 도저히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묘한 부분이 있었다.
마인즈는 문 대위와 삼총사가 하츠 마을로 갈 때 오우거 부산물을 옮기는 목적으로 끌고 갔던 손수레를 만들었던 일을 회상했다.
유로핀 대륙에서 손수레라는 것은 실상 사용하기에 매우 귀찮고 불편한 물건에 속했다. 무게 때문이었다.
무거움을 상쇠하기 위해서 가볍게 만들면 내구성이 떨어졌다.
그래서 유로핀 대륙에서는 가까운 거리를 짐을 이동하는 목적으로 바퀴가 한 개 달린 미는 손수레를 사용하고 먼 거리는 말이나 소가 끄는 마차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오우거 부산물을 하츠 마을로 옮기는 문제가 대두됐을 때, 문무혁 대위 일행은 이구동성으로 ‘리어카’라는 말을 외쳤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정 상병이 가져온 리어카의 설계도에 마인즈는 탄복했다. 그 정교함과 정확한 수치라니.
더불어 설계도를 그린 종이와 펜의 품질까지 마인즈를 놀라게 하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엄청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군인으로서의 능력도 엄청나지만, 의외로 군인보다는 현자님 같은 모습들을 더 많이 보이지요. 아는 바 지식이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문 대위와 김 중사가 단단히 주의를 줘서인지, 마인즈는 에미린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미린은 마인즈의 말만으로도 그가 저들을 얼마나 경외하고 존경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느덧 일행의 토론이 끝나 가고 있었다.
앞으로 3년의 시간을 두고, 지금의 조직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조직을 부수고 민주주의 방식으로 새로운 지도자와 임무를 택할 것인가 투표를 하기로 결정됐다.
전 일행이 참가해서 비밀로 이루어진 투표는 찬성 9, 기권 1, 반대 1의 압도적인 결과로 현 조직 체계를 유지하기로 가결되었다.
조진 병장은 토론에서 박 병장의 편을 든 것을 후회했다.
자신의 마음속을 드러내 보인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조금 더 참아야 했다.
하지만 다음 기회는 분명 또 있을 터였다.
유로핀 대륙이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일행 중에서 자신을 따를 사람은 없다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지금은 납작 엎드려서 대세를 따르는 것이 좋았다.
아마도 기권표는 문 대위의 성격상 그의 표일 가능성이 높았다.
의문이 드는 점은 왜 박 병장이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서 찬성표를 던졌냐 하는 것이었다. 박 병장이 무슨 꿍꿍이로 찬성표를 던졌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표에 대한 의심이 자신에게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도 박 병장이었고, 가장 반론을 심하게 제기한 이도 박 병장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반대표를 던진 사실을 일행이 알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것이다.

“박 병장. 수고했다.”
김준성 중사는 투표가 끝난 후 내무반으로 쓰이는 오두막을 벗어나 조금 한적한 곳에서 박재훈 병장을 만났다.
“이거 한 대 피워라. 마지막 보물이다.”
김 중사는 가슴 주머니에서 비닐로 꽁꽁 싸서 아껴 두었던 담배 두 개피를 꺼내 한 개피를 박 병장에게 내밀었다.
“오늘 일은 박 병장 너와 나만의 비밀이다. 알고 있지?”
“그럼요. 김 중사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지도자의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된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우리들 중 지도자로서의 적임자는 문 대위님뿐이야. 지금이라도 한 번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이런저런 불만이 터져 나올 테고, 그렇게 되면 문 대위님의 권위가 서지 않아. 더군다나 누가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별말씀을요. 김 중사님이 그렇게 신경 쓰고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휴∼”
김 중사와 박 병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떠올라 있는 두 개의 달을 보면서 보물을 만지듯이 담배를 피웠다.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핑 도내요. 하하!”
“그래 난 이 날아가는 연기처럼 지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이곳에서 잘 먹고 잘살면 되지 뭐. 사실 우리 한국으로 돌아가도 뭐 뾰쪽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잖냐.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곳에서 잘만 하면 왕후장상 못지않게 살 수 있겠더라고.”
“그 말씀도 맞네요.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 괜찮아! 난 주제가 안 돼. 아는 것이라고는 사람 잘 죽이는 법뿐이니.”
그랬다. 오늘 일은 김준성 중사가 박 병장을 시켜서 일어난 일이었다. 김준성 중사는 이대로 일행의 관계가 유지되리라 믿지 않았다.
주군과 기사의 관계도 아니고, 21세기를 살다 온 그들에게 명분이 없는 권위는 탄압으로 느껴지기 충분했다.
그래서 박재훈 병장을 시켜서 문제가 안으로 곪아 가기 전에 터트리도록 한 것이다.
“마을로 나가면 조 병장 잘 지켜봐라. 요즘 꿍한 것이 뭔가 저지를 것 같더라.”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조 병장도 그렇게 생각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 니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