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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14화)
2. 접촉(7)


같은 시간 문무혁 대위는 김성한 박사와 민유라 간호사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힘드네요.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아닙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박 병장이 잘한 일입니다. 확실하게 상하 관계가 정해지지 않으면 앞으로 저희가 살아가는데 애로점이 많을 겁니다. 한 번쯤은 털고 가는 것도 좋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문무혁 대위는 군인들의 장이었다. 군무에 관한 일이라면 김준성 중사와 상의할 수 있었지만 일행 전체의 일을 결정할 때는 아무래도 김성한 박사가 편했다. 아마도 군인으로서 장교로서 자신의 나약한 점을 부하들에게 보이는 것이 힘들었을 터였다.
어찌 됐든 투표가 끝나고 나서 문 대위의 지휘권은 공고해졌다.
그가 가장 먼저 시행한 일은 민간인인 김성한 박사와 민유라 간호사, 피성기 선교사를 군문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부탁으로 이루어지던 일들이 정확한 명령하에 이루어지게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 조치로 인해서 지금껏 위치가 모호했던 민간인들의 위치가 확정되었다.
김성한 박사와 민유라 간호사는 군의가 되어서 의료를 맡기로 했고 피성기 선교사는 군무원의 신분이 되어 행정과 기타 제반 사항을 맡는 걸로 결론이 났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이 마을에 박사님과 민 간호사가 남는 이유는 에미린이란 귀족 아가씨 때문입니다. 그 아가씨에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이끌어내 주십시오. 유로핀 대륙의 정세, 사회 구조, 정치 구조, 무엇이든 좋습니다. 물론 마법에 대한 것도 중요하겠지요. 조금씩 저희가 기반을 잡으려면, 저 아가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물론이지요. 저희가 거대한 마법의 유동에 의해서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이 확실해진 이상 분명 돌아갈 방법도 있을 겁니다. 최선을 다할 테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김성한 박사는 문무혁 대위의 당부가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맡은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 임무인지 모를 김 박사가 아니었다.
“두 분께 드린 권총, 절대 품에서 떼시면 안 됩니다. 항상 명심하십시오.”
문 대위는 자신과 김준성 중사가 가지고 있던 분대에 2자루뿐인 K5 권총을 김 박사와 민 간호사에게 주었다. 지금 문 대위가 다시 다짐하는 말은 누구든 위협이 되면 사살하라는 말과 같았다.
김성한 박사와 민유라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도 문 대위가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문 대위의 말이 가지는 의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인즈 문제는 어떻게 하실 건지요?”
일행들에게 포로 아닌 포로로 잡혀 있는 마인즈의 문제를 자리를 함께하고 있던 민유라가 물었다.
“저도 처리 문제를 고심했는데 다행히 여기 남겠답니다. 어차피 딸린 식구도 없다고 하더군요. 천생 그 양반도 장인인지 정진영 상병이 공구들을 다루는 것을 보더니 눈이 뒤집혔나 봅니다.”
“다행이네요.”
“네, 다행입니다.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으면 정보 누수가 심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강제로 잡아 두는 것도 아무래도 저희 정서에는 맞지 않지요. 다행이 여러 분대원들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니 한시름 놨습니다.”
민유라의 질문에 대답을 마친 문무혁 대위는 자세를 바로하고 김성한 박사와 민유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제 생존이 아닌, 발전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앞길에 어떤 일이 벌어지려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제가 우리 일행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겠다는 것뿐입니다. 김 박사님과 민 간호사님이 많이 도와주십시오.”
면도를 제대로 하지 못해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문무혁 대위의 얼굴에는 강한 신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네. 걱정 마십시오.”
“네.”
그날 밤은 웬일인지 오크 마을에 군데군데 한두 명씩 옹기종기 모여앉아 두 개의 달이 뜬 밤하늘을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저마다의 상념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3. 첫 번째 충돌(1)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에서 가장 큰 상회를 운영 중인 상인 부르터는 책상에 놓여 있던 문진을 집어 던졌다.
“무슨 잡소리야! 로펜 그놈이 그런 엄청난 거래를 성사시켰는데, 너란 놈은 기껏 한다는 소리가 잘 모르겠습니다야?”
부르터의 질책을 받고 있는 부르터 상회의 제일 집사 루카스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3개월 전에 일어났다.
부르터가 항상 장돌뱅이라고 놀리는 로펜이란 상인이 상행에서 와이번의 부산물을 가지고 돌아온 것이다.
그것을 뷔르츠 백작령 수석 마법사에게 거금 300골드에 팔았다는 이야기가 레겐스부르크 전역에 퍼졌는데, 부르터를 더욱 미치게 하는 것은 거금 300골드짜리 와이번을 로펜이라는 놈은 단돈 100골드에 샀다는 소문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100골드에 와이번을 사 왔는지 알아보라고 했더니 뭐? 몰라? 그러고도 입에 밥이 넘어가?”
부르터의 짜증은 계속되었다. 말이 200골드의 이문이지 그 정도면, 레겐스부르크 제일상회인 부르터 상회의 반년치 순이익에 육박하는 금액이었다.
“그 쥐새끼 같은 놈이 어떤 수를 부렸는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내. 못 알아내면 알아서 해!”
루카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부르터의 방에서 나왔다. 로펜이 어찌나 단단히 일꾼들에게 입막음을 시켰는지 부르터가 원하는 정보를 도무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와이번뿐만이 아니라 그 많은 오크와 고블린의 이빨들이라니, 드래곤의 레어라도 턴 것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까지 드는 루카스였다.
루카스는 별 수 없이 무력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별 볼 일 없는 중소 상인에 지나지 않은 로펜에게 자신의 주인이 왜 저렇게 신경을 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주인의 히스테리를 혼자 몸으로 받기에는 자신이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다.
부르터는 사람 좋게 생기고, 뚱뚱한 외모와는 다르게 상당히 소심하고, 집요한 남자였다. 그는 작년 겨울 레겐스부르크 남작령 상인 길드 연말 만찬에서 로펜이란 놈이 한 말을 지금껏 잊지 않고 있었다.
그날 로펜은 자기 자랑에 여념이 없는 부르터에게 아버지의 명성을 갉아먹고 사는 돼지 같은 놈이라고 놀렸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로펜의 말은 사실이었다. 빈민을 구제하는 등 영지민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던 선친과는 다르게 부르터는 자신의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무리한 사업을 벌여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상인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다수 그러하듯이 부르터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였고, 나머지 상인의 불만을 가지지 못한 자의 투정으로 생각했다.
더군다나, 남작령 제일의 부를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불만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는 멍청한 상인은 없을 터였다.
로펜이란 놈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부르터는 만찬이 열렸던 그날 밤의 치욕을 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날 밤 로펜을 어떻게든 몰락시켜 자신의 발치에 무릎 꿇리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이미 몇 가지 수를 써서 로펜의 주력 품목인 가죽과 약초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로펜은 부르터의 그런 행동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남작령 상인 길드 역사상 기록적인 거래를 성사시킨 것이다.
루카스는 부르터 상회의 일꾼 몇 명을 동원해서, 로펜이 상행을 떠났을 때 동행했던 일꾼 한 명을 납치했다.
약간의 금품과 폭력이 동반된 루카스와 로펜의 일꾼과의 대화는 루카스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는 바로 주인에게 달려가 알아낸 정보를 알렸다.
보통 소식이 아니었다. 와이번 가죽에 구멍을 숭숭 뚫는 마법 무구로 무장한 마법사의 가디언 이야기는 돈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이야기였다.
루카스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부르터는 광분했다. 마법사의 가디언이라니, 마법 무구라니.
더군다나, 로펜 상회는 지금도 꾸준하게 마법사의 가디언 무리와 거래를 지속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부르터는 눈이 뒤집혔다.
“그러니까 어둠의 숲에서 연구를 하는 마법사가 있고, 그 마법사를 호위하는 가디언들이 있는데 그들이 그 뭐라더라? 무슨 마을에.”
“하츠 마을이랍니다.”
“그래 하츠 마을에 살고 있고 마법 무구로 무장하고 있고, 엄청난 양의 몬스터를 잡는다는 말이렷다?”
“맞습니다. 확실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부르터는 루카스의 보고를 다 듣고 나자 그의 비대한 몸을 의자 깊숙이 파묻고는 깊은 생각에 빠져 들었다.
단순히 로펜을 처리하는 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돈이 보였다.
이일만 잘 처리되면, 수도에서 살고자 하는 그의 야심이 충족될 수 있으리라 생각됐다.
“그 일꾼 잘 잡아 두었지?”
“그러믄요. 상회 창고에 잘 가둬 두었습니다.”
“그럼 그놈 잘 치료해 줘라. 그리고 돈도 얼마쯤 쥐어 주고. 그놈이 우리를 금덩어리가 땅바닥에 널려 있는 곳으로 안내해 줄 보물이다.”
부르터는 로펜을 처리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하지만 그가 루카스를 통해서 들은 정보로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용병 무력으로 마법사의 가디언들을 처리하는 것은 버겁게 느껴졌다.

10여 년 전부터 병에 시달리다가, 몇 년 전부터는 병이 깊어져서 영지 경영의 일선에서 물러나다시피 한 레겐스 남작 대신에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군터 레겐스와 부르터는 교분이 있었다.
병석에 누워 있는 레겐스 남작과는 다르게 군터 레겐스는 여자를 밝히기로 유명한 난봉꾼이었다. 그것만이라면, 왕국의 대다수 귀족들이 그러하므로 별다른 이야기거리가 되지 않았지만 군터는 여자와 더불어 도박에도 푹 빠져 있었다. 그는 틈만 나면, 뷔르츠 백작령으로 가서 주변 영지의 공자들과 백작령의 부호들과 도박을 즐겼다.
문제는 군터 레겐스가 비록 남작령의 대공자라고 하지만, 그의 신분이 도박의 승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더불어 더욱 심각한 문제는 레겐스부르크 영지 자체가 부유한 영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뷔르츠 백작령의 지배를 받는 영지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영지였고, 그에 비해 군터의 허영심은 하늘을 찌른다는데 있었다.
군터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돈을 도박판에 쏟아부었다. 그것도 모자라 레겐스 남작이 병석에 누워 있는 것을 틈 타서, 영지의 세금을 빼돌려 도박판에서 탕진했다.
물론 영지 제일상인인 부르터에게도 상당한 금액의 돈을 빚지고 있는 중이었다. 부르터는 레겐스 남작이 죽기만하면, 군터가 남작위에 오를 것을 알고 있었다.
부르터는 멍청한 그를 잘 조정하면, 최소한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에서는 자신의 위치를 넘볼 인간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꾸준하게 군터를 후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신도 왕국의 수도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의 실권자인 군터 레겐스를 찾아갔다.
이제 지금껏 먹인 뇌물이 효과를 발휘할 때가 온 것이다.
자신의 설명을 들으면 탐욕에 눈먼 멍청한 군터는 분명 군사를 동원할 것이 분명했다.
그때 자신은 이익을 챙기면 되는 것이다. 물론 로펜을 해치우는 것은 덤이었다.

로펜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영문도 모르고 영주성의 병사들에게 잡혀 와 영주성 앞마당에 무릎을 꿇리어졌다.
점심식사를 하다가 아무런 이유도 듣지 못하고, 잡혀 온 그는 단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군터 레겐스 옆에서 히죽히죽 웃으며 서 있는 뚱보 부르터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사태를 파악했다.
‘저 빌어먹을 돼지 녀석이, 앙심을 품었구나. 어제 일꾼 한 명이 사라졌다고 하더니, 분명 저놈이 저지른 일이겠구나.’
로펜은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맹렬하게 머리를 돌렸다.
“네가 로펜이라는 상인인가?”
그래도 명색이 남작령의 대공자라는 신분에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군터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로펜에게 질문을 던졌다.
로펜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는 정중하게 군터의 질문에 대답을 했다.
“네, 공자님. 영주님의 보호와 은총으로 로펜 상회를 경영하고 있는 로펜이라는 백성이 바로 저입니다.”
“그래. 그럼 네가 왜 여기 있는지는 알고 있는가?”
군터는 로펜의 대답에 짜증이 났다.
자신이 권위를 보이고 있는데, 저 왜소한 체구의 상인 나부랭이는 고개를 땅에 처박지도 않고, 당당하게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공자님께서 왜 부르셨는지, 미천한 상인인 저로서는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이놈! 네놈이 저지른 불법을 모른다는 것인가?”
군터는 먼저 와이번을 팔면서 이윤이 생겼는데 왜 세금을 내지 않는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이미 와이번과 마법 무구에 대해서 부르터에게 들은 군터는 이번 일을 자신이 지고 있는 빚을 털어 버리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빚을 갚는 정도가 아니라 가난한 영지의 공자라고 무시하는 백작령의 도박판 동료들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찬스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겼다.
영지 법에 대해서 알 리도 없고, 관심도 없는 그가 간과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자는 일 년에 한 번 상회에 부과되는 세금을 납부하면 그 일 년 동안은 어떠한 세금도 부과되지 않는다는 법조항이 바로 그것이었다.
군터의 옆에서 취조를 듣고 있는 부르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삽질이라니. 멍청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영지민이 아닌 화전민들은 범법자이다. 그들과 불법 거래한 것을 문제 삼아야 하는데, 군터가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옆에서 군터의 취조를 듣고 있던 부르터에게 그 사실을 들은 군터는 얼굴이 벌게져서 씩씩댔다.
영주대리로서 자신의 권위가 손상된 것이다. 그는 편협한 인간들이 대다수 그러하듯이 권위 손상의 원인을 로펜에게서 찾았다.
군터는 화전민과의 거래를 추궁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일단 자신의 명예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인 귀족법 조항을 들어서, 로펜을 귀족 모독죄로 감옥에 처넣었다.
물론 감옥에 처넣어 놓고선 차근차근 돈을 뺏어 내겠다는 계획은 변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