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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15화)
3. 첫 번째 충돌(2)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이 있는 프랑켄 왕국에는 크게 3가지의 법이 존재했다. 먼저 왕국법이 있었고, 귀족 간의 역할과 관계 그리고 귀족 이외의 평민과의 관계를 규정한 귀족법, 마지막으로 개개의 영지마다 있는 영지법이 그것이었다.
법은 상당히 잘 지켜지는 편에 속했다.
물론 귀족의 권위를 대변하는 귀족법에 있어서는 그 한계가 불명확했다.
예를 들어 귀족이 길을 가다가 평민의 목을 베어 버리면, 그 평민이 자신의 영지민이 아니면 평민의 가치에 상당하는 금전을 죽은 평민의 주인인 영주에게 보상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보상을 받은 영주는 받은 금액 중 얼마 정도를 죽은 평민의 가족에게 줄 수도 안 줄 수도 있었다.
귀족의 칼에 죽은 사람이 그 귀족 자신의 영지민이라면 죽은 평민의 가족은 전적으로 살인자의 자비심에 기대는 방법 이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의외로 귀족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경우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귀족들의 자비심이나 도덕심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었다.
바로 귀족이 하찮은 평민을 베어 그 칼을 더럽히면 안 된다는 알량한 기사도에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군터는 곧 영지의 모든 기사들을 소집했다.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에는 총38명의 가신이 존재했는데, 무력의 상징인 기사는 8명이었다.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의 기사는 얼마 전까지는 7명이었다.
원래는 8명이었다. 하지만 2년 전에 한 기사가 남작령 공방의 수석 목수를 데리고 영지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는 스틸폴 나무를 구하러 어둠의 숲에 갔다가 실종되어 7명이 됐다가, 얼마 전 한 명의 기사를 다시 서임해서 여덟 명이 된 것이다.
“공자님의 말씀은 저희 영지와 어둠의 숲 사이에 화전민 부락이 많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드보아 경. 경의 말이 맞소.”
영지 수석 기사인 드보아 헨켈의 물음에 군터는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소드 익스퍼드 중급에 영지 최강의 기사인 그는 군터의 아버지인 레겐스 남작의 충복이자 검이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을 받아내기에는 군터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다.
“그래서 기사들과 영지군으로 그들을 토벌하시겠다는 말씀이시고요?”
“그렇소. 무슨 문제가 있소?”
드보아는 군터라는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레겐스 남작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라고는 하지만, 대를 이어서 자신의 충성을 받기에는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군터는 너무도 부족한 점이 많았다.
“군사를 움직이려면 남작님의 허가가 있어야 합니다. 허가는 받으셨는지요?”
드보아는 따지듯 물었다.
“경도 알다시피 부친은 몸이 매우 쇠약하시네. 지금도 날마다 대지의 여신님의 신관에게 치료를 받고 계시지. 영지민에게 한없이 자애하신 부친은, 부친의 따뜻한 품을 벗어나 살고 있는 도망자의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시면 충격이 크실 터이네. 병환이 깊어질 수도 있겠지. 아마도 경도 그런 상황을 원하지는 않으시리라 믿네.”
군터는 미리 준비해 놓은 답을 천연덕스럽게 내놓았다.
누가 뭐래도 저 우직한 중년의 기사는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누구보다 충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군터였다.
“크음.”
드보아로서는 군터의 속셈이 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절대로 군터라는 남자는 도망친 화전민 정도로 그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일 남자가 아니었다.
그런 시간이 있다면 도박판에서 주사위라도 한 번 더 굴릴 위인이었다.
“말이 화전민들이지, 그들은 분명 대다수가 본시 우리 영지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그들이 도망쳐서 화전민이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영주이신 남작님의 영광에 상처가 될 것입니다.”
군터의 심복인 레인 헐트가 나섰다.
“공자님께서 다른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영주님을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시니 기사된 도리로써 따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남작님도 병중에 계시고, 군터 공자님께서 영지를 비우시면 드보아 경께서라도 자리를 지키셔야 되니 제가 가겠습니다.”
드보아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끔찍히도 싫어하는 레인의 말이었지만, 딱히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 혼자도 충분하겠지만, 이자르 경도 이제 기사가 되었으니 경험도 쌓을 겸 함께 갔으면 합니다. 물론 드보아 경이 허락을 하신다면 말입니다.”
드보아는 답답했다. 저렇게까지 나오면 끝까지 반대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자신의 자식까지 위해 주며 끌어들이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이자르 헨켈은 답답한 아버지의 속도 모르고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기사 서임을 받은 지 갓 1년이 되지 않은 햇병아리 기사인 이자르는 어둠의 숲이라는 단어에서 묘한 설렘을 느꼈다.
대륙 4대 금지의 한 곳이라는 어둠의 숲이 청년 기사에게 주는 의미는 대단했다.
아버지인 드보아 헨켈과 레인 경의 사이가 얼마나 안 좋은지 잘 알고 있는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경험을 쌓게 해 주고 싶다는 레인 경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합시다.”
드보아는 승낙을 하고 말았다.
드보아 경의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군터는 뷔르츠 백작령에서 20명의 용병을 고용했다.
토벌군은 기사 2명에 용병 20명, 경기병 10명, 영지병 100명의 규모로 단순한 화전민 토벌군으로서는 분에 넘칠 만큼 많은 숫자였다.
사실 군터는 화전민 나부랭이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 줄 와이번을 잡는다는 마법 무구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부르터의 정보에 의하면 마법 무구를 가진 가디언이라는 자들은 숫자가 서너 명을 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정도에 불과한 숫자라면 아무리 마법 무구를 가진 무리라도 자신이 이끌고 가는 규모의 토벌군이라면 부족하지 않으리라 믿었다.
부르터의 대폭적인 지원으로 식량까지 준비가 되자, 군터는 이미 마법 무구를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이미 머릿속에 도박 빚 따위의 생각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뷔르츠 백작령의 도박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벌써 마법 무구를 판 엄청난 돈으로 수도의 사교계에 혜성처럼 등장해서 아리따운 귀족 레이디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부르터도 토벌군이 먹고 마실 식량을 준비하면서 용병 30명을 고용했다.
자신의 떡을 지키는데 무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부르터의 생각이었다.
물론 떡은 마법 무구였다. 와이번을 잡는 마법 무구는 떡 중에서도 엄청난 고가의 떡일 터였다.
군터와 부르터의 꿈은 원정일이 다가올수록 커져만 갔다.
두 사람의 꿈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지는 두고 볼일이었다.
* * *
브렌튼은 40 평생을 살아오면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프랑켄 왕국에서도 변방 중에 변방인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의 조그마한 산골 마을 태생인 그는 남작의 사냥터를 관리하는 산지기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그가 유년기를 벗어나던 시절부터 한 가지 꿈을 꾸게 되었다.
사냥을 하러 온 남작과 그를 뒤따르는 기사들이 무리 지어 말을 달리는 멋진 모습 보며 자란 브렌튼에게 기사라는 사람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브렌튼은 사냥이 끝나고 사냥감을 굽는 모닥불을 조명 삼아 벌이는 기사들의 대련 모습을 가장 좋아했다. 어둠을 가르는 기사들의 검에는 하얀색의 오라가 빛나고 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어린 브렌튼은 자신도 언젠가는 기사가 되고 말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의 꿈을 이루어 주기에는 현실은 냉엄했다. 산지기의 아들이 자신이 결코 기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분으로는 기사가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브렌튼은 청소년기를 뒷골목의 왈짜패거리로 지냈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체구를 바탕으로 이미 10대 후반에 레겐스부르크의 뒷골목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는 어느 날 홀연히 레겐스부르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브렌튼이 소드익스퍼드 초급의 검사가 되어 다시 레겐스부르크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였다.
브렌튼은 레겐스부르크를 떠나서 용병으로 생활했다. 수없이 많은 죽음을 보았고 그 와중에 운이 좋아 오러를 느낄 수 있었고 약간의 검술도 익힐 수도 있었다. 프랑켄 왕국의 원수 중의 원수인 펜자임 왕국과의 3년전쟁 때는 가슴에 칼을 맞아 생사를 넘나들기도 했다.
수많은 전쟁과 토벌을 경험했던 그는 어느 정도 돈을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와 가끔 어릴 적 친구인 로펜의 상행이나 도우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젠장할! 곱게 침대에서 뒈질 팔자는 아니구먼.”
혼자서 3일 동안 어둠의 숲 인근을 말을 타고 달린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죽으려고 환장한 행동이었다. 보통 같았으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지 않을 행동을 브렌튼이 하고 있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다.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의 불알친구 로펜의 부탁 때문이었다.
브렌튼은 연신 투덜거리면서도 서둘러 말을 몰았다.
감옥에 갇혀 있는 로펜은 자신의 파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군터가 자신을 죽이지 않겠지만 하츠 마을로의 원정이 끝나면 분명 자신을 통으로 삶으려 할 것이 뻔했다.
로펜은 왠지 모르게 가디언들이 군터에게 패배하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몇 번의 상행을 통해 하츠 마을의 엄청난 변화를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몰라보게 깨끗해진 마을과 살이 포동포동 쪄서 뛰어노는 마을 아이들하며 밭을 가득 채우고 자라고 있던 엄청난 성장을 보이는 처음 보는 채소들.
가디언들은 자신들이 얻은 부를 전부 하츠 마을에 쏟아붓고 있었다. 그런 행동은 이 시대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4개월이 지난 지금 하츠 마을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남작령의 중산층을 넘어서고 있었다.
가디언들이 어둠의 숲에서 잡아 오는 엄청난 양의 몬스터 가죽과 짐승 가죽들은 로펜에게 막대한 부를 약속해 주는 증표와도 같았다.
그래서 그는 가디언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싫다는 가디언의 대장을 설득해서 자신이 와이번을 팔고 얻은 이익의 절반을 주었다.
상인의 본능으로 이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 알았던 것이다.
그가 보는 가디언들은 단순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가디언들이 어둠의 숲을 나와서 하츠 마을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의 집을 짓는 것보다 먼저 한 일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카데미의 건설이었다.
로펜은 가디언들이 주문한 밀가루와 잡곡, 맥주와 잡화류를 하츠 마을로 가지고 갔을 때 우연히 보았던 아카데미 개교식에서 가디언 대장이 어린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그 누가 있어, 한낱 화전민 아이들에게 저런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로펜으로서는 문무혁 대위가 아카데미 개교식에서 할 연설을 연구하다 결국 포기하고 외우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교육헌장의 한 구절을 읊었으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던 로펜은 자신의 생명과 운을 가디언들에게 맡기기로 결심했다.
그는 간수에게 뇌물을 써서 한 통의 편지를 죽마고우인 브렌튼에게 전했다.
브렌튼은 로펜의 편지를 읽고 로펜의 부탁대로 토벌군의 정보를 가디언들에게 전하기로 했다. 브렌튼도 그동안 로펜의 상행을 호위하면서 몇 번 가디언들과 접촉이 있었었다.
처음의 접촉에서 비록 피를 봤지만, 상처에 바르면 거품이 나는 포션 같은 물약과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해 준다는 가루약으로 정성스럽게 상처를 치료해 준 덕분에 자신의 손은 별다른 탈 없이 깨끗하게 나았다.
수많은 전장을 다녔던 브렌튼은 적대했던 적을 치료해 주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었다. 물론 귀족이라면 다르겠지만 자신은 용병이 아니던가? 귀하디귀한 포션과 약으로 치료해 줄 만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