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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16화)
3. 첫 번째 충돌(3)


문무혁 대위는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마치고 아카데미 밖으로 나와 있었다.
하루에 4시간씩 이루어지는 아카데미 수업은 사실 대한민국 기준으로는 유치원 수업정도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었다.
겨우 대륙 공용어인 유로어의 알파벳을 가르치고, 아라비아 숫자로 덧셈 뺄셈을 가르치는 정도의 수업이었다.
“뭐,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
대한민국에서 생활을 하던 분대원들과 일행으로서는 자신들이 살아야 할 처참한 하츠 마을의 현실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대충 집 옆에서 볼일을 보고, 씻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결한 생활을 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을 본 분대원들은 화장실을 파고, 씻는 것을 장려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들은 마을 사람들의 저항으로 다가왔다. 사실 느닷없이 나타난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삶을 간섭하고 나서면 좋아할 사람은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일행들은 로펜으로부터 들어오는 식량을 미끼로 삼아 마을 사람들을 계몽하고, 하츠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무엇이든 선입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머리가 굳은 부모들을 설득하는 것보다는 쉬울 것이라는 극히 편리한 생각이었다.
효과는 극적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이 아카데미에 나오면 지급되는 식료품과 잡화는 처음에는 시큰둥하던 마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아카데미에 보내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아이들이 배워 간 소소한 생활의 지혜들이 실생활에 도움이 되자 어른들도 조금씩 변했다.
문무혁 대위 일행이 하츠 마을에 정착한 지 4개월이 지난 지금에는 요르크를 비롯한 몇 명의 어른들이 송채민 상병에게 밭농사를 배울 정도로 관계가 좋아졌고, 생활 환경의 개선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대장님! 대장님!”
송채민 상병과 마을 밖의 밭에 있던 요르크였다.
마을 사람들은 분대원들을 따라서 문무혁 대위를 대장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대장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다는 요르크의 말에 문 대위는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AK―47 소총을 부여잡았다.
“무슨 일이세요. 그리 급하게?”
몇 번 가디언들이 사용하는 무기의 위력을 본 적이 있는 요르크는 순간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으나 곧 말을 이어 나갔다.
“송채민 상병님이 급한 일이라고 숙소로 오시랍니다. 거 있잖아요. 상인 따라다니는 브렌튼! 그 사람이 누가 쳐들어온다고.”
요르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대위는 일행의 숙소로 지은 통나무집으로 달려갔다.

브렌튼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문무혁 대위는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하츠 마을에는 오크 마을에 살고 있는 김준성 상사와 정진영 상병, 그리고 김성한 박사와 민유라 간호사를 제외한 7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이 전부 모이자 문무혁 대위는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일행들에게 전했다.
“그래서, 여기 브렌튼 님이 달려와 주셨다.”
문무혁 대위는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쓴 브렌튼에게 감사의 목례를 했다.
“적은 기마병이 12명에 보병이 120명 규모라고 한다. 브렌튼 님의 말로는 아마도 3일 정도면 이곳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브렌튼이 문무혁 대위에게 전한 적의 규모는 기사 2명에 용병 20명, 경기병 10명, 영지병 100명의 규모였으나 문 대위 입장에서는 기사와 경기병의 구분은 의미가 없었고, 용병과 영지병의 구분도 무의미했다.
“크게 걱정할 규모는 아니다. 미리 정찰해 놓은 포인트에 매복해서 저지하면 될 것이다.”
문 대위의 말이 이어졌다.
브렌튼은 이해할 수 없었다. 군터가 데리고 오는 토벌군의 규모는 자그마치 132명이었다.
그 숫자에는 보급품을 싣고 따라오는 부르터 상회의 용병과 일꾼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담담히 토벌군의 규모를 설명하는 가디언 대장이라는 사람은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가디언 대장은 대장이니까 부하들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지 않으려 그런다고 이해한다 치더라도 평온하기는 가디언 대장의 말을 듣고 있는 나머지 가디언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브렌튼은 로펜의 부탁을 떠올렸다.
토벌군의 침공 사실과 규모를 알려주면 가디언들은 분명 어둠의 숲으로 철수할 테니, 그때 어둠의 숲으로 따라가서 가디언들의 주인인 마법사에게 자신의 구명을 부탁드리라는 내용이었다.
브렌튼도 로펜의 의견에 동의했다.
아무리 마법 무구로 무장했다고는 하지만, 몇 명의 가디언만으로 토벌군을 무찌르고 로펜을 구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그는 어리석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가디언들은 황당하게도 그들만으로 토벌군과 맞서서 싸우려는 생각들이었다. 말이 되지 않았다.
“기사가 2명입니다. 제가 돕는다고 해도 그중 한 명은 저도 감당할 수 없는 강자입니다. 더군다나 경기병이 10명이면 마을 장정들을 무장시켜서 대치한다고 해도 돌격 한 번에 무너질 겁니다. 가디언님들이 마법 무구를 가지고 계시다고는 하지만, 이 인원으로 저지할 수 있는 숫자는 아닙니다. 농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책을 방어 진지 삼아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농성한다고 해도 한 끼 식사 시간이 지나기 전에 하츠 마을은 불에 타오를 것입니다.”
브렌튼은 답답한 마음에 단숨에 자신의 생각을 내뱉었다.
“바로 마법사님이 계시는 곳으로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브렌튼은 문 대위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따, 문 대위님하고 브렌튼 양반 두 사람이 형제라고 해도 믿겠네. 완전 판박이네 판박이. 하하!”
답답한 브렌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브렌튼의 열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준혁 상병이 농담을 던졌다.
실제로 180cm 정도의 키에 커다란 덩치, 덥수룩이 자란 수염하며 두 사람은 놀랍게도 닮아 있었다.
“정말 그러네요. 두 분 형제 하시죠. 하하하하!”
“하하! 정말 똑같네요. 크크크.”
브렌튼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브렌튼은 울화가 치밀었다.
분명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브렌튼의 말이 당연했다.
하지만 브렌튼은 자신의 눈앞에서 웃고 있는 남자들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긴박하게 시작했던 회의는 의외로 분대원들의 활기찬 웃음 속에 끝났다.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리는 브렌튼만 바보가 된 회의였다.

그날 밤, 문무혁 대위는 아카데미로 브렌튼을 불렀다.
두 사람은 맥주 한 통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았다.
“브렌튼 님,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저희 일행은 진심으로 브렌튼 님과 로펜 님의 호의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다면서 맞서 싸우시겠다니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니 피하셔야죠.”
브렌튼은 문 대위의 정중한 사과에 화를 풀며 다시 문 대위를 설득하려 했다.
“흠, 일단 한잔하시고, 제가 브렌튼 님의 호의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한 가지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문 대위는 맥주통을 들어 맥주를 브렌튼의 잔에 가득 붓고는 자신의 잔에도 부었다.
“마시지요.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이 좋다는 저희 사이의 농담이 있습니다. 하하하.”
문 대위가 브렌튼에게 보여 주려는 것은 그들이 가진 화력의 시범이었다.
로펜과 브렌튼의 속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달려온 브렌튼의 우정이 기껍기도 했고, 그들의 우정이 부럽기도 했다.
첫 만남은 충돌로 시작했지만 그 뒤 보여 준 로펜과 브렌튼의 행동이 맘에 들기도 했다.
문 대위는 두 사람을 동료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이 세상에 나아가려면 그들만으로는 부족했다. 동료가 필요했고 로펜과 브렌튼이라면 자격이 충분하다 여겼다.
“어∼ 좋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브렌튼을 의식하는지 안 하는지 문 대위는 맥주잔을 비웠다. 미지근한 맥주였지만 풍미는 대단했다.
브렌튼도 어쩔 수 없이 맥주잔을 비웠다.
문 대위는 잠시 맥주가 시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는 이루어질 일이었다. 문 대위는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분명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먼저 한 가지 알아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희는 저희가 살자고 하츠 마을 사람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저희가 도망간다면 하츠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 대위는 다시 맥주잔을 채우며 브렌튼을 바라보았다.
“브렌튼 님의 이야기가 틀렸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브렌튼 님과 저희와의 생각이 조금 다를 뿐이지요.”
“그러면 정말 싸우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저희는 싸울 겁니다. 그리고 이기겠지요. 이겨도 보통으로 이기는 것이 아닐 겁니다.”
문 대위는 브렌튼에게 다짐을 받을 시간이 왔음을 알았다.
“나가시죠. 보여드리겠습니다, 저희의 힘을. 단! 이 힘을 보시면 브렌튼 님과 로펜 님이 저희 사람이 되어 주신다는 약속을 먼저 해 주셔야겠습니다. 약속하시겠습니까?”
브렌튼은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들의 정체가 새삼 궁금해졌다.
그다지 관계도 없는 화전민들을 영주가 기사를 보살피는 것보다 더욱 위하는 사람들, 천하디 천한 화전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었다.
브렌튼은 조용히 문 대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까지의 용병 생활에서 자신을 지켜 준 직감에 의지하기로 했다.
눈앞의 남자는 아까의 농담처럼 자신하고 참 흡사한 용모의 남자였다. 굳게 닫힌 입술에는 강한 고집이 들어나 보였고, 선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는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어차피 쏜 화살이었다. 로펜을 살리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길은 없었다.
브렌튼은 앞에 놓은 맥주잔을 들어 죽 비우고는 말했다.
“용병 생활을 정리하고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역시 전 침대에서 죽을 팔자는 아닌가봅니다. 허허.”
브렌튼은 너털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브렌튼의 너털웃음을 미소로 답해 준 문 대위는 브렌튼의 손을 이끌어 아카데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엄청난 폭음이 아카데미 앞 공터를 휩쓸었다.
어둠에 싸였던 하츠 마을이 화광에 붉게 물들었다.
굉음에 놀란 하츠 마을 사람들은 집밖으로 뛰쳐나왔다.
주민들은 아카데미 앞마당에서 연신 터져 나오는 폭음과 화광을 바라보았다. 화전민들은 생전 처음 듣고 보는 엄청난 폭음과 화염이었다.
아마도 오늘 밤은 그들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공포와 충격이 함께하는 밤이 될 것이다.

* * *

채명훈 하사와 이준혁 상병은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채 하사님. 이거 사기 아닙니까?”
“뭐가?”
“우리가 쏜 거 공포탄이잖습니까? 오크 마을 동굴에 있던 공포탄 전부 쓸어 온 거요.”
“인마. 그냥 쇼 좀 했다고 생각해. 쇼가 화려해야 보는 사람이 홀리지.”
“크윽. 브렌튼 그 양반 성질이 보통이 아니던데 나중에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릴 죽이려 들 텐데요.”
“사실 나도 좀 걱정이 된다. 솔직히 일대일로 싸워서 그 양반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냐? 그 양반 건물 한 채는 그냥 뛰어넘더만.”
“에고, 몰라요, 몰라. 문 대위님이 알아서 하시겠죠.”
“그래, 나중에 뽀록 나면 문 대위님 핑계대자. 흐흐. 그리고 솔직히 탄약 절약 때문이 아니면 백퍼센트 거짓말은 아니지. 탄약 아끼려고 공포탄 쓴 거니까.”
“그건 그러네요. 어찌 됐든 쇼 한 번 거하게 했네요. 사실 저도 좀 놀랐습니다. 폭발이 그렇게 클 줄은 예상 밖이었거든요.”
“그래. 크긴 크더라. C―4 아끼려고 사용한 휘발유가 좀 많았나 싶더라. 그건 그렇고 이 상병! 너도 헬가 뒤꽁무니만 따라다니지 말고 오늘은 일찍 자라”
“하사님도… 제가 언제 그랬다고요. 헬가가 저 좋다고 따라다닌 거지. 크크.”
채명훈 하사와 이준혁 하사는 문 대위의 명령을 받고 아카데미 앞 운동장으로 쓰이는 공터 한편에 C―4와 휘발유 몇 갤런을 매설했었다.
소중한 물건이었지만 문 대위는 이번 기회를 빌어 브렌튼뿐만 아니라 하츠 마을 사람들에게도 충격 요법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일행들의 앞날이 좀 더 순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좋든 싫든 자신들의 수족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게 문 대위의 생각이었다. 이기적인 생각이었지만 미안함은 많은 식량과 교육으로 값을 요량이었다.
그래서 AK―47 소총을 공포탄과 예광탄으로 채우고 자동으로 난사를 했고, 타이밍을 맞추어 매설해 놓은 폭탄을 폭발시켰다.
C―4 플라스틱 폭탄과 휘발유의 조합은 문 대위의 예상보다 더 큰 폭발을 일으켰고, 문 대위의 목적은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 훌륭하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