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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17화)
3. 첫 번째 충돌(4)


브렌튼은 아카데미 건물에 짐을 풀고 잠자리를 잡았다.
잠을 자기 위해 누웠으나, 조금 전의 엄청난 광경이 자꾸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프랑켄 왕국과 펜자임 왕국과의 3년전쟁에서 보았던 마법사들의 대단위 마법도 오늘 본 것만큼의 파괴적인 효과를 보여 주지는 못했다.
폭발이 일어나고, 굉음이 사방에 울려 퍼질 때 브렌튼은 자신도 모르게 압도되어 무릎을 꿇고 문무혁 대위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왠지 모르게 어렸을 적의 꿈이 이루어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브렌튼의 어릴 적 꿈은 기사였다.

문 대위는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하던 브렌튼을 생각했다.
효과가 지나쳤나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자신의 분대원들에게도 받아 보지 못한 브렌튼의 진심이 담긴 충성맹세는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이 좋았었다.
문 대위는 설레이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잠을 청했다.

조진 병장은 멀찍이서 아카데미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 한 가득 질투심이 몰려왔다. 자신이 받아야 할 충성 맹세를 문무혁 대위가 뺏어 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조진 병장은 이를 악다물며 자신을 다독였다.

* * *

하츠 마을은 대다수의 화전민 마을이 그렇듯이 방어에 용의한 지형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호리병 구조의 지형에 자리 잡은 마을은 목책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마을 앞으로는 마을 사람들이 개간한 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밭 앞을 어둠의 숲에서 흘러나온 형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마을의 나머지 방향은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마을에서 군터의 토벌군을 맞이하자는 분대원들의 제안을 문무혁 대위는 거절했다.
문 대위는 마을을 진지로 삼고 농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들로 인해서 가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평화롭게 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을 전쟁에 끌어들인다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더군다나 훈련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어젯밤의 불꽃 쇼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편하게 문 대위 일행을 바라보던 시선을 접고, 상당히 경외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 정도로 됐다고 문 대위는 생각했다.
최소한 적을 정면에 앞두고 뒤통수를 맞을 상황은 없을 것이다.
문 대위는 토벌군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본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를 기억하고 있다. 원망과 공포로 뒤섞인 하츠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는 문무혁 대위 일행에 대한 적개심을 담고 있었다.
그는 적개심의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하츠 마을 주민들은 도망자들이었다. 그들이 도망친 이유은 여러 가지였다. 영주의 학정을 피해서 온 사람도 있었고, 빚을 지고 도망친 사람도 있었다. 어디선가 살인을 저지르고 피해 왔을 사람도 있을지 몰랐다.
그런 마을 사람들에게 하츠 마을은 어쩌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자신들을 억압하는 것에 대항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일군 하츠 마을에 대한 애착은 문 대위 일행이 느끼는 그것보다 월등이 간절했다.
비록 문 대위 일행이 식량을 주고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지만, 그들이 가장 바라는 바는 간섭 없는 자유로움일지 몰랐다.
하지만 앞으로 문무혁 대위 일행이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려는 계획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일행의 생존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문 대위로서는 분명 이기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문 대위 일행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귀족들과 같이 양민을 착취한다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가져야 할 식량을 덜어서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내가 굶으며 불쌍한 사람을 돕겠다는 성인 같은 생각은 애당초 문 대위의 뇌리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문무혁 대위는 그간 채명훈 하사가 작성해 놓은 마을 주변 지도를 바라보았다. 종이가 귀해서 거칠게 다듬은 목판으로 만든 상황판에 그려진 지도는 나름 상세했다.
“마지막으로 토벌군이 야영을 할 지형은 이곳이겠군요.”
문 대위는 상황판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하츠 마을에서 도보로 3∼4시간 정도 떨어진 평지였다. 보급대까지 합해서 근 2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야영할 수 있는 장소는 하츠 마을 인근에 그곳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적 지휘관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피곤한 병력을 데리고 야간에 이곳을 치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요. 저희처럼 야시경이 있다면 모르지만 이곳 실정으로 봐서는 아마 절대적으로 야간 작전이 제한될 겁니다.”
토벌군의 침공 소식을 듣고, 급히 오크 마을에서 달려온 김준성 중사가 문 대위의 말에 동의했다.
일행이 하츠 마을에 정착한 후 몇 개월간의 꾸준한 토벌로 인하여 하츠 마을과 오크 마을 사이에 상당한 정도의 안전한 통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두 마을 사이의 연락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동안 일행이 들인 노력은 엄청났다. 통행로 양쪽을 더듬어 가며, 수많은 부비트랩을 설치했고, 몬스터들의 씨를 말렸다.
비록 화약을 아끼기 위해서 돌과 함정 그리고 올가미로 이루어진 부비트랩이었지만 해병대 수색대의 명성에 걸맞은 훈련을 이수한 분대원들에게는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노력으로 이제는 기존에 도보로 하루가 꼬박 걸리던 두 마을 사이의 편도 시간이 말을 달려 겨우 3시간이 채 안 걸릴 정도로 단축되었다.
물론 말 타는 법을 배우기까지 가장 수고한 것은 분대원들의 엉덩이었다.
“그렇지요. 그럼 적들이 야영을 할 것이라 생각되는 곳 바로 앞에서 저지하도록 하겠습니다.”
문 대위는 김 중사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시간은 어떻게 됩니까?”
“아침에 그들이 출발하면 바로 저지할 겁니다.”
“야간에 기습하는 것이 아니고요? 야간에 원거리에서 저격하면, 쉽게 막을 수 있을 텐데 밝은 낮에 저지를 하신다니 달리 생각하시는 바라도 있으십니까?”
“야간에 기습을 하면 쉽게 막아낼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격퇴하고 나서가 문제입니다. 정보로는 남작령의 대공자가 대장이 되어 인솔하고 있다는데 그놈을 죽여도, 안 죽여도 뒤끝이 남을 겁니다. 괜히 그놈이 살아서 도망치면 복수한다고 설치겠지요. 만일 죽인다고 해도 복수가 있을 테고요.”
문 대위의 예상에 의하면 일행이 밤에 공격을 한다면 아마도 토벌군은 자신을 공격한 대상에 대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밤중에 사방에 퍼지는 총성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면 무슨 정신이 있을 것인가?
“그 뒤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한 상인 로펜의 일도 있습니다. 하츠 마을이 지속적으로 물자를 공급받기 위해서는 로펜의 역할이 큽니다. 밝은 대낮에 압도적인 무위로 물리치고 그 남작 아들내미를 잡아서 협박을 해야죠. 안 풀어 주면 넌 죽는다. 언제 어디서라도! 하구요.”
이야기를 들은 김준성 중사는 문무혁 대위의 이야기에 동의했다. 사실 자신들 정도의 무력 수준이라면 200명에 불과한 토벌군은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포항은 어떻습니까?”
포항이라는 지명은 자신들의 근원인 해병대를 생각하며 지은 오크 마을의 새로운 명칭이었다. 오크 마을 앞을 흐르던 강에 포항을 흐르는 형산강의 이름을 딴 것처럼 그들에게는 한없이 정겨운 이름이었다.
이번에도 이준혁 상병은 강력하게 유로어 이름을 추천했으나 시원하게 무시당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에미린은 여전히 김 박사님을 졸졸 따라다니고 있고요. 마인즈 역시 정 상병에게 설계와 장비 다루는 법 배우느라 정신이 없지요. 포항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다행입니다. 잘들 지내신다니.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한 번 가 봐야 되겠네요. 김 박사님과 상의할 일도 있고요.”
문 대위의 발언으로 회의는 끝났다.
이제는 토벌군을 혼쭐 낼 일만 남았다.

문 대위는 하츠 마을에 있던 군인이 아닌 피성기 선교사를 제외한 나머지 분대원과 브렌튼, 요르크, 하츠 마을 촌장을 데리고 토벌군이 야영할 곳으로 예상되는 지형 옆의 나지막한 구릉으로 출발했다.
요르크와 하츠 마을 촌장을 데려가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을 사람들이 간밤의 충격으로 가지게 된 적개심을 일행에 대한 존경심으로 바꾸려는 목적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마법사의 가디언이라고 믿고 있는 자신들의 무력의 수준을 약간의 쇼를 더해서 보여 주면 그가 원하는 목적은 아마도 충분하게 이루어지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문 대위는 토벌군을 전부 죽일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군인이지만 그 많은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적들은 그들 자신이 군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문 대위의 생각은 달랐다.
문무혁 대위는 그들을 사극에 나오는 병졸 엑스트라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도 총이라는 물건을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엑스트라였다.

* * *

군터는 레인 헐트와 이자르 헨켈 두 기사 그리고 보급대로 따라온 부르터와 함께 병사들이 쳐 놓은 군막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영주성의 식사 때와 다름없이 탁자에는 초가 타오르고 있었고, 그의 옆에는 데리고 온 시녀가 식사 시중을 들었다.
야영지는 왁자지껄했다. 병사들은 급히 모닥불을 피우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등 야영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군터는 자신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많은 병사를 이끌고 토벌을 나오니 자신이 마치 전장에 나온 대장군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는 어릴 적 영주성에서 들었던 음유시인들의 영웅담 속에 나오는 장군마냥 병사들을 신경 썼다.
“병사들 저녁 준비는 잘되고 있는지 모르겠구만. 잠자리도 잘 보살펴 주게.”
“과연 대공자님이십니다. 병법의 기본을 알고 계시다니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병사들도 공자님의 자애로우심을 안다면 사기가 충천할 것입니다.”
“역시 군터 공자님은 대단하십니다. 저녁을 잘 먹이고 잘 재워서 기력을 최대로 채운다음 폭도들을 제압할 생각을 하시다니요. 존경합니다.”
부르터와 레인은 군터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아부를 하기 바빴다.
“역시 부르터와 레인 경이네. 내 마음을 그리 잘 알아주다니. 자고로 전쟁의 승패는 병사의 사기로 결정 나는 법이지. 암.”
주거니 받거니 짝이 잘 맞는 세 사람이었다.
이자르는 세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에 먹던 음식이 느물느물 넘어오려 했지만, 딴에는 맞는 말이라 그냥 음식을 꾹 삼키고 말았다.
군터와 두 기사 그리고 부르터는 그들이 데리고 온 요리사가 준비한 정찬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들은 커다란 솥에 잡곡을 넣고 끓인 오트밀과 딱딱한 보리빵이 저녁 식사의 전부였고, 잠자리는 행군을 할 때는 어깨에 망토처럼 두르고 잠잘 때는 깔개와 이불로 사용하는 모포 한 장이 전부라는 현실은 군막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야영 준비로 부산한 토벌군의 모습을 문 대위는 근처 구릉에서 야시경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잘 먹고 잘 놀고 있네요. 생각보다는 규율도 서 있는 것 같고요.”
문 대위 옆에서 역시 야시경으로 토벌군의 야영지를 살펴보던 채명훈 하사가 소감을 이야기 했다.
“그래. 생각보다는 보초까지 세울 줄 알고 영 엉망은 아니군.”
문 대위도 살펴본 소감을 말했다.
“그건 그렇고 위치는 잘 잡아 놓았지? 채 하사, 어깨가 무거워. 까닥 잘못되면 사상자가 너무 많을 거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이는 자리 잡아 놨습니다. 대위님께서 내일 아침에 신호만 잘 보내 주십시오.”
“그래, 이제 그만 자자고. 내일은 긴 하루가 될 거야.”
대화를 마친 문 대위와 채 하사는 구릉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일행에게로 달려갔다.
‘잘 먹고 잘 쉬어라. 쩝, 불쌍하네. 내일 놀랄 일을 생각하니.’
채 하사는 문 대위의 뒤를 따르면서 아직도 분주한 토벌군의 야영지를 흘깃 쳐다보며 혀를 쯧쯧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