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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18화)
3. 첫 번째 충돌(5)


결전의 아침이 밝았다.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친 토벌군은 대형을 갖추고 하츠 마을로 이동을 시작했다.
군터는 자신을 왕국 수도의 사교계에 데뷔시켜 줄 부를 안겨 줄 마법 무구가 오늘이면 손에 들어온다는 생각에 가벼운 흥분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10여 분을 진군했을 무렵 전초를 맡고 있던 경기병 한 기가 행렬 선두에서 움직이고 있던 군터에게 급히 달려왔다.
“행렬을 막아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길을 막고 서서 공자님을 찾습니다.”
보고를 받은 군터는 진군을 멈추고, 말을 몰아 진영의 앞으로 나아갔다.

문 대위는 정면에 나타난 3명의 기사를 보았다.
레더갑옷을 입은 브렌튼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지만, 햇볕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눈부신 은색 풀 플레이트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모습을 처음 본 그는 기사들이 참으로 멋지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문 대위는 행렬 앞으로 나온 군터와 기사들에게 외쳤다.
“나는 대마법사이신 ‘닥터 김’의 가디언 대장이다! 이곳부터는 대마법사이신 닥터 김의 영토이다! 그대들은 누구인데 이곳을 침입하려 하는가?”
군터는 갑자기 나타난 남자의 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비록 영지의 행정력이 미치고 있지는 않지만 왕국법에 의하면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의 영토는 어둠의 숲까지 포함된 영역이었다.
군터가 무언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 레인 헐트가 나섰다.
“무슨 빌어먹을 잡소리냐? 이곳은 영광스러운 프랑켄 왕국의 국왕 드미트리 잉겔스 인하임 3세 폐하께 그 영광을 위임받으신 비요른 드 레겐스 남작님의 영토이다. 어디서 나타난 놈인지는 모르지만, 진실된 너의 정체를 밝혀라.”
길고 긴 레인 헐트의 대꾸가 끝나자마자 문 대위는 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비웃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누가 뭐래도 이곳부터는 이전에도 없으셨고, 이후에도 없을 위대한 대마법사 닥터 김 님의 영토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단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이전에도 없으셨고, 이후에도 없으실 대마법사 닥터 김 님의 마법의 힘을 보게 될 것이다.”
누가 들어도 비꼬는 것이 분명한 문 대위의 빈정거림에 군터와 레인 헐트는 바로 흥분했다.
“저놈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게 금화 10닢을 내리겠다. 누가 나서겠는가?”
군터의 외침이 끝나기도 전에 행렬의 앞에 있던 경기병 중 한 명이 말을 몰아 달려 나갔다.
문 대위는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살며시 손을 들어 손가락 한 개를 폈다.
“채 하사님, 손가락 한 개요.”
“오케이.”
전방 시야가 뚫린 곳에 자리 잡은 채명훈 하사와 이준혁 상병이었다. 망원경으로 문 대위를 바라보고 있던 이준혁 상병은 문 대위의 신호를 채명훈 하사에게 전했다.
“바람도 없고, 총질하기 좋은 날씹니다.”
“헛소리.”
채명훈 하사는 조심히 자신의 MSG―90 저격총 방아쇠를 당겼다.
총신에 부착한 사이렌서 덕분에 발사된 총에서는 미약한 소리만이 났다.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기 위한 문 대위의 생각이었다.
더불어 관통만 하지 않고 말의 머리를 분쇄하기 위해서 탄알에 대검으로 낸 십자 표시의 위력도 대단했다.
“명중입니다. 나이스 샷! 채 하사님.”
채 하사의 MSG―90 저격 소총에서 발사된 7.62mm 탄환에 문 대위에게 달려오던 경기병의 말 머리가 분쇄됐다.
말을 달려 앞으로 나오던 경기병은 말이 쓰러지자 달리던 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문 대위는 그 모습을 인상을 쓰고 바라보고 있다가 다시 손을 들어 손가락 3개를 폈다. 갑자기 쓰러진 경기병의 말을 보고 동요하는 적들의 기를 죽일 타이밍이었다.
군터는 입을 쩍 벌렸다.
자신을 가디언 대장이라고 소개한 사람이 손가락 한 개를 펴자마자 달리던 말의 머리가 터져 나갔다.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으면서 말과 함께 땅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문 대위의 신호를 받은 채 하사가 쏜 총알이 군터가 탄 말의 머리를 박살 낸 것이다.
군터는 운이 좋게 겨우 쓰러지는 말에 깔리는 것을 면했으나, 오러를 다룰 수 없는 그는 풀 플레이트 갑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버둥댔다.
플레이트 갑옷의 무게 때문에 말에서 떨어지면 팔 한 개쯤 부러지는 것은 예사였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다반사였지만, 군터의 운이 좋았는지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급히 말에서 내린 레인과 이자르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몸을 추슬러 일어난 군터는 왜 자신의 말이 죽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공포가 밀려왔다.
그런 순간에도 토벌군 행렬의 앞에 도열해 있던 경기병들의 군마가 계속 쓰러지고 있었다.
토벌군들은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그들이 영지군이라고는 하지만 몇몇 고참병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대인 전투 경험은 전무했고, 겨우 겪는 전투라고는 초겨울이면 산에서 영지 마을로 내려오는 몬스터 토벌 정도였다. 그런 그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눈앞의 남자가 손을 한 번 들 때마다 말 머리가 박살나는 광경은 아무런 소리조차 발생시키지 않아 더욱 기괴하기만 했다.
토벌군은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부르터는 마음 한구석에서 자신의 야망이 깨어져 나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토벌군보다 뒤에서 서서히 대열을 따르던 보급대를 이끌고 있던 그는 마차에 타고 있는 관계로 다른 어떤 사람보다 대열 앞에서 이뤄지고 있는 참상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마법 무기를 얻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레인 헐트는 자신의 무력에 자신이 있었다. 소드 익스퍼드 중급의 실력이라는 것이 놀면서 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참상은 자신의 무력이 얼마나 쓸모없는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터져 나가는 말의 머리는 뇌수를 땅바닥에 흩뿌렸고, 군터를 부축하느라 땅에 내려선 그에게도 튀어 왔다.
레인은 다리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죽음의 신의 낫이 자신의 목에 닿은 듯 목 뒷덜미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문 대위는 자신의 계획이 맞아 들어감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처음의 계획대로 한 사람도 죽이지 않고 끝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라는 것은 적게 흘리면 흘릴수록 좋은 것이다. 내가 흘리는 피가 됐든 남이 흘리던 피가 됐든.
사태는 금방 마무리되는 듯했다.
이미 군터를 비롯한 지휘부는 마비됐고, 영지병들은 뒤돌아서서 도망치지 않는 것이 용할 정도로 전의를 상실했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이자르는 기사였다.
기사의 표본과도 같은 아버지 드보아 헨켈보다 자신이 더욱더 기사답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는 천생 기사였다.
어릴 적 아버지가 휘두르는 검을 보며 기사의 꿈을 꾸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영지를 떠나 대륙을 활보하며 모험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모험을 떠나 파티를 구하고, 그 파티와 함께 곤경에 처한 레이디를 구하는 것을 상상하며 힘든 기사 수련을 견딜 수 있었다.
노력 끝에 소드 익스퍼드에 진입하고 기사 서임을 받을 수 있었으나, 그의 꿈은 시작부터 벽에 부딪쳤다.
서임받은 기사가 수행을 떠나는 것은 영주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병중에 있는 남작에게 승낙을 받기도 전에 아버지의 반대에 직면했다. 병석에 있는 영주를 팽개치고 자신만을 위해서 수련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기사의 도리에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다행히 레인 경의 도움으로 토벌군에 참여하게 된 이자르는 다가올 모험에 목이 말라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말들을 학살하고 있는 악독한 마법사의 존재는 그의 목마름을 충분히 채워 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는 30여 미터 앞에 고고하게 서 있는 악마 같은 마법사의 부하에게 몸을 날렸다.

문 대위는 당황했다. 자신의 실수를 진심으로 자책했다. 자신에게 검을 빼어 들고 달려오는 기사는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오러를 사용하는 기사의 무서움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던 브렌튼의 충고를 듣지 않고 혼자 나선 일이 실수였음을 인정한 그의 다음 행동은 실수를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빨랐다.

“헉! 저놈! 저놈! 쏴요, 쏴! 채 하사님!”
갑자기 튀어나오는 기사를 본 이준혁 상병은 채명훈 하사에게 소리쳤다.
풋! 풋! 풋! 풋!
기사의 엄청난 속도에 채명훈 하사가 쏘는 총탄은 속절없이 빗나가 땅바닥에 박혔다.
문 대위의 양쪽 뒤에는 만일을 대비해서 호를 파고 숨어 있는 나머지 분대원들과 브렌튼이 있었다.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기사를 본 분대원들은 당황했다. 그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서둘러 가지고 있던 총을 들어 올렸다.
브렌튼도 검을 빼 들고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오라를 온몸에 돌리면서 검을 뽑고 몸을 날리던 이자르 헨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황하는 가디언 대장의 모습이 그의 자신감을 더욱더 키워 주었다.
문 대위는 들고 있던 AK―47 소총을 달려오는 기사에게 갈겼다. 30발 들이 탄창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대규모 사상을 염려한 문무혁 대위의 결정은 결국 이자르 헨켈이라는 초보 기사 한 명의 목숨으로 마무리됐다.
모든 무기를 버리고 전날 야영했던 야영지로 토벌군을 후퇴하게 한 문 대위는 군터와 협상을 시작했다.
군마들의 머리가 터져 나가고, 이자르 헨켈이 벌집이 되어 죽는 모습을 본 군터는 순순히 문무혁 대위와의 협상에 응했다.
“공자님께서 저와의 약속만 이행해 주신다면 저도 그에 따른 충분한 답례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무슨 답례입니까? 그냥 죽여 버리시지요. 저놈이 레겐스부르크로 돌아가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압니까?”
“김 중사님. 죽이려고 하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습니다. 사실 저희 주인이신 마법사님이 저 공자를 죽이려고 마음먹으신다면 저자가 아무리 영주성에 꼭꼭 숨어 있어도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지요.”
문무혁 대위와 김준성 중사의 착한 형사, 나쁜 형사 전법에 빠져 허우적대던 군터는 문 대위에게 매달렸다.
“살려만 주시면 말씀하신 대로 로펜을 바로 풀어 주고, 이곳과의 상거래를 허가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세금은 안 받아도 됩니다.”
“무슨 말씀을요. 당연히 세금을 내야죠. 잘만 되면 우리 대마법사님께서 만드신 마법 무구 한 개쯤은 공자님께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어느 정도 상호 간에 신뢰가 쌓인 다음이 되겠지만요.”
군터는 눈이 번쩍 띄었다. 살려 준단다. 무기도 돌려 준다고 했다. 세금도 낸단다. 잘만하면 마법 무구도 한 개 얻을 수 있을 듯싶었다.
토벌이 실패하고 무기도 다 빼앗기는 줄 알았던 그는 영주성으로 돌아가서 들을 가신들의 잔소리가 벌써 귀에 맴도는 중이었다.
내심 고민을 거듭하던 그에게 문 대위의 제안은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군터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 대위가 내민 조인서에 아버지 대신 손에 끼고 있던 영주의 인장을 찍었다.

토벌군은 13마리의 말의 시체를 남기고 되돌아갔다.
가디언들의 신위를 목격한 하츠 마을 촌장과 요르크는 문무혁 대위 일행을 신을 보는 듯 깍듯이 대우했다. 덕분에 앞으로 하츠 마을에서 벌일 일행의 행동들은 수월하게 마을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터였다.
브렌튼은 친구 로펜이 풀려난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그리고 그가 주군으로 모시기로 한 문 대위의 너그러운 처사가 너무 미더웠다.
쉽게 죽일 수도 있는 상대를 죽이지 않았을 뿐더러 무기 한 개 빼앗지 않고 돌려보낸 문무혁 대위의 행동이 얼핏 이해되지 않는 면이 없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주군의 포용력과 자비심을 본 것 같아 기뻤다.
채명훈 하사와 이준혁 상병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말의 시체를 옮겼다. 항상 부족하기 만한 육류가 넉넉하게 장만되는 날이었다. 두 사람은 승리의 잔치가 벌어질 오늘 밤이 간절히 기다려졌다.
모두가 기뻐하는 와중에 기뻐할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문무혁 대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인을 경험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경험했지만 그가 실질적인 전투에 투입된 것은 4개월간의 전투 지역 활동 중 미군과의 합동 작전 단 한 번뿐이었다. 그때마저도 그의 손에 죽은 적군은 없었다. 현대전쟁에서 군인과 군인이 얼굴을 맞대고 총질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인 것이다.
시체를 수습할 때 보니 그가 죽인 기사는 이제 갓 솜털이 가신 애송이었다.
그는 한숨을 깊게 쉬고는 터덜터덜 걸음을 하츠 마을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