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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19화)
4. 정비(1)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은 변경 백인 뷔르츠 백작령의 지배하에 있는 프랑켄 왕국 최북단의 낙후된 영지였다. 영지 면적 자체는 공작령에 비길 만큼 광활했지만 영지 대다수의 면적을 어둠의 숲이 차지하고 있고 그나마 남아 있는 땅도 어둠의 숲과 인접한 지역은 몬스터의 출현이 잦아 사용하기 힘든 땅이었다.
영지민은 겨우 일만 명을 넘는 정도의 숫자였고, 영지에서 나는 특산물이라고는 몬스터나 짐승의 가죽과 죽음을 무릅써야 벌목할 수 있는 스틸폴 나무 정도가 전부였다.
다행히 영주인 레겐스 남작이 선정을 베푸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치를 하는 편은 아니었고, 영지민들이 주로 살고 있는 뷔르츠 백작령 인접 지역의 토지가 비옥한 편이라서 식량의 자급은 문제가 없는 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잘은 못 살아도 겨우겨우 먹고사는 정도의 영지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조용한 영지가 발칵 뒤집어졌다.
한낱 화전민 토벌을 목적으로 출병한 영지군이 창을 거꾸로 잡고 돌아왔고, 영지 기사 중 한 명인 이자르 헨켈이 온몸에 구멍이 뚫린 처참한 몰골의 시체가 되어 왔다.
이자르 헨켈의 아버지인 드보아 헨켈은 시체로 돌아온 아들의 시체를 보고 길길이 날뛰었다.
가신들은 병들어 오늘내일 하는 남작을 대신하여 실권을 잡고 있는 군터와 영지 무력의 상징인 드보아 헨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토벌군의 손해는 신임 기사 한 명에 지나지 않았고, 하츠 마을로부터 막대한 양의 세금을 받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가신들은 앞으로 들어올 세금을 계산하며 속으로 웃음 지었다.
드보아 헨켈은 바로 복수하자는 자신의 주장이 가신들에 의해서 묵살되자 자신의 집에서 칩거에 들어갔다.
로펜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기뻐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바로 하츠 마을로 향했다. 그를 따라나선 마차들에는 수많은 식량과 맥주, 와인이 실려 있었다.
완벽한 승리를 한 가디언들에게 줄 선물들이었다.
토벌군이 물러가고 어느 정도 안정이 된 하츠 마을의 문 대위 일행 사이에서는 때 아닌 돈 벌기 열풍이 벌어졌다. 하츠 마을을 인정받은 대신 남작령에 바쳐야 할 세금의 금액이 많았기 때문이다.
군터가 솟아날 구멍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선심을 쓴 세금이 문제였는데, 이곳 물가에 무지할 수밖에 없는 문 대위 일행은 나중에 촌장에게 설명을 듣고서야 자신들이 약속한 금액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세금도 세금이었지만 하츠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는 지금처럼 마을 사람들이 채집하는 약초와 문 대위 일행이 잡는 몬스터의 부산물로는 많은 소득을 올리기는 부족했다. 무언가 특별한 특산품이 필요했다.
일행으로부터 여러 가지 의견이 쏟아졌다.
가장 많은 의견을 낸 사람은 판타지 마니아인 이준혁 상병이었다.
그는 자신이 읽었던 판타지 소설에서 초반 돈을 버는 방법을 죽 나열했다. 하지만 비누, 마나석 광산, 무기, 냉장고, 마법 화덕 등 이준혁 상병이 제시한 물건들은 일행으로부터 신랄한 추궁을 받고 폐기되었다.
“그러니까 비누를 만들자고요. 비누는 돈도 많이 들지 않고, 이곳 사람들도 좋아할 겁니다. 분명 돈이 된다고요!”
이준혁 상병은 일행들을 대상으로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송채민 상병의 한마디 핀잔을 듣고 곧 시무룩해졌다.
“이 상병! 너 비누 만들 줄 알아? 그리고 만든다손 치더라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누를 어떻게 팔 건데? 니가 가서 팔래?”
거기에 문무혁 대위의 카운터 펀치가 이어졌다.
“송채민 상병 말이 맞다. 어찌어찌 비누를 만든다고 해도 지구에서 우리가 쓰던 물건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해 봐라. 지구에서 쓰던 비누는 우리가 흔히 아는 동물 기름과 잿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나도 잘은 모르지만 계면활성제니 뭐니 하는 약품들하고 인공 향료로 만드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약품들을 구할 방법도 없고 만들 방법도 없다. 물론 동물 기름으로 만들면 어찌어찌 만들기는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기름을 구하는 것도 어려울 뿐더러, 만들어도 아마 비누를 살 주고객층인 귀족들을 만족시키기는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문 대위의 깔끔한 정리가 끝나자 이준혁 상병은 풀이 죽어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문무혁 대위의 설명대로 실제로 지구에서 사용되는 비누는 화학공업의 결정체였다.
과거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줌이나 잿물을 세제로 사용한 이유는 오줌에 들어 있는 암모니아와 잿물의 나트륨 등이 강한 알칼리 성질이어서 지방을 분해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잿물을 사용한 비누는 제조 비용이 너무 비싸고 만들기가 까다로워서 극히 일부분의 계층에서만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비누가 대중화된 것은 1790년에 비누의 원료인 탄산나트륨이 싼값에 만들어지는 방법이 발견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역시 그때도 동물 기름이 비누의 주성분이었고 가격이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비싼 수준이었다.
겨우 20세기에 들어서 독일에서 합성세제의 발명이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니트로글리세린의 원료가 되는 동물 기름의 수요가 급증하자 그 대체품을 찾는 과정에서 석유에서 뽑아낸 성분을 합성한 비누가 만들어진 것이다.
문 대위가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일행이 화학 조성비를 알 리도 없었고, 안다고 해도 성분을 추출할 어떤 방법도 알지 못했다.
이준혁 상병이 주장한 무기, 냉장고, 마법 화덕 등의 물건들도 무시당했다. 쇠도 없었고, 쇠를 단단하게 만드는 방법도 상식 수준에서밖에 모르는 일행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결국 일행은 박재훈 병장이 제안한 목재 장사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프랑켄 왕국의 대다수의 주택은 나무로 지어지고 있었다.
도시를 제외한 주택들은 통나무를 짜 맞추어 지은 통나무집이 대다수였고, 도시에서는 통나무를 판재로 가공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무를 벌목해서 가지 정리를 하고 대패질을 해서 만드는 통나무집은 나무가 많은 프랑켄 왕국에 잘 맞는 주거 방식이었지만 나무를 제재하는데 너무 많은 품이 들어서, 도시에서는 의외로 주택용 나무가 비쌌다.
판자 한 장을 만들려 해도 이곳 사람들은 순전히 인력을 이용해 톱질로 판자를 만들어 냈다. 두 사람이 합심해서 이인용 톱으로 판자를 만들고, 대패질을 해서 완성한 판자는 품질은 좋지 않았지만 가격은 그에 비해서 비쌀 수밖에 없었다.
가장 문제가 될 듯싶었던 목재의 운반은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어둠의 숲에서 흘러나와 하츠 마을을 거쳐서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을 중앙으로 관통하여 뷔르츠 백작령을 통해 프랑켄 왕국의 수도인 마데부룩까지 흐르는 베서강―일행이 하츠 마을로 와서 알게 된 형산강의 원래 이름―을 이용하면 저렴하고 빠르게 많은 양의 목재를 수요처가 될 도시로 운반할 수 있을 터였다.
더불어 식량의 자급을 이루기 위해서 농사의 규모를 늘리려면 개간을 해야만 했는데, 마을 주변부터 벌목을 해 나아가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도 있었다.
문무혁 대위는 정진영 상병과 마인즈에게 수량이 풍부한 베서강의 물줄기를 동력으로 이용한 제재소의 설계를 부탁했다. 박재훈 병장이 어디선가 읽었다는 수차에 의한 제재소가 4세기경부터 있었다는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다.
수차를 이용해서 롤러나 기어로 가속한 원형톱을 돌려 나무를 제재해서 규격화된 판제를 대량생산하려는 계획이었다.
설계는 정진영 상병이 하겠지만, 실제로 제재소를 짓는 것은 마인즈가 될 터이니 두 사람이 설계 단계에서부터 상의를 하면 시행착오가 줄어들 거란 생각이었다.
문 대위는 기계화되고 규격화된 대량생산이 지구에 끼친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기계화된 대량생산은 목재의 개당 코스트를 낮추고, 규격화된 제품은 건설 시간을 단축시켜 줄 것이었다.
하츠 마을에서 생산되는 목재는 아마도 유로핀 대륙 최초의 공업 생산 제품이 될 터였다.
* * *
“감사합니다. 목숨을 구원받았습니다.”
하츠 마을에 도착한 로펜은 문무혁 대위를 보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감사를 전했다.
“이러지 마세요. 그렇게 감사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간 로펜 님이 저희를 도와주신 일에 비한다면 별일 아닙니다.”
문무혁 대위는 로펜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이런 인사는 저희 가디언들 사이에서는 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무릎을 꿇으시면 안 됩니다.”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브렌튼도 로펜에게 덧붙였다.
“로펜. 문대장님의 말씀이 맞네. 자네도 이제 한 배를 탄 동료가 될 터이니 대장님의 말씀에 따르게. 그리고 인사는 앞으로 이렇게 하는 거네.”
브렌튼은 가디언들 사이에서 하던 대로 오른손을 들어 손가락을 눈썹에 붙이는 인사를 했다.
“필승!”
털북숭이의 사내가 장난스럽게 하는 인사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문 대위도 함께 웃다가 로펜에게 말했다.
“이제 들어가시지요. 앞으로의 일을 상의해 봅시다.”
“네. 필승! 하하하하!”
“하하하. 로펜 님의 경례도 잘 어울리십니다.”
위기를 함께 넘긴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큰 웃음이 터졌다.
여름에 접어들어 더위가 느껴지는 한낮의 열기를 시원하게 날려 버리는 웃음이었다.
로펜은 문 대위로부터 앞으로 계획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듣고는 브렌튼을 데리고 레겐스부르크로 돌아갔다.
목재의 대량생산이라는 문 대위의 설명에 잠시 로펜의 반론이 있기도 했지만, 계속되는 문 대위의 설명에 로펜은 곧 수긍을 했다. 상인의 눈으로 보아도 싼 가격에 대량생산만 이루어진다면 효용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단순히 집을 짓는데 뿐만 아니라, 가구나 수레 등 수요는 폭발적일 것이 분명했다.
문 대위가 로펜에게 부탁한 것은 지름이 1m에 두께가 1.5cm정도 되는 강철로 만든 원형 판이었다. 문 대위는 그 원형 철판이 만들어져 로펜을 따라나선 브렌튼 편에 도착하는 대로 가공해서 목재를 절단할 원형톱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물론 톱날의 가공은 어둠의 숲에 있는 포항에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휴∼ 미치겠네.”
정 상병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문 대위가 부탁한 제재소의 구조 설계를 계속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해서 설계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생판 경험이 없는 제재소의 설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계는 이미 한 번 실패로 돌아갔다.
정진영 상병이 한 설계대로 마인즈는 목재로 미니 모형을 만들었었는데, 작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 설계도 골치 아픈데, 에미린의 억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안 나오네. 크윽.”
정진영 상병을 골치 아프게 하는 실상은 제재소의 설계가 아니었다.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밤, 지금껏 적응이 돼서 잊어 버리고 있던 몸의 끈적거림이 되살아났다.
정진영 상병은 식은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며 괴로워했고, 김 박사와 민유라 간호사는 그의 몸을 보살펴 주었다. 그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던 에미린은 느닷없이 정 상병이 마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기사는 유전으로 그 능력이 전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하지만 오러를 다루는 기사보다 월등히 적은 수의 마법사는 기사와는 경우가 달랐다. 기사는 많은 수련을 거치다 보면 자연히 오러를 느끼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마법사의 조건인 마나 친화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들은 유전적인 요인은 거의 없었고, 종족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랜덤하게 태어난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정 상병이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의 친화력이라는 이야기였다.
마나에 대한 친화력이라니 처음에는 황당하기도 했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마법을 배우려면 마나에 친화력이 있는 사람이 고대에서부터 내려오는 인간이 가진 마나에 대한 친화력을 활성화시켜 주는 마법진에 들어가야 한다는 이야기에 포기를 했다.
에미린이 이곳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시도를 해 볼 의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설명으로는 대륙 전역에 퍼져 있는 마탑에만 그 마법진이 존재한다는 설명이었다.
더불어 정진영 상병정도의 마나 친화력이라면, 우수한 마법사가 될 수 있으니 자신과 함께 마탑을 찾아가자고 시간만 나면 정진영 상병을 못 살게 굴고 있는 중이었다.
김성한 박사는 원형 철판을 가지고 포항에 도착한 문무혁 대위에게 조그만 수첩 한 개를 건넸다.
“이 수첩에 지금까지 알아낸 유로핀 대륙에 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에미린이 전폭적으로 협력해 줘서 일이 쉽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두 명이 됐군요.”
수첩을 건네받은 문 대위는 수첩을 살펴보며 김 박사에게 말했다.
마나 유동을 연구하기 위해서 대마법사를 찾아 어둠의 숲으로 일행을 따라나선 에미린은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천재인 듯, 곧 김 박사가 마법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일행에 대한 궁금증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몇 번은 피해 갔으나, 논리적으로 따지고 드는 그녀의 추궁을 견디다 못해 그들이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말았다.
“그렇지요. 마인즈에 이어서 에미린까지 두 명입니다. 우리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순간의 에미린의 표정을 보섰어야 하는데. 하하!”
“고생하셨습니다.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닌 듯싶으니 잘되겠지요.”
“에미린의 말로는 차원 이동은 전설로만 내려오는 마법이라고 하더군요. 머나먼 고대에 이 세상의 신들이 차원의 틈을 찢고 강림했다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물론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라서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그동안 김성한 박사는 민유라 간호사와 함께 에미린의 협조를 받아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을 정리했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단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을 드리지요.”
김성한 박사는 그동안 에미린에게 들은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문 대위에게 해 주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저녁 무렵에 시작해서 다음날 동이 뜰 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