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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20화)
4. 정비(2)
에미린이 이야기해 준 이 행성의 이름은 ‘여호와’였다.
‘여호와’는 지구에서 기독교의 하느님을 나타내는 단어인 ‘여호와’와 발음이 같았는데 잠시 의문을 가지던 김성한 박사는 곧 우연의 일치로 치부했다.
에미린이 설명하는 여호와는 지구의 가이아 이론처럼 행성 전체가 살아 있다는 개념과 비슷했고 신들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으나, 감사와 경외의 대상일 뿐 실제로는 모시는 신전도 없었고 신성을 들어내는 경우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기본적으로 일행이 떨어진 이 세상은 이준혁 상병이 묘사한 판타지 세계와 흡사했다. 오러를 쓰는 기사와 마법사가 존재했고, 실제로 드래곤도 존재한다고 했다. 그에 더해서 판타지에서 나오는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살고 있었고, 엘프와 드워프까지 무리를 이루고 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곳의 정치제도는 봉건제도의 중심인 왕권과 더불어 이 세상을 지배하는 12신을 모시는 신권이 강하게 혼합되어 있어서 대주교령이니, 주교령이니 하는 신관이 다스리는 영지가 있을 정도였고, 신관의 발언권 또한 그에 걸맞게 높았다.
하지만 의외로 유로핀 대륙의 국가들은 봉건제도에 걸맞지 않게 중앙의 힘이 무척이나 강했고, 권력이 왕에게 쏠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봉지를 받은 영주의 권한은 막강했으나, 왕국법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 면이 많았고 영지에 있는 신전의 간섭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신관의 권력이 강했지만, 교리로 중세처럼 일반 사람들을 억압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신이 실제로 권능을 행사하는 곳에서 교리가 신자를 억압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했으나 에미린의 이야기가 계속되자 김성한 박사는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원인을 알아챌 수 있었다.
중세 지구의 기독교처럼 보이지 않는 신이 심판의 날에 인간을 천당과 지옥으로 보낸다는 교리를 무기로 삼아 교리에 위배되는 모든 것을 이단으로 몰아 박해했던 것과는 다르게 이곳의 신은 신관을 통해서 신성을 인간에게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한 김성한 박사는 이곳을 지배하는 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보이지 않는 신이 아니고 보이는 신이므로 애초에 이단이 생길 수 없었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존재 할 수 없는 현실을 깨달은 김성한 박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신교이면서 서로 완벽히 공존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김성한 박사는 이 행성의 12신 중 에미린이 믿는 신인 마나의 신 유타의 교리에 대하여 알아보려 했으나 의외로 그녀는 교리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드물었다.
김 박사는 자신의 추론이 옳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신을 믿는다.
신은 신관을 통해서 신성의 권능을 발휘한다.
너무나 명백히 신이 존재하므로 신을 직접 영접하는 신관이 아닌 일반인들은 역설적으로 교리 자체에 억매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자비와 대지의 여신 미리엄을 믿는 사람이 전쟁에서 살인을 했다 가정한다면, 그는 분병 자비라는 자신이 믿는 여신의 말씀을 어긴 것이 되었다. 그런데 교리가 억압적이라면 그는 죄책감을 느낄 터였지만 자신이 믿는 신이 아니더라도 분명 전쟁을 관할하는 질투와 전쟁의 여신인 제테가 존재한다는 것이 사실이므로 그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은 신은 존재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아도 되는 세상이었다.
에미린은 오늘도 정진영 상병을 괴롭히고 있었다.
물론 그녀 자신은 그런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당하는 당사자인 정 상병은 죽을 맛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마탑으로 가자구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집 놔두고 왜 내가 그곳으로 가야 되는데?”
두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반복되는 대화를 지치지도 않고 되풀이했다.
“마법사가 되려면 마탑에 가야 된다고요. 당신 정도의 마나 친화력이면 대단한 마법사가 될 수 있다니까요.”
“누가 마법사가 된다고 했어? 김칫국 마시지 말고 니 할 일이나 해!”
에미린은 김칫국을 먹는다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지만, 정 상병의 표정에서 결코 좋은 소리가 아니라는 것쯤을 알 수 있었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닌지라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지 말고 함께 가요. 나도 오랫동안 집을 떠나서 이제 집에 가 보고 싶단 말이에요.”
“근데 너 직장 팽개치고 왔다며? 잘리는 거 아냐?”
“괜찮아요. 전 천재니까요. 복귀할 때 잔소리 좀 들으면 되요.”
“그래, 너 잘났다. 니가 최고다. 그러니 제발 날 좀 놔둬. 이거 대장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완성해야 된다고.”
정 상병은 그리고 있던 설계도를 들어 에미린의 눈앞에 흔들었다. 하지만 에미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흥! 이제 알았어요, 나 잘난지? 이래 봬도 프랑켄 왕국 100년만의 천재로 불리던 나라고요.”
에미린이 자화자찬을 하고 있는 와중에 그녀의 뒤에서 문무혁 대위가 나타났다.
“하하하! 몰라 봐서 죄송합니다. 자작님의 영애에다가 초천재이신 에미린 님을 이런 곳에 처박아 두었으니.”
“앗! 산적 아저씨 오셨네. 무슨 일로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여 이곳까지 오셨을까?”
“에미린 님이 보고 싶어서 왔지요. 별일 없으셨습니까?”
“그럼요. 전 잘 지내요. 이곳 시설이 저희 아버지가 계시는 성보다 더 편리한 것 같아요. 이계인들은 대단해요. 이런 것을 어떻게 생각해 내는지.”
에미린의 말대로 일행이 처음으로 도착한 오크 마을, 즉, 포항은 많은 개선이 이루어졌다.
형산강에서 끌어온 물로 작은 저수지도 만들어졌고, 그 물로 수세식 화장실도 지어졌다. 따뜻한 물이 나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세면장에는 나무로 만든 홈통을 통해서 항상 흐르는 물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에미린이 흥분한 것은 GPS 수신기를 통해서 보는 영상들이었다.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상 속의 문명의 이기들에 정신을 팔렸고, 흘러나오는 새로운 음악에 열광했다.
에미린의 호기심은 끝 간 데 없이 계속 되었고, 시달림을 당하다 못한 김성한 박사의 제안에 의해 마법과 과학의 접목을 연구하고 있었다.
요즘은 김성한 박사와 민유라 간호사 그리고 정진영 상병에게 과학의 기초 지식을 배우고 있었는데, 그녀의 자화자찬이 아니더라도 역시 천재는 달라서 엄청난 속도로 지식을 흡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정말 집에 가고 싶으십니까?”
“아니에요.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정 상병님이 마법사가 되는 걸 너무 두려워해서 괜히 떼 써 본 거예요.”
에미린은 딴청을 부리는 정 상병을 노려보며 문무혁 대위의 질문에 대답했다.
“급한 일은 아니니 천천히 하자고, 나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래도. 어느 정도 이곳 상황이 안정이 돼야 이곳을 떠날 수 있지. 그러니 잔말 말고 좀 기다려.”
정 상병은 에미린에게 애원하다시피 했다.
“흥! 그럼 좋아요. 제가 좀 참죠. 하지만! 대장님이 약속해 주셔야 되요. 마법사의 재능을 썩히는 것은 마나의 신인 유타 님께 불경한 행동이라고요.”
에미린은 문 대위에게 다짐을 받으려 했다.
눈치가 빠른 에미린은 보통 때는 위아래도 없이 느슨해 보이는 이 신기한 이계인 집단에서 문 대위가 얼마나 존경받고 커다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요, 그래. 약속하지요. 정 상병 말대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분명 보내드리지요. 대신 그때까지 정 상병 너무 괴롭히시면 안 됩니다. 정 상병, 너도 약속해라.”
문 대위의 대답으로 상황은 마무리됐다.
에미린은 혀를 살짝 내밀며 정 상병을 놀렸고, 정 상병은 한숨을 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무혁 대위는 김준성 중사와 마인즈를 만나러 가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 사귀는 거 아냐? 말하는 투가 사랑싸움 하는 것 같던데.”
문 대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뒤에서는 정진영 상병과 에미린 드 홀더의 말다툼이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휴∼ 그러니까 여러분의 말씀은 자신과 마을을 지키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는 거죠?”
김준성 중사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그렇습니다. 저희도 저희 스스로 마을을 지킬 수 있게 훈련시켜 주십시오.”
무리를 대표해 요르크가 나섰다.
“가디언님들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저번과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란 법이 없지 않습니까? 저희 마을도 저희가 지킬 수 있도록 힘을 합치겠습니다.”
김준성 중사는 이 사태의 원흉인 채명훈 하사를 째려보았다.
문제의 발단은 아카데미에서 일어났다. 아이들에게 덧셈, 뺄셈만 가르치기가 지루했던 채 하사는 여러 가지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노래가 뭔지도 모르고 자라던 아이들에게 노래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학교종이 땡땡땡을 배운 다음날 채 하사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쇠로 된 귀하디귀한 오갤런 젤리캔 한 개를 아카데미 입구에 매달아야 했고, 다른 노래들도 비슷한 상황이 계속됐다.
그 정도로 끝났으면 좋았을 노래 강습은 채 하사가 심혈을 기울여서 개사해 아이들에게 가르친 새마을 노래에서 큰 파장을 몰고왔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움막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청소하고
푸른 밭을 만들어 알뜰살뜰 키우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서로서로 도와서 땀 흘려서 일하고
골드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보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우리 마을 지키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아이들이 흥겹게 부르는 노래를 들은 부모들은 채 하사의 개사로 조금 변질은 됐지만, 워낙에 대한민국에서 검증된 노래인지라 조금씩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가사 한 줄 한 줄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되었다.
그러다 하츠 마을 사람들은 ‘우리 모두 굳세게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워서 우리 마을 지키세’ 란 가사에 가디언들의 속뜻이 있다고 지래 짐작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김준성 중사는 마을 남자들을 눈앞에 두고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가디언들의 비밀스러운 조종(?)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가디언들이 하츠 마을을 떠나거나 패배한다면 바로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거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유야 어떻게 되었든 그날 부로 채명훈 하사는 아카데미 교사직에서 해임되고, 마을 자치대의 대장에 임명되었다.
시작한 사람이 책임져야 된다는 김준성 중사의 강력한 건의가 문 대위에게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그렇게밖에 못하겠습니까? 3번 올빼미!”
“아닙니다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군대의 대화는 오직 다와 까로만 끝난다는 말 벌써 잊었습니까? 3번 올빼미. 정신이 빠졌습니다. 군대는 연대 책임입니다. 전방에 보이는 나무 좌에서 우로 선착순 3명 출발!”
3번 올빼미 요르크는 미칠 지경이었다.
눈앞에 교관이라는 작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빨간색 두건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싸우는 법을 가르쳐 주기는커녕 온몸을 꼬고, 비틀고, 뛰는 PT체조라는 것을 자신들에게 시키기 시작했다.
마을 남자들 중 한 사람만 틀려도 연대 책임이니 뭐니 하며 선착순 달리기, 팔굽혀펴기, 김밥말이, 통나무 들기 등 온갖 해괴한 얼차려를 주기 일쑤였다.
“헉! 헉!”
“헉! 헉! 헉!”
“요르크. 이러다 나 죽겠네. 도대체 이게 무슨 싸우는 방법이란 말인가?”
“한스. 쉿! 저 악마 같은 조교가 들으면 또 얼차려야. 조용히 하게.”
지옥의 훈련 중 잠시의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하츠 마을 주민인 한스는 채 하사의 눈치를 보면서 요르크에게 수군댔다.
마을 남자들은 노동으로 단련된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신체 건강한 남자들을 숱한 눈물과 구토물의 웅덩이에 빠트렸던 PT체조는 노동으로 단련된 육체 정도로 감당할 수 있는 체조가 아니었다.
‘킁! 결코 난 화풀이하는 것이 아니라고. 체력이 우선이지 암! 몸이 만들어지면 태권도부터 시작해 볼까?’
헐떡대며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마을 남자들을 바라보며 채명훈 하사는 지금껏 쌓인 스트레스를 풀리라 다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