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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 1권(21화)
4. 정비(3)


“채 하사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김준성 중사가 문무혁 대위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는데 기회가 좋았습니다. 저희가 시키는 것보다는 저들이 스스로 찾아오다니 솔직히 저는 채 하사 덕분에 고민 하나를 덜었습니다.”
“하하! 그렇게 되나요? 하긴 저들도 이제 슬슬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을 배워야 하겠지요. 방법은 우리가 가르쳐 줄 수 있지만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스스로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가르칠 수 없는 거니까요.”
“맞습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총을 들고 모든 싸움을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조금씩 하츠 마을 사람들도 우리의 동료가 되어 가야겠지요. 물론 동등할 수는 없겠지만요.”
김준성 중사는 문 대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듯싶었다.
일행의 최대의 목적은 생존이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생존의 목적이 우선 달성되고, 아직은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요원한 지금 문 대위는 일행의 나아갈 방향을 ‘잘’사는 것으로 돌린 것이다.
일행이 잘살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것을 허락한 것이고, 하츠 마을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김준성 중사는 문 대위의 생각, 즉, 모든 일은 일행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동의했다. 자신들은 이 세상의 이방인이었고 이 세상이 중세의 사회제도하에서 민중이 고통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책임감을 느낀다거나 이들을 계몽시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김준성 중사를 비롯한 일행들은 결코 성자가 될 수 없었고, 전능하다시피 한 판타지 소설 속의 주인공은 더군다나 아니었다.
찌는 듯한 더운 8월의 한낮 뙤약볕 속에서 뛰고 구르고 있는 하츠 마을 남자들을 보는 김 중사와 문 대위의 눈에 아주 잠시 미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5. 두 번째 충돌(1)


드보아 헨켈이란 남자는 기사라는 칭호가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는 역시 기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동생과 더불어 기사가 되었다.
불행히도 동생은 펜자임 왕국과의 3년전쟁 와중에 전사를 했지만 자신은 살아남아 헨켈가의 문장을 지킬 수 있었다.
그는 그의 인생 전부를 변방 중의 변방인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을 수호하는데 힘썼고 레겐스 남작을 보필하는데 바쳤다.
그는 부하들에게는 엄하고 존경받는 지휘관이었고, 집안에서는 자애로운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공로를 높이 산 영주인 레겐스 남작은 그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레겐스부르크의 검이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울고 있다.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레겐스부르크를 지키던 검 중의 검인 그가 울고 있다.
나이 40이 되어 겨우 본 아들이 온몸에 구멍이 뚫려 시체로 돌아왔다.
한낱 화전민 마을을 토벌하기 위해서 길을 떠나면서 환하게 웃던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충격을 받은 사랑하는 자신의 부인이 쓰러졌고, 한 달 넘게 거동을 못하고 있다.
드보아는 어둠의 숲을 근거지로 삼은 가디언이라는 자들에게 복수를 맹세했다. 늙은 기사의 신성한 맹세는 무신 토비아스에게 한 잔의 피와 함께 바쳐졌다.
드보아는 복수를 결심했어도 적도 모르고 무작정 뛰쳐나갈 정도로 어리석은 남자는 아니었다. 정보를 모으던 그는 토벌에 참여했던 영지군 십부장들로부터 전후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오랜 경험으로 군터의 토벌이 단순한 화전민 토벌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토벌군 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가디언이라는 무리하며 그가 손만 들면 말 머리가 터져 나갔다는 십부장들의 이야기에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무언가 군터가 숨기는 일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손짓 한 번에 말 머리를 터트리는 엄청난 마법을 사용하는 가디언들이 겨우 한낱 화전민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 나타날 일은 만무했고 분명 그들이 지키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군터가 토벌군을 일으킨 것도 그들이 지키는 것을 노리던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영지 자체에서 보급대를 운영하지 않고 한낱 상인에 지나지 않는 부르터가 전적으로 보급대를 운영했다는 말을 들은 드보아는 자신의 직감이 확신으로 변함을 느꼈다.
욕심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돼지 부르터가 돈 한 푼 받지 않고 군터를 도왔다니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드보아는 부르터를 찾아갔다.
부르터는 소드 익스퍼드 중급의 기사가 내뿜는 기세에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과연 오러를 다루는 기사의 기세는 대단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오줌을 지릴 것 같은 공포를 참고 부르터의 질문에 대답하는 부르터도 산전수전 다 겪은 레겐스부르크 제일의 상인다웠다.
그는 진실에 약간의 거짓말을 섞었다.
진실을 말하면 눈앞에 있는 부르터의 칼이 언제 자신의 목을 자를지 몰랐다.
“드보아 경. 경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누구보다도 경의 복수에 힘을 보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불러만 주십시오. 아니, 지금부터 완벽한 보급을 준비하겠습니다. 용병도 구할 수 있는 대로 투입하겠습니다.”
드보아는 눈앞에서 떨고 있는 비대한 체구의 상인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둠의 숲에 대마법사가 살고, 그를 지키는 가디언들이 화전민 마을에 머물고 있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네. 드보아 경, 맞습니다. 그들이 저희 영지에서 잡은 와이번이 뷔르츠 백작령에서 팔렸고, 그 사실을 알게 되신 군터 공자께서 노하신 겁니다. 분명 어둠의 숲도 저희 영지의 영역 아닙니까? 근본도 모르는 놈들이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영지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군터 공자께서 토벌을 결심하신 거지요. 그리고 저야 영지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처지이고 영주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몸이니 이번 기회에 은혜를 갚을 요량이었습니다.”
부르터는 마법 무구와 로펜의 이야기는 쪽 빼고 이야기를 했다.
아직은 로펜과 마법 무구 이야기가 드보아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었다. 군터는 가디언들에게 막대한 세금과 마법 무구를 약속받았지만, 자신은 아직 얻은 것이 없었다.
더구나 드보아가 로펜과 마법 무구에 대해서 알게 되면 자신의 목숨은 없는 것과 같았다.
전후 사정을 알게 된 드보아는 결론을 내리고 병중의 레겐스 남작을 찾아갔다. 그는 남작에게 울면서 전후 사정을 고했다.
자신의 충복인 늙은 기사가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을 본 남작은 그에게 복수를 허락했다.
드보아는 어린 시절을 자신과 함께 성장했고, 펜자임 왕국과의 3년전쟁에서 동생을 버려 가면서까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남자였다.
“허락하네. 영지의 모든 힘을 모아 자네의 정의를 보여 주게.”
주군인 레겐스 남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드보아는 옆구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남작에게 바쳤다. 실패하면 그 단검으로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는 의미였다.
레겐스 남작은 말없이 자신의 기사이자 친우의 단검을 받았다.
평화로웠던 레겐스 남작령이 다시 전쟁 준비로 분주해질 터였다. 비록 상대는 소수였으나 군터의 실패로 미루어 봤을 때 어려운 싸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드보아가 내민 단검을 잡은 병약한 레겐스 남작의 손이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레겐스 남작의 승낙을 받은 드보아는 곧 이어서 영지 수석 마법사인 울리히 힘멘도르크를 찾아갔다.
4서클 마스터의 마법사인 울리히 힘멘도르크는 실력만으로는 도저히 변방 중의 변방인 레겐스부르크 남작령 정도에서 영지 마법사를 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부유한 남작령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자작령의 영지 마법사 자리도 서로 앞 다투어 데려가려 할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런 그가 변방인 레겐스부르크에 자리 잡은 것은 3년전쟁 때 있었던 레겐스 남작과 드보아와의 인연이 시작점이 되었다.
제대로 된 영지 마법사 한 명 없었던 레겐스 남작은 인연이 닿은 전투 마법사 울리히에게 자신의 영지 마법사가 되기를 청했고, 당시 3서클 마스터였던 울리히는 이어지는 전투에 신물도 나고 새로운 서클에 대한 갈망도 컸던지라 남작의 부탁을 수락했다.
레겐스부르크에 도착한 그는 의외로 연구에 필요한 희귀한 약초나 몬스터 부산물을 구하기 용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제자 2명을 키우면서 연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경의 말은 잘 알았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네. 그런 나에게 이자르는 내 자식과 같네. 비록 늙어 쓸모없어진 몸이지만 나도 한 팔을 거들게 해 주게.”
12년 전 벌어졌던 3년전쟁의 인연으로 레겐스부르크에 온 울리히는 연배가 비슷한 드보아 헨켈과 깊은 교감을 나누고 친우가 되었다.
독신으로 평생을 지내 온 그에게 드보아의 아들 이자르는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피가 싫어 이런 촌구석으로 온 자네에게 다시 피를 보게 만든 이 못난 친구를 용서해 주게.”
“그런 섭섭한 소리 말게. 어디 우리가 남이던가? 그건 그렇고 부인의 상심이 클 터인데 잘 위로해 드리게.”
늙은 기사와 마법사는 서로를 신뢰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날이 밝으면 이제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했던 피를 보아야 할 터였다.

* * *

2차 토벌군의 침공 소식은 로펜에 의해 빠르게 하츠 마을로 전해졌다.
로펜에 의해서 전해진 토벌군의 규모는 대단했다.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의 총력을 기울인 원정인 만큼 규모는 이전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레겐스 남작이 병상에 있는지라 싫다고 빼던 군터가 드보아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영주 대행으로 토벌군을 지휘하게 됐고, 병권은 드보아 헨켈이 잡았다.
거기다 영지 마법사인 울리히 힘멘도르크가 제자 2명을 데리고 참전을 결정했고, 레인 헐트를 제외한 나머지 5인의 기사 전부가 따라나섰다.
첫 원정에서 살아남은 레인 헐트는 드보아와 사이가 껄끄럽기도 했고, 어찌 됐든 영지성을 지킬 기사 한 명 정도는 필요했기 때문에 빠질 수 있었다.
기사가 원정에 빠진다는 것은 불명예 중의 불명예였지만, 가디언들의 무서움을 익히 알고 있는 레인은 기꺼이 불명예를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레겐스부르크 남작령의 병력은 기사 이외에도 대단했다. 기사와 더불어 영지 무력의 상징인 10기의 중갑기마대와 말 10필을 잃어 버린 경기마대가 영지에서 말을 징발하여 참가하였고, 더불어 20기의 경기마대가 숫자를 더하고 있었다.
보병은 영지군 전력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500명의 영지병이 참가했다.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영지 이름으로 용병을 50명을 모집하였고, 이번에도 보급대를 책임진 부르터가 역시 50명의 용병을 고용해 힘을 보탰다.
문자 그대로 영지의 전 전력을 동원한 총력전이었다.
남작이 왕국 간의 전쟁에도 동원하지 않을 이런 총력전을 승인한 배경에는 평생 그에게 충성을 바친 노기사에 대한 남작의 애정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나타나 있었다.

아무리 무력에 자신이 있는 문 대위 일행이라도 보병 600명에 기마병 46명이라는 숫자는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이었다.
“죽것구만.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또 쳐들어온데? 이번에는 깡그리 죽여 버리죠.”
브렌튼은 그동안 일행들과의 사이가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중에서도 천성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이준혁 상병과의 사이가 제일 좋은 편이었다.
일행이 회의를 시작하고, 로펜의 설명을 듣고 난 시점에서 아마도 그들 중 유일하게 걱정이 없는 사람은 브렌튼일 터였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시간을 가디언 일행과 지냈지만, 가디언 일행이 지닌 무력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였기에 몇 백 명의 병력이 몰려오던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브렌튼 님. 그렇게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자그마치 650명 정도의 병력이라고요. 만만하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이준혁 상병은 브렌튼의 자신감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이 세상 사람인 브렌튼에게 쳐들어오는 영지병은 전부 죽여야 할 대상이자 전리품을 남길 적에 지나지 않았고, 그런 생각은 이준혁 상병을 비롯한 일행에게는 쉽사리 떠올리기 힘든 생각이었다.
단 한 명의 목숨을 빼앗은 것으로도 문무혁 대위가 얼마나 고심에 빠졌었는지 잘 알고 있는 이준혁 상병은 자신보다 나이는 먹었지만 철은 안 들어 보이는 브렌튼의 말이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번에는 저번처럼 위협만으로는 해결이 힘들 듯싶은데요.”
김준성 중사는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문 대위를 바라보았다.
문 대위로서도 난감했다. 전부 죽이면 그만이다. 역시 가장 쉬운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돌진하던 어린 기사를 떠올렸다.
아마 자신이 단발로 쐈다면 결코 맞추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스피드를 보여 줬던 기사였다.
이번에는 그보다 능력이 뛰어난 기사가 6명이라고 했다.
그들이 동시에 뛰쳐나온다면, 문 대위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분대원들로부터 여러 가지 의견이 개진되었다.
하츠 마을 주민과 일행들 전부를 어둠의 숲으로 소개하자는 의견부터, 야영지에 다량의 C―4를 매설해서 폭사시키자는 의견 등 일행의 의견은 다양했다.
문 대위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생각에 잠겼던 그는 다음날 아침 모든 일행과 하츠 마을 주민을 아카데미 앞의 공터로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