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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8화)
4장 흑마법사(2)
넬슨은 자신의 말을 지켰다. 사고가 난 다음날, 선도위원을 2학년으로 바꾼 것이다. 나는 그의 조치에 만족했다.
문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비오, 정말 고마워.”
넬슨이 임명한 선도위원은 다름 아닌 플린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친구가 위기에 처해 있다면 당연히 도와야지. 오히려 제때 돕지 못해 내가 미안하지. 플린, 몸은 괜찮아? 그 녀석들이 다시 괴롭히지는 않아?”
플린이 문에 머리를 기대면서 말했다.
“루비오 덕분에 괜찮아. 몸도 유피아나 선생님이 힐링으로 치료해 주셔서 말짱하고. 날 괴롭혔던 아자크 왕자는 아직도 병원 신세지만…….”
그의 말이 왠지 힘없이 느껴졌다. 뭔가 걱정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넬슨의 말에 따르면 아자크 왕자는 플린이 사는 나라의 왕자였다.
나는 그의 걱정을 대충 짐작해 낼 수 있었다. 나라의 왕자가 자신 때문에 큰 부상을 입었으니 후환이 두려운 것이다.
물론 잘못은 아자크 왕자가 했다. 하지만 높은 위치에서 교만함을 드러내는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플린이나 나 때문에 자신이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플린, 내가 왕자를 때렸으니 곤란하지 않겠어?”
플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미 뒷일을 각오한 것 같았다.
“어차피 그는 나를 미워했어. 그때도 아무것도 아닌 일로 시비를 걸어 나를 넘어뜨렸지. 루비오가 아니라도 그는 충분히 나를 미워하고 있었어. 왕자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말이야.”
나는 혀를 찼다.
“왕자라는 자가 나라의 백성을 사랑하기는커녕 박해하다니. 정말 형편없는 녀석이군. 그런 녀석이 왕이라도 된다면…… 나라의 미래가 어두울 거야.”
“나는 그가 날 미워하는 이유를 알아. 그는 내가 진짜 귀족이 아닌 것을 증오하고 있어.”
“진짜 귀족이 아니라고?”
플린은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장사로 돈을 아주 많이 벌었어. 수완도 좋았고, 운도 있었지. 하지만 돈을 쓰는 방법이 잘못되었던 거야. 아버지는 돈으로 몰락한 귀족의 작위를 사고 말았어. 돈으로 귀족의 작위를 샀지만 아무도 우리를 귀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지. 이름에 귀족의 증거인 ‘드’가 들어가 있지만, 귀족들은 우리를 진짜 귀족으로 취급하지 않았어. 루비오, 나는 네가 부러워. 넌 순수 귀족이잖아. 그것도 아주 높은…….”
신분이 아무리 높아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면 그건 무가치한 것이다.
나는 플린에게 말했다.
“플린, 돈으로 작위를 산 것이 나쁜 일일까?”
풀린이 말을 삼켰다.
“루비오…….”
“플린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했어. 그리고 번 돈으로 작위를 샀지. 이건 나쁜 일이 아니야. 자신이 노력해서 그 대가를 손에 넣은 거잖아. 하지만 아자크 일행은 어땠지? 그들은 그냥 운 좋게 귀족, 왕족 집안에서 태어난 것뿐이야. 그들이 어떤 노력을 했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잖아. 그런 자들이 노력한 자들을 증오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거야. 플린은 자신의 ‘드’를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 없어.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그들에게 맞서야 해. 아버지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말이야. 한심한 것은 그 녀석들이야. 그런 녀석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는 나라는 절대 강건할 수 없어.”
플린이 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귀족이란 건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는 것이라고…….”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진승과 오광이 말했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야. 결국 그들은 낮은 신분이었지만, 황제가 되었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황제가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야. 그리고 한 고조도 시작은 아주 하찮은 관리에 지나지 않았지. 황숙이니, 왕야니, 정일품이니 하는 거창한 자리가 아니라 보잘것없는 자리에서 시작해서 황제가 된 거야. 플린,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야. 삶은 태어난 이후에 어떻게 노력을 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야. 출발점이 다르다고 해도 일등을 하는 것은 가장 앞에서 출발한 사람이 아니야. 그는 가장 앞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교만해지기 쉽거든.”
나는 무엇 때문인지 플린에게 아주 길게 설교를 하고 말았다. 말을 하고 보니 평소 스승님이 내게 자주 해 주셨던 말과 비슷했다.
내 스승님은 무당파 속가 제자로 시작했기 때문에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무당파 장문인이 될 수 없었다. 무당파 장문인은 보통 장문의 직계 제자 중에서 나오는 것이 관례였던 것이다.
플린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고 있었다.
“루비오……. 루비오……. 나는 네가 그냥 조금 착한 귀족인 줄로만 알았어. 한데 넌 정말로 대단하구나. 나는 루비오와 같은 말을 하는 귀족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그래, 루비오의 말이 옳아. 노력이 중요한 거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고 하면 너무 비참하잖아. 루비오, 나는 앞으로 부끄러워하지 않겠어. 아버지의 노력을…….”
플린에게 약간이나마 위로가 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대화 주제를 돌리기로 했다.
“플린.”
“응.”
“부탁이 하나 있어.”
플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루비오의 부탁이라면 어떤 것도 들어줄 수 있어. 루비오는 나를 구한 영웅이잖아.”
“영웅은 좀 과하고, 좋은 친구로 해 두자. 플린, 지하실로 상관없는 사람이 들어오지 못하게 지켜 줄 수 있겠어?”
플린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 때문에 선도위원이 된 거야. 내가 반드시 루비오를 지켜 줄게. 안티 매직이 걸려 있는 타격봉도 받았고. 이번에는 할 수 있어.”
사실 난 플린이 조금 못 미더웠다. 특별히 무공을 배운 것 같지도 않았고 또래에 비해 덩치도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넬슨 영감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를 선도위원에 임명했을 리 없었다. 누군가 그를 보좌할 수 있는 사람을 같이 임명했을 것이다.
플린에게 이렇게 말해 두면 그에게까지 말이 들어갈 테지. 그렇게 되면 내 연공을 방해할 사람은 없겠지.
나는 플린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럼, 플린. 부탁해.”
“응! 루비오, 맡겨 줘.”
플린이 밖으로 나간 뒤 나는 연공을 시작했다. 어서 예문의 경지를 뛰어넘고 싶었다.
토납법으로 모은 정기를 소주천을 통해 단전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한음지기로 바꾸었다.
나는 수초심상경을 통해 한음지기를 순양지기로 조금씩 바꿔 나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정기의 양이 많은 것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순양지기가 늘어나는 속도보다 한음지기가 쌓이는 속도가 빨랐다.
체온이 급속도로 내려갔다.
결국 난 수초심상경을 포기해야만 했다.
소주천을 가볍게 일주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쉽지 않군. 너무 만만히 본 것일까?”
지난 삶에서 나는 10년 만에 예문의 경지를 넘었다. 막강한 용맥이 있다고는 해도 며칠 만에 10년의 연공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예문에서 10년. 결국 나는 무극의 경지에서 멈췄다.
무당파 고수들은 이렇게 말했다.
‘무극에서 그 이상으로 올라가는 데는 세 배의 시간이 걸린다.’
3배의 시간. 즉 30년이라는 긴 세월이었다.
나는 그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예문의 경지를 넘는데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공이란 착실히 쌓아 나가야만 힘이 되는 것이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정기의 양을 늘렸다. 일단 내력을 풍부하게 해서 예문의 경지를 튼튼히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가 아니던가?”
이날부터 나는 수초심상경을 연마하지 않고 토납법으로 단전의 내력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독방에서 나갈 무렵, 나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순양지기와 순음지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들을 어느 하나로 바꾸지 않고 마음대로 사용해야 진정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무극의 경지에서 멈춘 것이다.
이 무극의 경지를 넘어서면 심안의 경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심안의 경지에서부터는 앞으로 나아가기가 무척 힘들어진다.
과거 무당파의 천재로 불렸던 관웅은 오 년 만에 무극을 넘어섰지만, 심안의 경지를 넘어서는데 오십 년이 걸렸다. 그는 자신이 성취한 경지를 가리켜 삼매경이라 이름 붙였다. 이 삼매경을 넘어서야만 비로소 화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경을 꿈에서나 익힐 수 있는 경지라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화경의 경지에 이르고 말 것이다. 내게는 용맥과 전생의 풍부한 경험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그저 그런 무공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소주천으로 정기를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