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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9화)
4장 흑마법사(3)
독방을 나서자마자 내가 불려 간 곳은 학장실이었다. 이곳은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딱딱하고 지루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넬슨은 서류와 싸우고 있었다.
나와 두 청년이 안으로 들어서자 넬슨이 서류를 덮으면서 말했다.
“루비오 군. 그간 수고했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닙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런가?”
넬슨이 손짓을 하자 나와 이곳까지 동행한 두 선도위원이 학장실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것을 확인한 넬슨이 밝게 웃으면서 내게 자리를 권했다.
“앉게나.”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편하게 나를 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아직 매사에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넬슨은 날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춰진 사람은 분명 나였지만 그는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흠……. 아카데미에 또 다른 문제가 생긴 걸까? 학장이란 자리는 그리 수월한 곳이 아닐 테지.
넬슨이 말했다.
“수척해 보이는군.”
“그렇습니까?”
“하지만 눈빛이 살아 있어. 독방이 자네에게 뭔가 깨달음을 준 모양이군. 좋은 경험을 했다는 자네의 말은 거짓이 아닌 것 같군.”
그와 같은 사람은 속이기 힘들었다.
“머릿속을 비우니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자네가 소드 마스터가 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걸세. 자네의 눈이 소드 마스터도 가능하다고 말해 주고 있으니까.”
소드 마스터? 이건 마검사와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아마도 무극의 경지를 넘어선 심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우리 두 사람 모두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
나는 넬슨에게 물었다.
“전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앞으로의 일……. 그래, 그게 중요하겠지. 나는 자네를 전과시킬 작정일세.”
나는 독방에 식사를 가져온 플린을 통해 아카데미에 3가지 클래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플린, 세실이 속한 클래스는 노멀 클래스였다. 노멀 클래스는 말 그대로 아주 평범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노멀 클래스는 마법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가르치는 수준도 크게 높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노멀 클래스가 열등생을 가르친다는 말은 아니었다. 아카데미 학생의 9할이 이 노멀 클래스에 속했다.
마법에 재능이 있는 자는 천에 하나, 만에 하나였다. 이건 귀족이나 부자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해마다 수백 명의 지도층 자녀들이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이들 중 상위 클래스에 들어갈 만한 재능을 가진 자는 다섯 명 안쪽이었다.
상위 클래스인 스페셜 클래스는 마법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심화 마법 과정이나 응용 마법을 배웠으며, 노멀 클래스와는 다른 마법 지팡이를 받았다.
스페셜 클래스에서 두각을 보인 사람은 즉시 옵티컬 클래스로 올라갈 수 있었다.
옵티컬 클래스는 오직 실력만으로 선발되었다. 나이나 신분은 옵티컬 클래스에서 무의미했다.
옵티컬 클래스 과정을 마치게 되면 견습이 아닌, 진짜 마법사 칭호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마법사 칭호를 받은 마법사는 대륙 어디에서도 후한 대우를 받았다.
넬슨은 아마도 나를 상위 클래스 중 하나로 승급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넬슨을 향해 말했다.
“스페셜 클래스입니까?”
넬슨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그걸로 만족하겠나?”
“설마 옵티컬 클래스입니까?”
이번에도 넬슨은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수준은 이미 클래스 수준을 넘어섰지. 마법은 아직 초보일 테지만, 마나를 다루는 능력은 그 이상일 테지. 나는 자네를 아케인으로 추천했네.”
아케인? 여기까지는 플린도 말해 주지 않았다.
넬슨이 두 손으로 턱을 받치면서 말했다.
“아케인은 클래스가 아닐세. 전 클래스 과정을 마친 자들 중에서도 선택받은 이만이 속할 수 있는, 아카데미의 정예 그룹이지. 교수들 중에서도 일부만이 이 아케인에 속해 있다네.”
그렇단 말은 옵티컬 클래스를 넘어서는 것은 물론, 우리를 가르치는 교수들 이상이라는 것인가? 내가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해도 이건 너무나 빠른 승급이 아니던가?
나는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지 망설여졌다. 지나친 우대는 박대만 못 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면 그것은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넬슨은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자네가 진공검으로 안티 매직이 걸려 있는 강철 문을 날려 버렸을 때부터 그리하려고 생각했다네. 자네야말로 아케인에 걸맞는 인재지. 루비오 군, 아카데미의 아케인이 전부 마법사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아카데미에는 자네처럼 뛰어난 검의 달인들도 있다네. 그래야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일단은 감사하다고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이 말이 가장 무난했다. 무엇을 감사해하는 건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가 보여 준 호의에 감사하는지, 아니면 높게 평가해 준 것에 감사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는 넬슨을 향해서 한 가지 물음을 던졌다.
“제가 아케인이 된다면 강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넬슨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자네 좋을 대로 하게. 아케인은 클래스가 아니니까. 이대로 노멀 클래스에서 수업을 들어도 되고, 스페셜 클래스에서 수업을 받아도 된다네. 그것도 싫다면 하루 종일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해도 괜찮다네. 조만간 자네를 위한 연구실도 생길 걸세. 아케인은 다들 자기만의 공간이 있으니까.”
나만의 연구실? 그런 것은 과하다. 학생의 수준을 넘어서 교수처럼 보이게 된다면 사람들은 날 두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건 피하고 싶었다. 사실 가능하다면 아케인도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넬슨의 모든 호의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적의를 나타내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아카데미 수장에게 적의를 나타낸다는 것은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소극적으로 이것을 회피하려 했다.
“하지만 전 아직 마법이…….”
그러나 넬슨은 딱 잘라 말했다. 그는 내가 슬슬 꽁무니를 빼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방금도 이야기했지 않은가? 아카데미에는 여러 인재가 필요하다네. 마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으니까. 게다가 소드 익스퍼트라면 마나를 다룰 준비가 이미 되어 있는 셈이지. 자네가 검술에 지나치게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마법을 배우는 것은 금방일 걸세. 아참, 연구실과 아케인에 대한 제안은 공식으로 발표가 날 때까지 비밀일세. 지켜 주기 바라네.”
그는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었으니 발표를 기다리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방향을 우회했다.
“언제 발표가 나는 것입니까?”
“다음 아케인 정기 회의 때 정식으로 발표할 생각이네.”
“그렇다면 몇 달 연기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넬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기해 달라고?”
“한 달에서 두 달 정도로요. 자숙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독방에서 나오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수업을 듣고, 심지어 아케인까지 된다면 아자크 왕자나 다른 사람들을 자극하는 일이 될 겁니다. 그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넬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숙이라……. 자네가 아자크 왕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 테니, 염려하는 것은 역시 친구인 플린인가? 자네가 그렇게까지 신경을 쓴다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할 수는 없겠지. 그의 일이 마음에 걸린다면 그렇게 하게. 나는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자네의 생각을 존중하겠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자숙의 시간이 아니라 적응의 시간이었다.
페트리 교수의 수업 때처럼 넘겨짚어서 행동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가능한 한 빨리 이 세계에 대해서 알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자숙이라는 이유로 시간을 번 것이다. 몇 달 정도면 아주 익숙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 세계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수업이니 아케인이니 하는 것들은 이 세계에 적응한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나?”
“자숙 기간 동안 서고를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음……. 그 정도는 괜찮겠지.”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원하는 두 가지를 모두 얻어 낼 수 있었다.
지식을 쌓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직접 체험해 보고 그 결과를 얻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시간이란 한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읽었다.
무당파에서도 직접 접할 수 없는 무공은 책을 통해 해결했다. 화산파, 공동파, 심지어 소림사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학장실을 나온 뒤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교수 급으로 대접하겠다는 말인가? 이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야. 클래스 수업을 받는 교수라……. 다른 학생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지. 교수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넬슨 영감은 나를 시험하려 하는 것인가?”
학장실이 있는 별관을 나서자 익숙한 두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세실과 플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실, 플린.”
“루비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우린 친구잖아. 어떻게 되었어?”
그래, 친구. 세실과 플린은 내 친구구나.
세실과 플린이 번갈아 내게 물었다.
“계속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는 거야?”
“퇴…… 퇴학이나 정학 처분은 없는 거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었다.
“응, 일단 쫓겨나는 것은 면한 것 같아. 약간 자숙의 시간을 가지게 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업을 다시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아케인에 대한 내용을 빼놓았지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일로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자 세실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행이다.”
플린도 기뻐했다.
“잘됐어. 넬슨 학장님께서 현명한 판단을 해 주실 줄 알았어.”
세실이 플린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학장님은 현자의 위를 가지고 계신 분인데. 당연하지.”
현자라…….
이것은 또 뭘까?
이 세계에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 작은 아카데미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밖에는 없었다. 나는 좀 더 많은 것을 알아야만 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시간을 번 것이지만…….
나는 플린에게 말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자숙해야 할 것 같아.”
플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얼마나 긴 거야?”
“한 달, 아니 두 달쯤? 그래도 도서관은 이용할 수 있다니까. 거기서 공부를 하면 되겠지.”
세실이 말했다.
“도서관,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두 친구를 향해 말했다.
“우선은 쉬어야 할 것 같아.”
두 사람이 동시에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그래, 루비오. 가서 푹 쉬어.”
“루비오, 우리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깟 자숙이니 정학이니 그런 거, 빨리 끝내고 오라고…….”
나는 내 나이 또래 소년답게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 그래야지.”
***
자숙.
상급생에게 폭력을 휘두른 내게 내려진 또 하나의 처벌이었다.
하지만 난 기꺼이 그 처벌을 감수했다. 내가 원한 처벌이었기에.
낮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밤에는 방에서 연공을 했다.
잠을 자는 시간은 겨우 두세 시간. 하지만 용맥 덕분에 피곤함은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신중했다. 만일에 대비해 사흘에 한 번씩은 숙면을 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는 새로운 몸에 아직 완벽히 적응하지 못했다. 어떠한 지병을 가지고 있는지, 어떠한 부분에서 약한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무심코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집으려 했다가 헛손질을 한 적도 있었다. 몸에 익숙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나는 이 세계에 익숙해지는 것 못지않게 몸에도 익숙해져야 했다.
물론 한순간에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몇 달 안에는 가능해져야 했다.
처음 서고에 들어간 나는 압도적인 크기와 방대한 자료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무당파의 서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압도적인 규모였던 것이다.
아카데미의 것은 무엇이든 컸다. 대청도 방도 서고도 심지어 식당마저 컸다.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면서 책장 사이로 들어섰다. 이 세상을 내게 소개해 줄 책을 찾기 위해서…….
우선 두툼한 책은 피했다. 이런 책들은 보통 전문적인 지식을 담고 있었다. 내게 전문적인 지식은 필요 없었다.
토납법의 기본도 모르는 소년에게 자하신공이나 혼원일기공을 가르쳐 주는 것은 무의미했다. 연공의 기본을 알고 육맥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단전에 진기를 모으는 방법을 알고 나서야 자하신공이나 혼원일기공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나는 두툼한 책 대신 얇고 삽화가 많이 들어간 책을 골랐다. 그것들 중에서도 글자가 큰 것을 우선적으로 골라냈다.
글자가 큰 것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책이다.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지만,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은 어린아이와 같은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들이 읽는 책을 읽는 편이 나았다. 자신에게 정직하고 자신을 냉정히 바라보아야만 올바른 선택을 내릴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먼저 손에 든 책은 도량형에 관한 것이었다.
책의 제목은 ‘기준을 찾아서’였다. 작은 곰 두 마리가 세상을 여행하면서 여러 가지 기준에 대해서 설명하는 책이었다.
나는 이 책에 만족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이해가 쉬웠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뒤 모든 것을 이 세계 기준으로 맞췄다. 더 이상 시진이나 리와 같은 중원 말을 쓸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제도와 기준에 관한 책들은 상당히 많았다. 나는 며칠간 그것들에 몰두했다. 아카데미 학생이라면, 아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젊은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지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