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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10화)
4장 흑마법사(4)
어느 정도 도량형에 익숙해진 뒤에는 각 나라의 관습과 지리에 관한 책을 읽었다.
나는 책을 읽음으로써 이 세상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우선 세계는 다섯 개의 대륙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각 대륙에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나라들은 황제가 다스리며 제국이라 불렸다.
그다음으로는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었고, 공국이나 자유도시 등 영주가 다스리는 그 규모가 작은 나라들도 있었다. 종종 왕국에 버금가는 공국이나, 제국에 버금가는 왕국이 있기도 했지만 그건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 세계의 나라들은 대부분 귀족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자유 시민으로 구성된 나라라 해도 노예 계급이 있어서 실질적으로 귀족과 평민으로 구분된 사회나 마찬가지였다.
이 세계의 귀족들은 다음과 같은 작위를 나눠 가지고 있었다.
대공,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이 중에 왕족의 작위인 대공을 빼고는 공작이 가장 높았다.
다시 말해 왕족을 제외하고는 스웨인에서는 내 아버지가 가장 높은 작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플린이 나를 부러워한 것도 당연했다.
조국인 스웨인 왕국은 평범한 왕국이었다. 스웨인 왕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서 강하지도 약하지도, 작지도 크지도 않았다.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을 굳이 꼽자면 역사가 짧다는 것 정도였다.
나는 다른 왕국과 달리 스웨인 왕국에 대한 책은 3권을 읽었다. 고향인만큼 다른 나라들보다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웨인의 역사라는 책에 따르면, 몇 십 년 전만 해도 스웨인 왕국은 아주 작고 약한 나라였다고 했다. 게다가 왕가의 고귀함이나 역사마저 길지 않아 다른 나라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스웨인 왕국은 최근에 일어난 몇 차례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제법 많은 영토를 획득한 것은 물론이요 다른 나라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국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를 넘어서고 위협할 만큼 강해지지는 않았다. 스웨인 왕국은 전쟁을 할 때면 항상 다른 나라와 함께 싸웠고, 다른 나라와 같이 행동했기에 아직까지는 특출난 나라가 아니었다.
나는 스웨인 왕국을 이렇게 평가했다.
‘평범한 왕국이지만 기세는 있다.’
스웨인 왕국은 내가 미래를 펼칠 곳으로 나쁘지 않았다.
흠……. 스웨인 왕국은 최근 많은 전쟁에서 이겼다. 그렇단 말은, 전쟁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왕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왕 밑에 손자나 오자 같은 뛰어난 장군들이 있는 것인가?
나는 아자크 왕자의 아크바스 왕국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아크바스 왕국은 친구인 플린의 나라이기도 해서 더욱 관심이 갔다.
아크바스 왕국은 스웨인 왕국에 인접한 나라로 땅의 크기는 스웨인보다 약간 더 컸다. 하지만 그 역사만큼은 아크바스 왕국이 스웨인 왕국보다 훨씬 길고 오래되었다.
하나 스웨인 왕국이 최근 눈에 띄게 발전한 것과 달리 아크바스 왕국은 해가 갈수록 쇠퇴하고 있었다. 몰락한 귀족이 작위를 팔 정도였고 얼마 전부터는 지도층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아자크 왕자는 왕의 둘째 아들로 세 번째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 오만했던 것이었다. 그래도 세 번째이니 그가 왕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가 왕이 된다면 아크바스 왕국과 스웨인 왕국은 그 관계가 악화될지도 몰랐다. 아자크는 개인의 감정과 정치를 구별할 수 있을 만한 인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웨인 왕국과 아자크 왕자의 아크바스 왕국은 모두 중앙 대륙에 포함되어 있었다. 중앙 대륙은 다섯 개의 대륙 중 가장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 대륙이라 불렸다.
이 중앙 대륙의 패자는 아크바스 왕국이나 스웨인 왕국이 아니었다. 대륙의 패자는 황제가 통치하는 바이룬 제국이었다.
바이룬 제국은 다른 대륙의 제국들보다는 그 크기가 작았지만 그래도 제국답게 스웨인 왕국과 아크바스 왕국을 합한 정도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위치도 좋아 각종 물산이 풍부했다.
여기에 하나 더, 바이룬 제국의 황제는 명목상이지만 대륙의 다른 나라들에게 권고를 할 수 있었다. 오래전 이 중앙 대륙을 지배했던 바이룬 문명을 이어받은 적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권고에는 강제력이 없었다. 그래서 황제의 군대가 출병하기 힘든 변두리 국가에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래도 전통이 있는 나라들은 황제에게 반 발 정도 양보하는 미덕을 지키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책을 덮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여기서도 가장 높은 사람은 황제인가?”
간단한 요기를 한 후, 다시 계속해서 책을 읽어 내려갔다.
***
열흘쯤 지났을 무렵, 나는 간단한 상식을 넘어 역사와 법, 사상, 그리고 제도를 다룬 책에 도전했다.
쉬운 책만을 골라 읽었지만, 주제가 주제인지라 여기서부터는 하루에 한 권 읽기도 힘들었다. 며칠 동안 한 권을 읽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젠 쉬운 책을 찾기도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책을 읽었다. 이것들을 읽지 않으면 나는 이 세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엘라인 아카데미와 흑마법사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게 되었다. 이 부분은 아주 흥미로웠다.
엘라인 아카데미는 평소에는 마법을 연구하는 상아탑이었지만, 흑마법사가 출현하면 그들을 막기 위한 정예부대가 되어 선봉에 서게 되어 있었다.
책에 따르면 흑마법사란 악마와 직접 계약한 마법사를 뜻했다. 그들은 악마와 직접 계약했기 때문에 악마의 힘과 사악한 마음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했다.
어떤 책에는 흑마법사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흑마법사들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악마가 흑마법사에게 힘을 나눠 주는 대가로 세상의 멸망에 힘쓸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악마와 몬스터에 대한 책들도 읽었다. 하지만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몇 권을 읽고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세계의 방대한 지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처럼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한 달쯤 되었을까? 플린이 찾아와 내 자숙 기간이 해제되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속으로는 혀를 차고 있었다. 아직 읽을 책이 많았다. 겨우 한 달 만에 자숙 기간이 풀리는 것은 내가 바란 일이 아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법사나 검법, 그리고 군대에 관련된 책을 찾아 읽었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세 가지를 전문적으로 다룬 책은 읽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서 소드 마스터와 소드 익스퍼트, 마법사와 대마법사, 그리고 현자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우선 소드 마스터는 아우라를 사용하는 검의 달인으로 평범한 기사와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출현 비율이 현격하게 낮아 제국이라 해도 소드 마스터는 몇 명 되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소드 마스터는 재능과 노력을 동시에 겸비해야 오를 수 있는 경지라고 적혀 있었다.
넬슨 영감이 언급했던 소드 익스퍼트는 소드 마스터가 되기 전의 단계였다. 소드 익스퍼트는 검에 아우라를 담을 수 있는 수준을 말했다.
물론 소드 마스터와 소드 익스퍼트는 검이 아닌 주먹이나 어깨에도 아우라를 담을 수 있었다.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기사는 제법 많았지만 그래도 일반 기사와 비교해 보면 백 명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기사들은 미약한 아우라를 사용하거나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 뿐이었다. 이 세계에서 내력을 다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내가 살던 곳에서도 깊은 내공을 쌓은 무림인은 드물었다. 소드 마스터나 소드 익스퍼트가 드문 것은 전혀 의외가 아니었다.
넬슨 영감이 날 소드 익스퍼트로 지목할 수 있었던 것은 소드 익스퍼트가 주먹이나 어깨 혹은 검에 마나를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험이 많은 노인이었기에 흑마법사라고 소리친 선도위원들보다 훨씬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법사는 마법을 사용하되 일정 수준의 마법 아카데미를 졸업한 자를 말했다. 엘라인 아카데미에서도 옵티컬 클래스 이상을 수료하면 마법사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마법 아카데미를 수료하지 못한 마법사는 수습 마법사나 견습 마법사란 이름으로 불리곤 했다.
마법사의 존칭으로는 대마법사와 현자가 있었다. 이 중 대마법사는 뛰어난 마법사에게 형식적으로 붙여지는 칭호로 그 기준이 일정치 않았다. 쉽게 말해 대마법사란 칭호는 사람들이 좀 더 대단한 마법사를 호칭하거나 마법사에게 아첨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현자는 대마법사와 달리 황제나 왕이 뛰어난 마법사에게 직접 내리는 칭호였다.
엘라인 아카데미의 학장 넬슨은 바이룬 제국의 황제에게서 직접 현자의 칭호를 받았다고 했다. 역시 아카데미의 학장답다고 해야 할까?
그는 황제에게 칭호를 받았기 때문에 ‘제국의 현자’란 존칭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의 현자라……. 그는 어느 정도의 솜씨를 지니고 있을까?”
나는 책을 읽음으로써 이곳 사람들이 내공이 아닌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대지와 바람, 그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정기를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마나라 불렀다.
뛰어난 마법사는 마나를 이용해 얼음과 바람, 그리고 벼락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내가 지하실에서 보았던 빛도 마나를 이용한 마법이었던 것이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주문과 마도구가 필요했다. 마도구는 마나를 담을 수 있는 수정구가 박힌 지팡이나 막대, 또는 오브 등을 말했다.
나는 책을 읽고 나서야 페트리 교수가 내게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마법 입문이라는 책을 읽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쉬웠지만 내일부터는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어느 정도 아카데미 지리도 익숙해졌고, 내일부터는 문제없겠지.”
나는 도서관을 나오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