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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12화)
5장 선도위원회(2)


바닥에 쓰러진 상급생들이 소리쳤다.
“아앗.”
“윽!”
“옆구리가…….”
“크윽! 나는 어깨야.”
여래팔권은 주먹으로 직접 상대를 강타하는 것이 아니라 주먹에 실린 기운으로 상대를 밀어내는 권법이었다.
여래팔권이 주먹으로 직접 상대를 치지 않고 밀어내는 이유는 단 하나.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여래팔권은 소림사에서 만들어지고 소림 승려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지극이 온유한 권법이 되고 말았다.
내가 무당파의 태극권이나 양의신장이 아닌 여래팔권을 사용한 것은, 가능한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급생들 중 하나라도 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게 된다면 난 넬슨 영감과 다시 재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내가 여래팔권에 사용한 공력은 이할. 자칫 잘못하면 상대를 밀어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상처 입히지 않으려면 이 정도 공력으로 여래팔권을 해내야 했다.
이렇게까지 했다면 상급생들도 내 고뇌를 조금은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식판을 들어 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님들, 더 흉한 꼴을 보기 전에 그만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다른 학년 선후배들이 보고 있습니다.”
상급생들은 분한 얼굴을 했지만 방금 전처럼 달려들지는 못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내가 자신들보다 강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상처 입은 맹수처럼 낮게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그래, 으르렁거리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었다.
“루비오, 이 녀석…….”
“언젠가 빚을 갚아 주마.”
나는 식당을 빠져나가면서 왼손을 들었다.
“아카데미 밖에서는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그러나 아카데미에서는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상급생들은 한 명도 나를 따라 나오지 않았다.

***

“루비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누군가 나를 불렀다.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부른 것은 아미색 머리카락의 소년이었다. 그는 나보다 키가 작았다.
흠……. 시비를 거는 상급생은 아닌 건가?
그가 말했다.
“나는 스페셜 클래스의 아도니스 포일이야. 학년은 루비오와 같아.”
스페셜 클래스? 마법에 재능이 있는 학생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상급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조그만 소년이 스페셜 클래스라고?
훗! 나도 한심하군. 사람은 그 겉모습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법인데 말이야.
포일이 말했다.
“방금 마나를 사용한 것이지?”
나는 침묵했다.
그러자 포일이 계속해서 말했다.
“대답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함부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학칙에 위반되는 일이야. 루비오도 아카데미의 학칙은 잘 알고 있겠지?”
말이 꽤 많은 친구군.
나는 그에게 말했다.
“무슨 용건인지 짧고 간결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의 미소를 가식적이라고 평한 것은 나이에 맞는 미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루비오에게 뭔가 충고를 하려고 온 건 아니야.”
그럼 무엇하러 나타난 건가? 아자크 왕자처럼 날 괴롭히려고? 학칙까지 운운하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나는 시간이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니야. 용건을 밝히기 싫다면 이만 사양하겠어.”
내가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가 재빨리 따라붙으면서 말했다.
“오늘 수업이 끝나고 선도위원회 사무실로 와 줬으면 좋겠어.”
“선도위원회 사무실?”
“선도부 위원장의 호출이야. 학칙에 따르면 루비오는 이번 부름에 응하는 것이 옳아.”
이 친구는 입에 학칙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다니는 건가? 아니면 학칙이라는 말로 강요하길 좋아하는 건가?
나는 걸음을 멈췄다.
“내가 가지 않는다면?”
“학칙에 따라 선도위원회 차원에서 다시 호출을 하게 되겠지. 그것도 거부하면 학생회로 넘겨지겠고, 그것도 무시한다면…….”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좋아. 가도록 하지.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럼 기다리겠어.”
내가 승낙하자 포일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아마도 포일은 선도위원회에 속한 학생인 것 같았다.
무능하기만 한 선도위원의 한 사람이란 말이군.
수업이 끝나자 나는 선도위원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물론 위치를 몰랐기 때문에 문 앞까지는 플린과 함께했다.
선도위원회 사무실은 아카데미의 다른 곳과 달리 크지 않았다. 물론 작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아카데미의 다른 곳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평범한 것이 오히려 작게 느껴졌다.
사무실 안에는 책상 두 개가 달랑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포일이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왔구나, 루비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는 왼쪽의 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부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어.”
그렇군. 이 작은 방이 선도위원회 사무실의 전부는 아니란 말이군.
나는 포일이 가리킨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뭐하자는 거지?
방 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높은 톤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흘러나왔다.
“루비오, 왔으면 안으로 들어오지.”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반가운 얼굴은 아니군요.”
“나도 마찬가지야.”
안에는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둘 중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바로 아자크 왕자였다.
나는 그를 보는 순간 불쾌한 감정에 휩싸였다. 왜 그가 여기 있는 것인가? 나는 가능하면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도 내가 탐탁지 않은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루비오, 거기 앉도록.”
아자크 왕자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내게 자리를 권했다.
아자크 왕자의 의자와 내 의자는 그녀의 책상 앞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의자에 앉았다.
내가 앉자마자 소녀가 말했다.
“아자크, 루비오, 두 사람은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음성은 높았다. 화가 나 있는 것이다.
아자크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레시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소녀의 이름은 그레시아군.
그레시아가 아자크를 쏘아보면서 말했다.
“말버릇이 형편없군. 선배를 존경할 줄도 모르는 건가? 그러니까 후배에게 무시를 당하는 거지.”
아자크가 발끈했다.
“뭐라고?”
“아자크, 왕자 놀이는 작작해. 여긴 왕궁이 아니야. 그러고 나는 오늘 두 사람을 화해시키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야.”
그녀는 아자크의 분노를 사전에 제압했다. 아자크는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더 이상 반항하지 못했다.
흠……. 외모는 평범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는 건가? 아자크 왕자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걸 보면 그녀의 신분이 낮지는 않은 것 같군.
그레시아는 세실처럼 생기 있거나 유피아나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을 압박하는 뭔가가 있었다. 이건 또래의 여자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아자크가 빈정대며 말했다.
“여길 바이룬의 황궁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누군데? 쳇!”
황궁? 그레시아는 황녀인가?
그레시아가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두 사람, 오늘 식당에서 싸웠다지?”
나는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렸다.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레시아가 책상을 탁 하고 치면서 말했다.
“너희 두 사람은 선도위원들을 무시하고 있어. 너희들이 마음 내키는 대로 힘을 쓰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주변 사람들에게 해가 된단 말이야.”
그레시아가 아자크에게 말했다.
“아자크, 하급생을 괴롭혔다지?”
아자크는 침묵했다.
그러자 그레시아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여기가 아크바스 왕국인 줄 알아? 여긴 아카데미야! 이곳에 왕자가 너뿐인 줄 알아? 아자크, 우린 마법과 현자의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 이곳에 온 거란 말이야. 왕자 놀이를 하려면 본국으로 돌아가! 그곳이라면 얼마든지 왕자 놀이를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녀에게 어떤 권한이 있는 건가? 왜 아자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건가?
이윽고 그녀는 얼굴을 내게 돌렸다.
“루비오, 루비오도 적당히 하지. 왜 상급생들이 루비오를 괴롭히는지 알아?”
나는 짧게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바로 그 태도 때문이야!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루비오의 눈은 너희들은 나보다 한참 어려라고 말하고 있어. 상급생들은 그런 눈을 참을 수 없단 말이야. 루비오는 아카데미의 학생이고 하급생이야. 그럼 상급생들에게 예의를 차려야 하는 것 아니야? 여기서 공작 위나 백작 위는 무의미해! 우리는 학생이니까.”
흠……. 그게 사실인데 어떻게 하겠어. 나는 어린 소년이 아니란 말이야. 하지만 그것을 정확히 읽어 내다니 평범한 소녀는 아닌 모양이군.
그레시아가 깊은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선도부 위원장으로서 두 사람에게 자숙을 권고하겠어.”
또 자숙인가?
나란 녀석은 불량해지고 말았군. 자숙 기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자숙을 선고받다니.
그레시아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또 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입으로만 하는 자숙이 아니라, 진짜 자숙을 권고하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숙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누가 나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나서지 않는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아자크 차례였다. 그녀는 아자크에게 말했다.
“아자크, 아카데미에는 많은 왕족과 귀족 들이 있어. 그들은 각자 나라를 대표하고 있지. 아자크도 마찬가지야. 아자크는 아자크 혼자가 아닌 아크바스 왕국이란 말이야. 다시 말해서 아자크의 실책은 아크바스의 실책이 되고, 다른 나라의 귀족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그것을 전할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아크바스 왕국이 놀림거리가 된단 말이야. 바로 아자크 너 때문에! 그러니까 행동을 할 때 좀 더 신중해지란 말이야. 부모님과 형의 얼굴을 부끄럽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아자크가 낮게 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사고를 치지 않으면 될 것 아니야.”
“그런 식이니까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거잖아. 진중하게 말을 해 보란 말이야.”
아자크가 불같은 성질을 억누르며 느릿하게 말했다.
“자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레시아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오늘 내가 한 말 잊지 마. 이곳은 귀족들의 놀이터가 아니야. 마법을 배우기 위한 아카데미란 말이야. 그게 못마땅하다면 돌아가도록 해.”
여걸이군.
나는 그녀를 이렇게 평가했다.
하지만 아자크가 그녀 앞에서 꼼짝 못 하는 것은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자크의 평소 행동으로 미뤄 볼 때 선도부 위원장이라고 해서 그가 이렇게 고분고분해질 리는 없었다.
뭔가 두 사람 사이에 내가 알지 못하는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흠…….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 그녀의 말로 아자크가 잠잠해진다면 그걸로 족하니까.
나와 아자크는 선도위원회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서로 등을 돌렸다.
나도 아자크도 작별 인사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그레시아가 이 모습을 봤다면 다시 한 소리를 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