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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13화)
6장 암살자(1)


도서관과 작별을 고한 줄 알았는데, 다시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상식이 아닌 전문 지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어제는 그레시아와 아자크 왕자 덕분에 방과 후 시간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지만, 오늘부터는 집중해서 공부할 생각이었다.
“마법…… 마법…… 기초부터 모두 머릿속에 넣겠다.”
나는 오후 강의가 끝나자마자 도서관으로 달려왔다. 그러고는 마법 기본서를 펼쳤다.
마법, 마나, 정령, 변환, 주문, 정신 탐구, 고대의 룬 문자…….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예상외로 많은 것이 필요했다.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얕본 건가……. 후…….”
나는 저녁 식사를 건너뛰고도 기본서를 반에 반도 읽지 못했다.
마법에서 마나를 모으는 원리는 토납법과 유사했지만 그것을 응용하는 방법과 축적하는 방법이 완전히 달랐다.
페트리 교수의 말대로 내겐 기술적인 부분이 심각하게 모자랐다.
“이거 하루아침에 채워질 부분이 아닌걸?”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책을 덮었다.
톱니바퀴로 작동되는 거대한 시계가 텅 하고 시간이 바뀜을 알렸다. 어느새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아카데미의 도서관은 아침 6시에 시작해서 저녁 10시에 문을 닫았다.
시계를 보니 9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문을 닫을 시간이 된 건가?”
다들 숙소로 돌아간 탓인지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학기 중반에 접어들었지만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이것을 이상하게 여겨 세실에게 물어보았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왜 저녁 늦게까지 공부하지 않는 거지?”
세실은 이렇게 대답했다.
“늦게까지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페셜 클래스 이상이야. 그들에게는 따로 연구실이 주어져. 물론 혼자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그들이 도서관에 갈 때는 책을 빌릴 때밖에 없을 거야.”
넬슨 영감이 내게 준다는 연구실도 이런 곳들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다.
막 도서관을 나왔을 때였다.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친근한 감각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감각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살기였다.
이 세계에서도 살기를 내뿜는 자가 있다니.
나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앞으로 크게 뛰었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다시 한 번 도약했다.
무당파의 비전절기인 제운종이었다.
거리를 벌리자 자연스럽게 상대의 공격이 빗나가고 말았다.
“이럴 수가…….”
당황한 상대는 뒤로 몸을 뺐다.
나는 그를 추격했다.
“도망치게 놔둘 것 같으냐?”
지난 몇 주간의 수련으로 나는 예문의 경지를 넘는데 성공했다. 나는 이미 무극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어설픈 실력으로는 내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었다.
예상한 것보다 상대의 몸놀림이 재빨랐다. 우리 두 사람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물론 경공을 전개했다면 그를 쉽게 따라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는 거리를 두고 천천히 그를 추격했다. 이렇게 추격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동료나 배후에게 날 안내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누가 날 등 뒤에서 찌른 것일까? 날 미워하는 상급생들? 그러기에는 미심쩍은 것이 많았다. 일단 상대는 살기를 내뿜었다. 이는 평범한 실력을 가진 상대가 아니란 이야기다. 내게 시비를 걸었던 상급생들 중에는 저런 실력자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전문적으로 무공을 수련한 암살자.
상대는 호리호리한 몸이었다. 키는 나보다 작았다. 그렇다면 날렵하고 빠른 타입인가? 이쪽이 암살자로서는 적격이겠지.
암살자라는 생각이 들자 상대를 봐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를 뒤쫓기보다는 사로잡아 모든 것을 실토하게 만드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나는 허공을 격하고 일 장을 날렸다. 벽공장의 수법으로 상대를 내리친 것이다.
“큭!”
무형의 일격에 맞은 상대가 주춤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 정원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번 벽공장에는 삼 할의 공력이 실려 있었다. 어느 정도 내공을 쌓은 자라고 해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쓰러지는 대신 일어나 달렸다. 옷 안에 뭔가를 껴입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경공을 전개해 그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급격히 좁혀지고 있었다.
곧 열 발자국 안으로 그를 따라잡았다. 그러자 그가 위기를 느꼈는지 손에 들고 있던 비수를 던졌다.
이런 공격은 익숙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상대의 암기를 쳐냈다. 암기에 독이 발라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벽공장의 수법을 다시 한 번 펼쳤다.
벽공장에 맞은 비수는 라일락 꽃이 만발한 화원으로 튕겨져 나갔다.
강호의 추격전은 보통 이와 같았다. 단순히 서로 뛰기만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도망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추격하는 사람을 떼어 놓길 바랐다.
그래서 암기를 날리는가 하면 미리 준비해 둔 함정으로 상대를 유도하기도 했다.
나는 고함을 내지르면서 상대를 압박했다.
“멈춰라.”
아카데미의 정원은 두 사람이 한참을 뛰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대체 왜 이렇게 크게 정원을 만들어 놓은 것일까? 담장이 나왔다면 벌써 잡았을 텐데 말이야.
내가 다가서자 그가 재빨리 장미 정원으로 돌진했다.
“저긴…….”
나는 미간을 좁혔다. 장미 정원은 이곳에서 가장 복잡한 곳이었다. 장미 정원 안에는 갈림길이 너무 많아 나 같은 사람은 자칫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저기서 날 따돌리겠다는 건가?”
난 정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그를 잡으려 했다. 그래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간발의 차이로 놓쳐 버리고 말았다.
나는 혀를 찼다.
“쳇! 할 수 없지.”
나는 장미 정원 앞에서 발을 멈췄다. 아직 이런 복잡한 길은 익숙하지 않았다.
“이걸로 날 따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정원의 길을 모른다고 해도 내게는 다른 방법이 있었다.
나는 내력을 두 다리에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있는 힘을 다해서 뛰었다.
무당 제운종에서도 가장 난해한 운상천의 수법을 펼친 것이다.
허공을 박차고 잇달아 두 번을 뛰어오르자 몸이 30피트(=9m) 이상 뛰어올랐다.
자객은 정원 북쪽을 돌아 나가고 있었다.
“좋아! 저기군.”
나는 몸이 바닥에 닿기 전에 다시 한 번 경공을 전개했다. 그리고는 장미 위로 올라섰다.
초상비.
풀 위를 밟고 뛴다는 최고의 경공. 일반적인 경공술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경지였다. 수상비를 제외하면 이 초상비가 최고였다.
하지만 내가 펼치고 있는 것은 초상비가 아니었다. 초상비는 가녀린 풀을 밟고 뛰는 것이었지만, 나는 풀이 아닌 장미의 가지를 밟고 뛰었다.
이는 작은 차이 같지만 기실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초상비를 이루려면 적어도 심안, 아니 현경 이상의 경지가 필요했다.
어쨌거나 나는 상대가 상상하지 못하는 속도로 경공을 전개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내가 앞에 나타나자 크게 놀랐다.
“어…… 어떻게?”
“어떻게 나타났냐고? 초상비라고 들어 본 적이 있을까 모르겠군.”
“초…… 초상비?”
상대는 맨손이었다. 들고 있던 비수도 이미 던져 버린 다음이었다.
나는 가볍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도망칠 곳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러자 자객이 허리띠에서 검을 빼 들었다.
허리띠에 검을 숨기고 있었다니, 상대는 생각보다 준비가 철저했다.
“널 죽이면 끝이다.”
허리띠 안에서 나온 검이 뱀처럼 휘어졌다.
“용검인가?”
나는 검을 피하면서 허공을 격했다.
그러자 상대의 몸이 뒤로 밀렸다.
“애석하군. 서툰 솜씨야.”
자객의 몸놀림은 제법이었지만 무극의 경지에 이른 내 상대는 아니었다.
그가 기합과 함께 날 노렸다.
“이얍!”
내겐 여유가 있었다. 나는 용검을 흘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허리띠에 검을 숨겨 두다니 제법이군. 하지만 그 정도로는 힘들지.”
내가 앞으로 다가가자 자객은 급히 검을 좌우로 휘두르면서 몸을 보호했다.
그러자 자객의 검에 맞은 장미꽃이 휘날렸다.
나는 앞으로 한 발 더 다가가 그의 검세 안에 손을 넣었다. 어두웠지만 달빛에 검신이 비쳐 움직임을 충분히 상대의 검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상대의 손목을 틀어잡은 뒤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용검이 떨어졌다.
“아앗!”
그러고 그와 동시에 허리의 혈도를 찍었다. 이는 다리를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제 도망칠 수 없다.”
나는 손을 뻗어 자객의 두건을 벗겼다. 그러자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의 청아한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세실!”
자객은 다름 아닌 세실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내…… 내 친구가 아니었던가?
나는 그녀에게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었다. 그녀의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 사이, 그녀가 뭔가를 삼키려 했다.
나는 재빨리 손을 써서 그녀의 혈도를 찍은 뒤 등을 가볍게 쳤다.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가던 것이 다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컥!”
엄격한 수련을 받은 살수들은 임무가 실패할 시 의뢰인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곤 했다.
세실의 경우도 그런 듯싶었다.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검은 환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세실, 죽을 필요까지는 없잖아?”
세실이 날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루비오, 네가 이런 실력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썼을 텐데. 아쉽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두 곳의 혈도를 더 찍었다. 그녀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한 것이다.
“왜 날 죽이려 했냐고 묻는다면 어리석은 질문이겠지? 날 죽이려 한 것은 네가 아니고 다른 사람일 테니까. 묻겠다. 누가 날 죽이라고 한 것이지?”
“…….”
세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잘 훈련된 살수였다. 쉽게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면 말하게 만드는 수밖에…….’
나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무슨 짓이야?”
세실의 몸은 무겁지 않았다. 가녀린 그녀의 몸이 무거울 리가 없었다.
“장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어.”
“장소를 옮긴다고? 설마…….”
그녀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살수들이 암살에 실패한 후 자결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의뢰인에 대한 보호였고, 둘째는 이어질 고문에 대한 회피였다.
대부분의 경우 참혹한 고문은 어떤 죽음보다도 견디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