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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14화)
6장 암살자(2)


끼익―.
두터운 철문이 닫혔다.
나는 이곳이 낯설지 않았다. 이곳은 내가 얼마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나는 잠시 찍어 두었던 세실의 아혈을 풀었다.
그러자 그녀가 날 향해 말했다.
“어떻게 이곳의 열쇠를 얻은 거지? 플린인가?”
“그래, 플린이야.”
그녀의 예상대로 나는 플린으로부터 지하실의 열쇠를 얻었다. 선도위원인 플린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절친한 친구인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차가운 바닥에 세실을 눕혔다.
“혀를 깨물려 해도 소용없어. 미리 안능혈을 눌러 놨거든. 피가 날 만큼 세게 깨물 수는 없을 거야.”
세실이 미간을 좁혔다.
“루비오, 철저하구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적이 많은 편이니까.”
세실이 말했다.
“날 죽여.”
“내가 어떻게 세실을 죽일 수 있겠어?”
“실패한 암살자에게는 죽음이 어울리는 법!”
그녀는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푸른 눈동자는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숨소리도 빨라졌다. 내게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야 말을 할까?’
나는 턱을 매만지면서 그녀 앞에 섰다.
“세실, 우린 친구잖아. 솔직하게 말해 주면 안 될까?”
세실이 대답했다.
“네가 조금이라도 날 친구라고 생각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날 죽여.”
“세실이 꼭 죽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조조에게 사로잡힌 장료는 주인을 바꾼 뒤, 합비에서 큰 공을 세웠어. 세실도 그렇게 될 수 있단 말이야.”
내가 말을 해 놓고도 참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그녀가 조조가 누군지 장료가 누군지 알 턱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지금과 상황도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난 이런 경우에 약했다.
역시나 세실이 말했다.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한심한 남자인걸. 죽어야 할 때 죽을 수 있어야 남자인 거야.”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세실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잖아.”
“…….”
나는 그녀의 윗옷을 벗겼다. 예상대로 그녀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이것 때문에 내 벽공장을 맞고도 계속 뛸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갑옷을 벗겨 내면서 말했다.
“단단히도 준비했네. 철저한 건 나만이 아니었어.”
내가 갑옷을 벗기자 그녀가 움찔하면서 말했다.
“그…… 그만둬, 루비오.”
난 그녀를 죽이거나 해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 행동에 겁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몸에서 손을 뗐다. 나는 그녀를 잃는 것이 두려웠다. 그녀를 잃게 되면 내겐 플린밖에는 남지 않는다.
나는 이미 그녀의 미소와 맑은 눈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거짓이 없었다.
나는 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세실 겁낼 필요 없어.”
“그래, 겁낼 필요 없지. 루…… 루비오가 날 고문하고 죽이려 해도 난 겁내지 않아. 난 루비오를 원망하지 않아. 내가 먼저 루비오를 죽이려 했으니까. 내가 루비오의 목숨을 노렸으니까. 내가 먼저 잘못한 거니까.”
나는 세실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두드리면서 말했다.
“바보. 내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잖아. 섭섭해. 날 그런 식으로 보다니.”
“루비오는…… 날…… 날 죽이지 않는 거야?”
“전후 사정도 듣지 않은 채 마구 사람을 죽일 수는 없잖아. 세실에게 뭔가 사정이 있을 거 아니야. 난 세실을 알아. 단순히 돈이나 원한 때문에 날 죽이려 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야. 세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세실의 눈에는 진실이 있단 말이야.”
세실이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루비오를 죽이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하지만 할 수밖에 없었어.”
“세실, 말해 줘. 왜 날 죽이려 한 거야?”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었다.
“말할 수 없어. 루비오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란 것이 있잖아.”
“비밀이라……. 그래, 누구에게나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있는 법이지. 내게도 비밀이 있고. 하지만 이번에는 꼭 들어야겠어. 말해 줘. 왜 날 죽이려 한 거야?”
“제발…… 날 괴롭게 하지 말고, 죽여줘 루비오.”
“세실은 바보야.”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스승님은 내가 강호에 나가기 전에 한 가지 비기를 전수해 주셨다. 이것은 뛰어난 무공도 무시무시한 술법도 아니었다. 이것은 단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기맥판단술.
기맥판단술은 기맥의 움직임을 통해 상대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아내는 비술이었다.
원래 기맥판단술은 무당파가 아닌 황궁에서 만들어진 비기였다. 그러던 것이 몇몇 황궁 위사들에 의해 강호에 비밀리에 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무당파는 제자들에게 이 비술을 쉽게 전수하지 않았다. 원래 무당파의 무공이 아닌데다가 여러모로 악용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맥판단술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것은 심오한 내력이나 초식이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상대의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과 경험이었다.
나는 세실의 심맥에 진기를 밀어 넣었다. 이렇게 진기를 밀어 넣으면 혈의 움직임이 활발해져 감정의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시술자는 그 움직임을 통해 상대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오른 손목을 잡고 물었다.
“아자크 왕자의 짓은 아니지?”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아자크 왕자가 사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자크 왕자의 이름을 말했지만 그녀의 기맥은 변화가 없었다. 다시 말해 아자크 왕자는 이 일과 상관없는 인물이었다.
“휴……. 그렇다면 두 선도위원 중 하나인가?”
그녀의 심맥은 빨라졌지만 여전히 같은 속도로 뛰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둘도 아니었다.
세실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루비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날 죽여. 그게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일이 될 거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어. 난 세실을 친구라 생각하고 있단 말이야. 어떻게 친구를 죽인단 말이야. 세실이 날 죽이려 한 것도 진심은 아니었잖아.”
“루비오. 넌…… 잔인하구나. 날 어떻게 하려는 거지?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 작정인 거야? 난 널 죽이려 했어.”
그녀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난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녀석이 아니었다.
“세실이 말을 해 준다면 좋겠지만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날 고문할 거야?”
나는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잔인한 고문과 모욕, 그리고 이어지는 참혹한 죽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가 비록 날 죽이려 했던 살수라 해도 말이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세실을 고문할 수 있겠어? 단지…… 단지 다른 방법으로 알아낼 뿐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세실은 살수지? 그것도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그…… 그건…….”
내 질문은 정확히 그녀의 마음을 꿰뚫었다. 그녀의 심맥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이 내 질문에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살수란 의뢰인에게 살인을 청부받지. 살기는 세실의 본심이 아니었을 거야. 날 죽이란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 했던 것이지.”
세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니야. 난 루비오를 죽이려 했어. 진심으로 말이야.”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날 죽이려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속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진심으로 그랬다고? 나는 믿을 수가 없는걸.”
“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차갑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살수야. 암살단의 일원이란 말이야.”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세실, 사람을 죽인 적이 있어?”
세실은 흐르는 눈물을 참으면서 말했다.
“나는 많이 죽였어. 아주 많이. 그래, 난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 루비오…… 망설이지 말고 어서 날 죽여.”
거짓말.
나는 그녀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주 많은 사람을 죽이긴커녕 한 사람도 죽인 적이 없었다.
“세실의 실력은 어설퍼. 검에 살기가 담겨 있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건 사람을 죽이기에는 너무나 옅었어. 세실의 검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검이 아니야. 쉽게 말해 물렀다고 할까?”
“내…… 내가 물렀다고?”
“그래, 습격에 실패했다고 바로 도망가는 자객이 어디 있어? 바로 다음 수법을 펼쳤어야지. 세실은 검을 내민 뒤 이내 후회한 거야. 자신의 행동을…… 친구를 죽이려 했던 자신을 말이야.”
세실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루…… 루비오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거지? 그러면서도 루비오는 나를 친구로 대한 거지? 그런 거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건 아니었다. 난 세실이 자객이란 사실을 지금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
“세실, 나는 지금 화가 나 있어.”
그러자 세실이 울먹였다.
“미안해……. 미안해 루비오……. 루비오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해. 나…… 나 루비오를 좋아했는데. 나 죽이고 싶지 않았어. 루비오를 죽일 수 없었어. 미안해……. 나…… 루비오를 죽인 다음에…… 다음에…… 나도 죽을 생각이었어.”
나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면서 말했다.
“바보같이……. 죽긴 왜 죽어. 나를 화나게 한 것은 세실이 아니야. 세실에게 이런 일을 시킨 사람이지. 세실은 살수가 될 만큼 악하지 못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악인이 될 수 있겠어. 악인은 세실처럼 맑은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아.”
세실이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내 눈을 보지 마. 난 형편없는 암살자야. 한심해서…… 한심해서 루비오처럼 힘없는 소년밖에는 죽일 수 없었어. 그래, 이게 내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였어.”
진실.
이것은 진실이었다. 그녀에게 루비오는 첫 번째 살인 대상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녀는 살인 집단에서 가장 인정을 받지 못한 살수였을 것이다. 기술이 모자란다기보다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그녀는 살수라고 하기에는 다른 사람을 죽이려는 마음이 옅었다. 이래서는 솜씨 좋은 살수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살인 집단의 우두머리는 그녀에게 아주 손쉬운 상대를 맡겼을 것이다. 사람을 죽여 선함을 지울 수 있도록 말이다.
아카데미에서 마법을 공부하는 공작가의 소공자. 별로 대단할 것이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소공자는 우두머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강적 중의 강적이었다.
“세실, 아니 세실을 조종하는 사람에게 암살을 의뢰할 정도라면 상당한 재력을 쌓은 사람이겠지? 그리고…… 그 사람은 아마도 내가 이곳에 입학할 때부터 날 죽이려고 했겠지? 그렇다면 의뢰인은 이 아카데미 사람이 아닐 거야.”
“미안해……. 말할 수 없어. 난 비밀을 지킬 것을 모두에게 맹세했어.”
“세실은 말을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으니까.”
나는 세실에게 얻은 정보를 통해 용의자를 줄여 나갔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재력과 악의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공작 부인.”
“…….”
그녀의 맥이 심하게 뛰었다. 내 말에 반응한 것이다.
“그분이지?”
세실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아…… 아니야.”
거짓말이었다.
내 말은 정답이었던 것이다. 날 죽이려 했던 것은 계모인 공작 부인이었다.
나는 힘들게 말을 내뱉었다.
“어머니가 아들을 죽이려 한 것이군.”
“아니야!”
세실의 맥이 갑자기 느려졌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그런 건가?”
나는 세실에게 밀어 넣었던 내력을 거두곤 손을 놓았다.
“세실, 언제부터 날 죽이려고 한 거야?”
세실이 다시 울먹였다.
“처…… 처음부터…….”
“그런데 왜 죽이지 못했지?”
“난 루비오를 죽일 수 없었어. 그래서 핑계를 댔고……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어.”
나는 그녀의 혈도를 풀면서 말했다.
“갑자기 손을 쓰게 된 것은 아마도…… 최근에 누군가가 세실에게 다시 명령했겠지.”
“어떻게…… 그것을…….”
나는 쓰디쓰게 웃었다.
“흔한 일이잖아. 네 두 손에 우리 조직의 명예가 달려 있다.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조직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된다. 그러니 네가 못 한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겠다.”
혈도가 풀렸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망치지도 날 향해 달려들지도 않았다.
어떤 짓을 해도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살수들은 보통 집단을 이룬다. 집단을 이루는 것이 일을 하는데 여러모로 편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세실같이 어린 소녀가 단독으로 살수행을 하는 일은 없었다. 살수란 사람을 죽이기 전에 의뢰를 받아야 하는데 세실 같은 소녀는 그것이 힘들었다. 그녀가 살수 집단에 속해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