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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17화)
7장 독에는 독(2)
며칠 뒤 나는 메디세를 다시 만났다.
식당 입구에서 마주쳤는데. 그는 우연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가 이 만남을 의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초조한 표정은 진짜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못 이기는 척 말했다.
“경기를 뛰는 것뿐이라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메디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는 감격했는지 내 어깨에 손을 올린 뒤 힘을 주었다.
“루비오, 부탁해. 꼭 와 줘. 기다릴게.”
그는 환하게 미소를 지은 후, 뒤쪽에 선 소년들에게 말했다.
“루비오가 뛰어 주기로 했어.”
소년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잘되었습니다.”
“이제 걱정이 없겠군요.”
소년들은 아마 메디세가 리더로 있는 스웨인 다이니 클럽 회원들일 것이다.
나는 메디세에게 시합 날짜를 물었다. 말은 그저 서 있기만 해도 된다고 했지만, 어느 정도는 해 줘야 할 테니까 그 준비를 해 두려 한 것이었다.
메디세가 말했다.
“시합은 2주 후 토요일이야. 다들 수업을 쉬는 날이지.”
2주 후 토요일이라고? 그렇다면 부상당한 선수가 회복되고도 남을 시간이군.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였다.
메디세는 참으로 뻔뻔한 소년이었다. 물론 뻔뻔한 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때론 이 뻔뻔함이 큰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전적으로 내 취향의 문제일 것이다. 나는 뻔뻔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조용하면서도 착실하고 우직한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유피아나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 그녀의 숙소로 향했다. 그녀는 세실을 지키기 위해 계속 자신의 방에 머물고 있었다. 심지어 내가 교대해 주지 않으면 방을 나오지도 않았다.
내가 방문을 열자 유피아나 선생이 의자에 털썩 앉으면서 말했다.
“루비오 군, 정말 손을 쓰기나 한 거야?”
“또 습격이 있었습니까?”
“아직은 없었지만, 이건 뭔가 결과가 없잖아.”
나는 미간을 좁혔다.
내 계략이 잘못된 것일까?
아카데미에서 스웨인 왕국까지는 왕복으로 보름.
그렇다면 벌써 답장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설마 내 카드가 간파당한 것은 아니겠지?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신이 아니었다.
계략이라는 것은 반드시가 아니었다. ‘그리할 것이다.’ 라는 전제하에 세워지는 것뿐이고, 그래서 그것은 얼마든지 읽힐 수 있었다.
유피아나가 말했다.
“아케인에서 공식적으로 이 일에 개입할 수는 없어. 라인스 암살단은 흑마법사가 아니니까.”
“그래도 그들은 악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돕고 있는 거잖아. 나도 라인스 암살단 녀석들은 용서할 수 없어.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평가하다니.”
끼익―!
옆방에 있던 세실이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
“세실…….”
“루비오,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
“무리라니…….”
세실이 고개를 저었다.
“루비오가 아무리 강해도 마스터에게는 이길 수 없어.”
“그런 비겁한 녀석에게 내가 질 리 없잖아.”
세실이 목소리를 높였다.
“라인스 암살단은 백 명도 넘는단 말이야. 루비오 혼자 어떻게 그들을 이길 수 있겠어? 그들은 나처럼 약하지 않아.”
나는 가슴을 폈다.
“백 명이든 천 명이든 상관없어. 그리고 아직은 그들과 싸우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세실을 사들이기로 했어.”
세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서 그녀만큼 라인스 암살단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불가능해. 마스터는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아. 난 결국 죽고 말 거야.”
“세실은 죽지 않아. 녀석들이 원하는 건 골드야. 그것만 들어주면 된단 말이야.”
“루비오…….”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
유피아나 선생이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세실의 말에도, 루비오의 말에도 일리는 있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세실을 보호할 수는 없단 사실이야. 일단은 세실의 안전을 확보해 두는 것이 좋아.”
“그래서 계략을 쓴 것입니다. 아니라면 당장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을 겁니다.”
“암살단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어떤 계략인지 몰라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알고 있습니다. 녀석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은…….”
유피아나 선생이 세실에게 말했다.
“세실, 우리를 믿어. 아케인은 세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이고 그중에서도 루비오는 좀 더 특별하게 강한 사람이야.”
“…….”
유피아나 선생이 밖으로 나가자 방에는 나와 세실 만이 남게 되었다.
세실은 아직도 목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말하셨지. 선이란 나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고, 악이란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라고. 세실은 자신을 위해서 암살자가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암살자가 되었어. 스승님의 말대로라면 선을 행한 것이지. 하지만 암살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악이기에 그것은 선이 될 수 없었던 거야. 아무리 착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도 잘못된 길을 걷게 되면 그릇된 결과를 가져오는 거야.”
“루비오의 스승님은 누구야?”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아주 강한 분이야. 암살단의 마스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한 분.”
세실이 말했다.
“유피아나 선생님께서 그러셨어. 루비오가 소드 익스퍼트라고. 난 아직도 믿을 수 없어. 소드 익스퍼트라면 기사단장급이잖아.”
나는 차를 끓이기 위해서 일어섰다.
“뭐 마실래? 홍차? 아니면 허브차?”
“아, 홍차.”
나는 홍차 잎을 꺼내면서 말했다.
“내가 소드 익스퍼트라면 마스터를 이길 수 있을까?”
세실이 대답을 망설였다.
암살단의 마스터는 소드 익스퍼트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소드 익스퍼트로도 부족한 건가?”
세실이 대답했다.
“아니야. 정면에서 싸운다면 루비오가 이길지도 몰라. 하지만 마스터는 정면에서 싸우지 않아.”
“비겁하다는 말이군.”
세실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마스터는 비겁해. 하지만 그렇기에 강해.”
“그럼 소드 마스터는 어떨까? 같은 마스터라면 수준이 비슷하지 않을까?”
세실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찻잎을 넣으면서 시큰둥하게 말했다.
“왜 웃는 거야?”
세실이 웃음을 지우면서 대답했다.
“소드 마스터는 한 나라에 한 명 나타날까 말까 한 강자야. 당연히 마스터도 이길 수 없지. 하지만 루비오는 소드 마스터가 아니잖아.”
내가 예문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넬슨 영감이 내게 말했다.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냐고.
지금 난 예문의 경지를 넘어 무극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아직 검을 들지는 않았지만 검을 든다면 충분히 아우라를 발출할 수 있었다. 냉정히 말해 난 소드 마스터에 근접해 있었다.
세실에게 차를 내놓으면서 말했다.
“암살단에 대해서 말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세실이 안색을 굳혔다.
“그럴 수는 없어. 암살단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루비오가 위험해 질 테니까.”
“내가 그들의 본거지로 달려갈까 봐?”
세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난 루비오가 마스터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해.”
나는 그녀의 앞에 앉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쯤 세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세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선함을 알고 있기에 나는 그녀를 탓하거나 채근하지 않았다.
***
무리한 계책이었을까?
하나의 돌로 두 마리 새를 얻으려는 건 역시 내 욕심이었을까? 독에는 독이라는 전제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며칠이 더 지났지만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초조했다.
그 때문인지 교수의 설명이 평소와 달리 지겹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뭔지 제대로 설명하란 말이야.”
그때였다.
“루비오 군.”
대지 계열 마법 담당인 에릭스 교수가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중얼거린 것을 들은 걸까?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에릭 교수가 말했다.
“루비오 군, 손님이 찾아왔다는군. 지금 면회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가서 만나 보게나.”
강의 중에 찾아온 손님?
휴……. 일단 다행이군. 그가 내 중얼거림을 듣지는 못한 것 같으니.
하지만 강의 중에 불러낼 정도라면…….
그렇군. 마리오가 답장을 받아 온 것이 분명해!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떤 답장일까? 그녀가 내 계략을 간파하고 허를 찌르지는 않았겠지? 그럴 리는 없었다. 그렇게 믿어야 했다. 내가 내 계략에 자신을 가지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
나는 마법서와 지팡이를 강의실에 남겨 둔 채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좋아. 결과를 얻으러 가자.”
아카데미의 면회실은 정문 쪽에 있었다. 아카데미의 모든 건물은 그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에 강의실에서 정문까지는 꽤 멀었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도 족히 10분은 걸리는 거리. 나는 복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 한 뒤 경공을 전개했다. 복도를 빠져나가는 것은 순간이었다.
나는 듯 달려간 면회실. 그러나 면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리오 녀석, 화장실에라도 간 걸까? 조금 기다려 볼까?
십여 분을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시계의 시침 소리만이 정적을 깰 뿐이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면회실을 나왔다. 그러고는 정문 관리인에게 다가갔다.
“룬 드 루비오입니다. 면회실에서 절 찾으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거죠?”
그러자 관리인이 옆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자네가 루비오 군인가? 자넬 찾아온 손님께서는 귀빈실에 계시다네.”
귀빈실? 면회실 말고 따로 방이 있었던 것인가?
내 수행원이라면 귀빈실을 쓸 리 없었다. 귀빈실은 아카데미에서도 귀빈이라고 인정할 만한 사람에게만 내어 주는 방이었다. 그렇다면 마리오 말고 다른 사람이 온 것이다.
후……. 나는 전지전능하지 않다. 또래 아이들보다 약간 더 긴 인생 경험과 약간 더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이 꼬인다고 해도 그것은 내 탓이 아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 온 것일까?
세실이 말하는 마스터가 온 것은 아니겠지?
나는 전신의 내력을 끌어올린 뒤 귀빈실 문을 열었다.
귀빈실 안은 그리 넓지 않았다. 방 안에는 두 개의 넓은 의자와 푹신한 작은 의자 두 개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십 대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카데미에서 흔히 입는 통이 넓고 멍청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대신 가슴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풍성한 옷을 입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