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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18화)
7장 독에는 독(3)
순간 나는 눈을 어디에 둘지 몰랐다. 그녀의 희고 고운 가슴이 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복숭아꽃 같은 입술을 움직였다.
“잘도 했더구나.”
그 한마디에 나는 움찔했다.
설마…… 그녀가 공작 부인?
직접 온 것인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군.
그녀가 직접 왔다면, 여긴 더 이상 귀빈실이 아니었다. 이곳은 바로 전장이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귀부인이 말했다.
“편지 몇 장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놀랐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그녀는 내게 앉으라는 권유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노골적인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긴, 학장조차 알고 있는 모자 간의 불화였다. 이제 와 감춘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편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공작 부인이 분명했다. 더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키가 좀 컸구나.”
그녀는 아름다웠다. 사십이 넘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빛이 바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아카데미 제일의 미녀인 유피아나 선생보다도 아름다웠다.
내가 그녀와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면 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기꺼이 찬사를 보냈을 것이다. 사십이 넘은 나이에 이토록 화사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젊었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웠단 말인가?
나는 그녀의 투명한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마리안느는 잘 있나요?”
공작 부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넌 언제나 그 아이 이야기뿐이구나. 내 안부는 전혀 관심이 없단 말이겠지? 그렇지?”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께서는 여기 이렇게 잘 계시지 않습니까?”
공작 부인이 두 손을 모았다. 나는 그녀의 두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화가 났지만 참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네가 착한 아이인 줄 알았다.”
“전 착한 아이입니다.”
공작 부인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래, 착해서 그런 편지를 보냈겠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무척이나 실망한 듯 연기를 한 것이다.
“어머니께서 그러시지만 않았다면 계속 착한 아이였을 겁니다.”
그러나 그녀는 냉소했다.
“이제 와 무슨 말이란 말이냐. 너나 나나 가면을 쓰고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더냐?”
“전 가면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호호호, 별일이군. 역시 와 보길 잘했어. 아버지가 없으니 본색을 드러내는군. 루비오, 루비오. 네가 아버지에게 한 말은 모두 거짓이었지?”
아버지가 없으니 본색을 드러낸다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루비오 공작이 이곳에 서 있다면 과연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마를 찌푸렸다.
“거짓이 아닙니다.”
공작 부인이 부채를 들어 흔들었다.
“라인스 녀석들에게 실망했어. 돈을 그렇게 많이 퍼 줬는데도 일을 처리하기는커녕 한심하게 만들었잖아. 정말…….”
“라인스 암살단이라면 저도 높게 평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공작 부인이 부채를 접으면서 말했다.
“해독약을 내놓아라. 넌 형을 죽일 수 없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편지에 쓰여 있는 대로입니다. 전 바보가 아닙니다. 해독약을 먼저 드릴 수는 없습니다.”
공작 부인이 부채를 접었다.
“계집의 목숨을 보장하겠다.”
“어머니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죠?”
“내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거래 자체가 성립할 수 없지 않느냐?”
“어떤 말씀을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전 편지에 적혀 있는 대로 할 것입니다.”
“고집불통이구나.”
“어머니께서 먼저 그녀를…….”
공작 부인이 탁자 위의 붉은 꽃병을 꺼냈다. 꽃 한두 송이 정도를 꽂을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이었다.
“여기에 독을 썼지?”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꽃병이었다. 그러나 나는 저 꽃병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하나의 돌로 두 마리 새를 잡는다. 이것이 이번 계략의 묘였다.
내가 잡으려는 두 마리 새는 각각 이것이었다.
첫 번째는 세실의 목숨. 공작 부인을 핍박해 그녀로 하여금 세실의 목숨 값을 지불하게 한다.
둘째, 본국에 있는 아군을 확인한다. 루비오 연대기를 읽으면서 나는 본국에 아군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이 잘 풀린다면, 그녀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내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나는 꽃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확실히…… 형의 방에 있던 것이군요.”
“최근에 들여온 물건은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의외였어. 네가 이런 짓을 해서까지 암살단의 계집을 살리려 하다니. 네게 중요한 것은 마리안느가 아니었더냐? 어찌 그런 하찮은 계집에게 마음을 빼앗겼느냐?”
“세실은 하찮은 여자가 아닙니다.”
“후후, 암살단 놈들이 내게 돈을 뜯어내려고 수작을 부린 것 같군. 이 계책도 그 녀석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겠지?”
“아닙니다. 암살단 녀석들은 제가 조만간 끝장낼 것입니다.”
“네가?”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넌 속고 있어. 그 녀석들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단 말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공작 부인에게 편지를 쓰기 전에 여동생인 마리안느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내게 하나밖에 없는 아군이었다.
나는 편지를 보내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 형의 방에 있는 어떤 물건이든지 눈에 잘 띄지 않는 물건을 하나 가져다 두라고.
물론 작은 꽃병이나 향낭 같은 것이면 더욱 좋겠다고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렇게 예를 드는 편이 계략을 꾸미기에 좋았다.
나는 이 한 통의 편지로 공작 부인의 허를 찌르기 위한 증거를 만든 것이다.
마리안느는 약간의 의심을 했겠지만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편지에 적혀 있는 대로 작은 꽃병을 발칸 백작의 방에 가져다 놓았을 것이다.
이것은 흐뭇한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내 이 작은 부탁마저 거절했다면? 혹은 그 편지를 들고 공작 부인과 상의를 했다면? 내 계략은 거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 편지를 받아들였고, 아군이 되었다. 그녀가 내 손을 들어줌으로써 두 번째 목표는 달성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유리함을 어떻게 승리로 이어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공작 부인이 차갑게 말했다.
“향기를 통해 중독되는 독. 이건 루비오 네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나마나 암살단 녀석들의 짓이었겠지.”
공작 부인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암살단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카데미에는 제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많지요.”
공작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널 아카데미로 보낸 것이 실수였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미 늦은 일입니다.”
“그래, 이미 늦은 일이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직접 오지 않았더냐?”
그녀가 직접 온 것은 예상 밖이었다.
나는 공작 부인에게 편지를 써서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께.
어머니께서 보내 주신 선물은 감사히 받았습니다.
그래서 불효자이지만 아들인 저도 어머니께 선물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받기만 해서는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까요.
형의 방에 가 보시면 향기를 내는 물건을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향기가 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중독시킬 수 있는 독만 담았으니까요.
발칸 백작을 살리고 싶다면 제 말을 귀담아들어 주십시오.
(중략)
어머니께서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첫 번째 해독약을 보내겠습니다.
향기로 중독되는 이 독은 세 번에 걸쳐 해독약을 복용해야지만 독을 해독할 수 있습니다.
보름 후 그녀의 안전이 확인되면 두 번째 해독약을 보내겠습니다.
마지막 해독약은 앞으로 6개월 후, 제가 직접 집으로 가지고 가겠습니다.
―룬 드 루비오
형에게 독을 썼다는 편지를 보내 공작 부인을 위협한 것이다.
얼핏 보면 형편없는 계략이었다. 어떠한 증세도 없이 꽃병 하나로 공작 부인을 속이려 했으니까.
하지만 인질의 무게가 달랐다. 이쪽에 일할 정도의 가능성만 있어도 공작 부인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계략이 실패할 경우 이쪽이 잃는 것은 세실의 목숨이었다. 공작 부인의 기준으로 볼 때 세실은 하찮은 암살단의 계집이었다.
그에 비해 공작 부인 자신이 잃게 되는 것은 너무나 컸다. 그녀가 잃게 될 것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만에 하나 정말 독이 사용되었다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날 백 번 죽인다고 해도 발칸 백작은 살아나지 않는다. 내가 공작 부인이라고 해도 답장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답장을 쓰는 대신 직접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이건 내 예상보다도 더 적극적이었다. 그녀에게 발칸 백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는 이상 공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좋습니다. 이렇게 오셨으니 우선 첫 번째 해독약을 드리죠. 대신, 두 번째 해독약은 한 달 후에 드리겠습니다.”
공작 부인이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네게 속았구나. 넌 원래 이렇게 머리가 좋은 아이였구나. 아버지도 나도 형도 마리안느도 속여 넘기다니. 너란 아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거냐?”
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첫 번째 해독제입니다. 해로운 것은 섞여 있지 않습니다. 물론 성분을 분석해도 좋습니다. 어차피 마지막 해독제가 없으면 이것도 소용없을 테니까요.”
나는 공작 부인이 해독제의 성분을 해석해서 다른 해독제를 만들지 못하게 선수를 쳤다.
그러나 공작 부인은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공작 부인이 약병을 받으면서 말했다.
“루비오, 너는 공작 위를 원하는 것이냐?”
그녀의 얼굴에는 의혹에 차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공작 위라…….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은 세실의 안전입니다.”
공작 부인이 부채 사이로 웃음을 흘렸다.
“호호, 넌 암살단의 계집을 공작 부인으로 만들려는 모양이구나.”
“아직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한심한……. 잘 들어라. 어떤 남자든 여자에게 빠지면 나약해진단다. 넌 그런 나약함을 이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번에는 네가 이겼지만 다음에 웃는 사람은 내가 될 것이다.”
“충고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 그 나약함을 이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흥! 감사하다니, 이제까지 네게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말이로구나. 서로 가면을 벗어던지니 편한가 보지?”
“어머니께서는 아닙니까?”
공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이미 그녀에게는 손을 써 놨다. 암살단에서 사람이 갈 것이다. 확인하는 대로 나머지 해독약을 보내 주길 바란다. 넌 형을 미워하는 아이가 아니잖느냐.”
세실에 대해 손을 써 놨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행동이 빠르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만 앞세우는 여자였다면 나는 감당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