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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19화)
7장 독에는 독(4)


공작 부인이 부채를 접으면서 말했다.
“언제쯤 돌아올 것이냐?”
“글쎄요? 아마 빨리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전 아카데미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카데미에 있는 계집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겠지. 라인스 녀석들을 고용한 것은 완벽한 내 실수였다. 그런데 루비오, 넌 왜 너에 대한 암살을 중지해 달라고 말하지 않았지? 그 계집의 목숨을 살리는 것보다 이쪽이 더 나았을 텐데?”
암살단은 비단 세실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공작 부인의 의뢰는 아직도 유효했다. 다시 말해 내 이름은 아직도 암살단 리스트 위에 있었다.
“어머니께 과한 요구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호오, 과한 요구라고 생각했단 말이냐? 네 목숨을 포기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어머니께서 공작 위를 쉽게 포기할 리 없으니까요.”
공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루비오, 제법 당돌해졌구나. 어머니는 네 건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기뻤단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저도 어머니께서 건재하신 것을 보니 뿌듯합니다.”
“흥! 이만 떠나야 할 것 같구나.”
“멀리 나가지 않겠습니다.”
“너답구나.”
“안녕히…….”
나는 그녀가 귀빈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탁 하고 문 닫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긴 건가? 아니면 그녀가 져 준 건가?”
어쨌든 이걸로 세실은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제 위험한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8장 다이니 경기(1)


“그게 정말이야?”
“어머니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니 거짓은 아닐 겁니다.”
유피아나 선생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제 하루 종일 세실을 지킬 필요가 없겠구나.”
“그간 세실을 지켜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유피아나 선생이 세실을 지켜 줄 만한 이유는 없었다.
굳이 따진다면 아카데미의 학생이란 것 정도?
유피아나가 말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악당들의 괴롭힘을 받아 헤어지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지.”
나는 급히 변명했다.
“세실과 전 그런 사이가…….”
유피아나 선생이 오른손 식지로 내 입술을 막으면서 말했다.
“쉬잇! 세실이 듣겠어. 보건소에 같이 온 날부터 난 알고 있었다고. 두 사람이 보통 사이가 아니란 것을 말이야.”
그녀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세실을 좋아하는 것은 그녀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난 그녀를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참, 혹시 다이니 경기…… 보러 오시겠습니까?”
“다이니 경기? 루비오가 다이니 경기를 한단 말이야?”
“어쩌다가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언제야?”
내가 경기 일을 말하자 유피아나 선생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게 되었네. 그날은 발론스에서 학회가 있단 말이야. 휴우……. 루비오가 뛰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

다이니 경기장은 좌우가 긴 직사각형이었다. 다이니 경기는 이 경기장 안에서 편을 갈라 하나뿐인 공을 빼앗는 경기였다.
빼앗은 공을 상대방 진영 끝에 가져가면 득점이 되었고 정해진 득점을 먼저 달성하는 쪽이 이기는 경기였다.
나는 며칠 전부터 경기의 룰에 대해서 공부했다.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경기장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지 못한다면 경기에 나서는 의미가 없었다.
나는 이번 다이니 경기에서 내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낼 생각이었다.
넓은 야외 경기장에서 득점을 올리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생각만 해도 통쾌하지 않은가?
내가 득점을 많이 하면 아자크 왕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변할 것이다. 나는 그의 그런 얼굴이 보고 싶었다.
“좋아, 간다.”
주먹을 불끈 쥐면서 경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카데미에는 모두 여섯 개의 다이니 클럽이 있고, 각각의 클럽은 각 나라를 대표했다.
이 중 스웨인 왕국의 클럽이 가장 규모가 작았다. 학생 수가 적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아자크 왕자가 속한 아크바스 왕국 클럽은 규모가 중간 정도였다.
중간이라……. 그렇다면 우리보다는 형편이 낫다는 말인가?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맑고 푸른 하늘이었다.
날씨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다이니 경기는 야외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날씨가 좋으면 좋을수록 멋진 장면이 많이 나왔다.
나는 흘러가는 바람을 느끼면서 중얼거렸다.
“활약할 조건은 모두 갖춰진 건가?”
미소를 지으면서 다이니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경기장 안은 벌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선수를 제외하고도 족히 수백 명은 될 것 같았다.
단순한 클럽 경기인데 관중이 이렇게 많다니…….
나는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이니 경기의 인기가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할 텐데.”
경기가 치러지는 잔디밭 안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소년이 다가왔다. 그는 메디세 백작의 장남 페르디난드 드 메디세였다.
“루비오, 부탁하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작위는 이쪽이 높았지만 학년과 나이는 메디세 쪽이 많았다.
메디세는 나를 동료들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대부분 스웨인 왕국의 귀족이었다.
“루비오 공작님의 차남인 루비오 군일세. 다들 알고 있겠지?”
상급생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잘 부탁하네.”
“루비오, 공작님은 내가 제일 존경하는 기사라네. 자네도 그분의 이름에 걸맞는 실력을 지니고 있으리라 생각하네.”
“나도 자네가 잘할 걸로 믿네.”
“루비오 군, 아크바스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고.”
짧은 소개가 끝나자 메디세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자, 복장 착용하고 나가자!”
팀의 리더는 바로 그였다. 다른 소년들이 함성으로 그의 말을 받았다.
“맡겨 줘!”
“오늘도 이기자고!”
“이기자! 가자! 스웨인!”
소년들의 분위기에 나도 휩쓸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그들과 같은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밖으로 눈을 돌렸다.
경기장 좌우 스탠드에는 각 나라의 응원단이 와 있었다. 특히 아크바스 쪽 응원단이 많았다.
얼핏 보아도 스웨인 왕국의 두 배가 넘을 것 같았다.
“아크바스! 아크바스!”
“나가자! 아크바스!”
“아크바스 만세!”
이 함성은 경기가 시작되면 더 커질 것이다.
내가 가볍게 한숨을 내쉰 순간 심판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준비가 끝난 선수는 중앙선으로!”
다이니 경기에 필요한 선수는 모두 열 명. 이 중 공격에 참여하는 다섯 명이 중심 선수였다.
나는 당연히 중심 선수가…… 중심 선수가 아닌 수비 선수로 후방에 배치되었다.
쳇! 아직 내 실력은 신뢰할 수 없다는 건가?
수비 선수들 중에서도 잘하는 사람은 칭찬을 받았지만, 득점을 올리는 공격수에 비해서는 비교도 안 되게 적었다.
나는 에어리어 뒤편에서 미간을 좁혔다.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좀 더 눈에 띄고 좀 더 멋있는 그런 것이었다.
아크바스 왕국 응원석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아자크 왕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잔뜩 미간을 좁힌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 상대해 주지 못할 정도로 다친 건가? 꽤나 아쉬운 모양이군.”
내가 어깨를 으쓱한 순간 심판이 마지막으로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양쪽 선수 준비! 곧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양쪽 준비되었습니까?”
“준비되었습니다.”
“준비되었습니다.”
두 팀의 리더에게 대답을 들은 심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심판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경기 시작!”
선공은 아크바스 왕국 쪽이었다. 우리 팀 순위가 더 높았기 때문에 순위가 낮은 아크바스에게 선공이 주어진 것이다.
덩치가 큰 아크바스 선수가 공을 들고 우리 쪽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그는 곧 다른 선수들에게 잡혀 땅에 쓰러졌다. 그는 쓰러지기 전에 공을 자기편에게 던지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메디세가 재빨리 공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흠……. 몸놀림이 제법인데. 꽤 날렵하군. 저런 몸놀림이라면 마법보다는 검을 배우는 편이 나았을 것 같은데. 메디세는 왜 아카데미에 온 거지?
그는 팀의 리더답게 순발력과 판단력이 대단했다. 메디세의 지휘 아래 팀원들이 착착 움직였다.
나만 빼고 말이다.
잠시 뒤 우리 쪽이 득점을 올렸다. 공을 직접 들고 가서 내려놓았기 때문에 5점을 득점할 수 있었다. 이걸로 스코어는…….
5 : 0
아크바스 왕국은 잇달아 실수를 범하면서 득점을 허용했다.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스코어는…….
12 : 0
오늘 경기는 30점을 파이널 포인트로 정했기 때문에 경기는 벌써 중반전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가 뭘 해 보기도 전에 경기가 끝나겠군.”
나는 메디세의 말대로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이건 큰일이었다. 이 넓은 경기장에서 내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응원단도 내가 아닌 다른 선수들을 응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원했던 그림은 이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메디세가 아닌 내 이름을 부르며 환호해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모든 이들이 외치는 이름은 루비오가 아닌 메디세였다.
“메디세!”
“메디세!”
“날아라! 메디세!”
메디세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나는 혀를 찼다.
“쳇! 오늘의 영웅은 메디세인가?”
그는 나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노련했다. 다이니 경기만큼은 그가 나보다 고수인 것이다.
나는 땅을 가볍게 차면서 말했다.
“역시 경험이 적으면, 당해 낼 수 없단 말이군. 무공도 마법도, 심지어 다이니 경기도 마찬가지란 건가?”
잠시 뒤 아크바스 왕국 쪽에서 작전 시간을 요청했다. 다이니 경기에서는 각 팀당 두 번의 작전시간을 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