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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22화)
9장 흑마법사(1)


다이니 경기에서 대활약을 한 이후, 아카데미에서 인지도가 크게 올라갔다.
한마디로 말해 이제 내 얼굴을 모르는 학생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대활약에도 불구하고 난 더 이상 다이니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아크바스 왕국 팀에서 루비오가 경기 중 마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냐며 정식으로 운영위원회에 항의를 한 것이었다.
일반인 중에 보호구를 착용한 채 30피트를 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신체 단련을 부지런히 한 기사도 이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난 그것을 해낸 것이다. 당연히 마법이나 그와 비슷한 것을 사용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보기에는 좋았지만, 결국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해낸 것이다.
다이니 운영위원회는 아크바스 왕국의 항의를 받아들였다.
단 그들은 내가 다음 경기부터 출전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스웨인 왕국의 승리를 인정했다.
아자크 왕자는 이 판결에 불만을 가졌지만, 상층부에서 압력을 넣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보나마나 학장인 넬슨이 직접 손을 쓴 것일 테지. 그는 내가 소드 익스퍼트란 사실을 가능한 한 비밀에 붙이고 싶어 했으니까.
하지만 내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 되어 있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감춘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일이 세상에는 많았다.
고개를 들자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손끝에 모인 마나가 한 점에 집중되었다. 이것은 마법의 마나 운용법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도 이것이 소드 익스퍼트라 불리는 경지에 오른 자들의 마나 운용법일 것이다.
그녀는 손끝에 모인 마나를 흐트러뜨리면서 말했다.
“이런 것쯤은 루비오도 할 수 있겠지?”
나는 침묵했다.
그러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다이니 경기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엄연한 반칙이야. 마나 소드나 아우라를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설마 경기 규칙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상대방이 먼저 비겁한 플레이를 했습니다.”
날 노려보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그레시아. 제국의 황녀로 아카데미 선도부 위원장을 맡고 있는 아가씨였다.
“좋아. 이 건은 이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지. 이미 운영위원회에서 결정난 일이니까. 하지만 충고는 해 두겠어. 힘을 쓰는 일 말이야. 아케인 회의 때까지는 가능한 참아 줬으면 좋겠어.”
그레시아는 나와 같은 소드 익스퍼트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힘을 보여 주기 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케인의 일원으로서 충고하지. 이렇게 크고 작은 사건을 계속 만들면 아케인의 다른 회원들이 루비오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 거야. 넬슨 학장님께서 비호해 주시는 것도 한계가 있어.”
나는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적을 많이 만들지 마.”
“적이라니요?”
“상급생들 중에 루비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아크바스 왕국 학생들만이 그런 게 아니야. 그러니까 당분간은 조심해. 질 나쁜 녀석들이 어떤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딸깍 내가 막 그녀에게 말을 하려는 순간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레시아는 여전히 깐깐하네.”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레시아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피아나 선생님.”
유피아나 선생이 무슨 일로 여기에 온 것일까?
그레시아가 유피아나를 보고 급히 예를 차리는 것은 같은 아케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모르는 척 고개를 숙였다.
“오늘 여기 온 건 루비오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고? 혹시 세실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라인스 암살단 녀석들이 이렇게 빨리 정비를 마쳤단 말인가?
유피아나 선생이 말했다.
“이번 정기 회의 안건이 채택되었어.”
그레시아의 눈이 커졌다.
“루비오를 아케인으로 받아들이는 건가요?”
“그래, 이번 회의의 안건은 루비오의 아케인 가입이야.”
두 사람은 대단한 일이라는 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아케인이나 다이니 경기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세실과 라인스 암살단이었다.
며칠째 암살단 녀석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더욱 불안했다.
공작 부인은 내게 그들이 곧 찾아와 세실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직 그 누구도 날 찾아오지 않았다.
유피아나 선생이 물었다.
“루비오는 기쁘지 않은 거야?”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아직 정식 아케인이 된 것은 아니니까요. 게다가 제게는 다른 문제들도 있고…….”
유피아나 선생은 내 고민을 읽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루비오가 아케인이 되면 이번 일도 잘 풀리게 될 거야. 아케인에는 실력자가 많으니까.”
아케인이 되면 암살단을 상대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말일까?
하지만 유피아나 선생의 소극적인 대처를 보면 내가 아케인이 된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선도위원회를 나온 뒤 혼자 걸었다.
플린은 선도위원이란 명목으로 순찰을 나갔고, 세실은 아직도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두 사람이 곁에 없으니 여간 쓸쓸한 것이 아니었다.
“한 달쯤 아카데미를 떠날까?”
누군가 내 혼잣말을 받았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나는 흠칫했다. 기척을 느낄 사이도 없이 상대가 내 거리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은발의 소년이 웃고 있었다. 보통 은발은 금발이 변색되면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소년의 은발은 달랐다. 그의 은발은 금발이 변색된 것이 아니라 은발 자체였다.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할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늦었군.”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종이 매달려 있는 첨탑으로 날 인도했다.
첨탑 꼭대기에 이르자 은발의 소년이 걸음을 멈추면서 말했다.
“여기라면 괜찮겠지.”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마스터가 세실을 포기하기로 한 건가?”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 마스터께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셨지. 난 반대했지만 말이야. 아참, 내 소개를 깜빡했군. 난 블레어 드 레인. 우리 쪽 사람들은 날 은의 레인이라고 부르지.”
“머리카락 때문인가?”
“그렇게 생각하나?”
이 녀석, 암살단에 속해 있는 주제에 귀족의 경칭을 붙이고 있잖아. 마음에 들지 않아. 얼굴도, 목소리도, 태도도…….
블레어가 말했다.
“루비오 군, 우선 개인적으로 자네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군. 자네들이 간부 하나를 처리해 줘서 내가 간부로 승진할 수 있었으니까. 이제부터 내가 자네의 목숨을 책임질 걸세. 잘 부탁하네.”
“책임진다고? 빼앗는 것이 아니라?”
블레어가 웃었다.
“후후, 우리 쪽에서는 그것을 책임이라고 말하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지금 당장 손을 쓰지는 않을 거야. 나도 준비가 필요하니까.”
블레어가 말하는 죽은 간부는 아마 세실을 감시하던 소년이었을 것이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태평하군. 내가 지금 당장 널 죽일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블레어는 기분 나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난 루비오 군이 그렇게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루비오 군은…… 그래, 전장에서 싸우는 기사 같은 사람이야. 상대가 투구를 쓰고 덤비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 그건 말이야 멋은 있지만 실속이 없다고 할까?”
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틀렸어. 난 네 녀석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 너희들처럼 계략에도 능하지. 블레어, 난 벌써 손을 썼단 말이야. 그것도 독으로…….”
블레어가 은발을 쓸어 올리면서 말했다.
“농담도 정도껏 해. 무슨 독이란 말이야?”
“블레어, 방금 전부터 가슴이 서늘하지 않던가?”
블레어가 얼굴을 굳히면서 말했다.
“그게 독 때문이란 거냐?”
첨탑은 바람이 위에서 아래로 불어온다. 가슴이 서늘한 것은 당연했다.
“독이 아니라면?”
나는 가볍게 한 번 찔러본 것이다.
그러나 블레어는 내 예상 이상으로 반응했다.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허튼소리 작작해.”
나는 가볍게 웃었다.
“하하, 뭘 그렇게 정색하는 거야? 농담이다. 넌 내 상대가 되지 못해. 가서 마스터에게 전해. 날 죽이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 말이야. 어린아이는 내 상대가 되지 못해.”
블레어가 얼굴을 구기면서 말했다.
“감히 날 무시하다니. 이 은의 블레어가 우습게 보인단 말이냐?”
난 웃음을 지우곤 블레어의 말을 받았다.
“여자아이 손에 검을 쥐어 주는 놈들을 과연 높게 평가할 수 있을까?”
블레어가 뒤로 한 발 물러서면서 말했다.
“그건 우리의 실책이었다. 네가 소드 익스퍼트란 것을 알았다면 세실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블레어를 한 번 더 흔들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너도 꽤 어린데? 너도 세실처럼 키워진 아이인가?”
블레어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나는 그런 소모품과는 달라.”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세실을 소모품이라고 말하다니……. 이 녀석은 대체 사람의 목숨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뭐라고?”
내가 언성을 높이자 블레어가 목소리를 낮췄다.
“난 스스로 암살단에 들어갔다. 소모품처럼 키워진 아이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시험을 통과해 마스터에게 인정받은 사내다. 날 소모품들과 같이 보면 곤란해.”
“스스로 암살단에 들어갔다고?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크크크. 이름만 있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거든. 더 높은 자리로 오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지. 그래서 암살단에 들어간 거야. 루비오, 난 암살단에서 끝날 남자가 아니야. 난 더 큰 것을 노리고 있지. 알겠나? 이 블레어는 암살단의 소모품들과는 격이 다른 남자란 말이야.”
나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망에 혼을 팔았군.”
“야망에 혼을 팔았다고? 야망이 없는 사내는 짖지 못하는 개와 같아. 루비오, 넌 어때? 넌 야망이 없나? 말해라! 네 야망이란 것이 겨우 계집아이 품에 안기는 것인가?”
내 야망? 이전의 나는 선을 위해서 살아왔다.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사실 대로 말하면 다른 사람을 위하는 선과 나를 위하는 악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그릇된 야망은 없는 것만 못하다.”
블레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게 네 대답이냐? 그러니까 공작 위를 위협받는 거야. 내가 너였다면 망설임 없이 형을 죽였을 거야. 앞을 가로막는 녀석을 처치하는데 무엇을 망설인단 말인가?”
이 녀석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자 하는 것인가? 선전포고를 하려고 온 녀석 치고는 말이 지나치게 많잖아.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블레어가 웃음을 거두면서 대답했다.
“루비오, 난 아카데미에서 네 녀석을 지켜봤다. 네 녀석은 너무 빛나고 있어.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그래서 네 녀석의 날개를 꺾어 줄 거야.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말이야. 메디세처럼 말이지.”
메디세처럼?
이 녀석…… 이 녀석이 아자크 왕자의 참모였나? 이 녀석이 계략을 써서 메디세와 아돈에게 부상을 입히게 한 것인가?
나는 블레어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그는 급히 뒤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무극의 경지에 오른 내 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내가 멱살을 틀어잡자 블레어가 크게 놀랐다.
“이…… 이 녀석, 여기에서 손을 쓸 참이냐? 내가 네 손에 죽으면 아자크 왕자가 널 의심할 걸. 나도 아카데미의 정식 학생이란 말이다.”
나는 블레어의 두 눈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블레어! 경고하겠다. 다시 한 번 더 그딴 수작을 부리면 용서하지 않겠다.”
“큭!”
내가 멱살을 놓자 블레어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무섭군. 소드 익스퍼트는 질려 버릴 정도로 대단해.”
내가 한마디 더 쏘아 주려는 순간 블레어가 첨탑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는 멍해지고 말했다.
이곳은 지상으로부터 이백 피트(=60m) 높이였다. 맨몸으로 뛰어내리면 아무리 소드 익스퍼트라도 무사할 수 없었다.
“자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내가 중얼거린 순간 블레어의 등에서 날개가 돋아났다.
크고 웅장한 은빛 날개가 블레어를 쓰다듬고 있었다.
블레어가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루비오, 이제 알겠지? 내가 왜 은의 블레어인지?”
은빛 날개.
얼마 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거대한 은빛 날개의 정체는 비상 마법 중에서도 최상위 마법인 은의 혼이라는 것이었다.
새처럼 마음껏 하늘을 날게 해 주는 마법. 이건 무당파 제운종으로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블레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후……. 녀석은 마법사였단 말인가?”
불현듯 후회가 밀려왔다. 방금 멱살을 틀어쥐었을 때 끝냈어야 했다.
블레어가 우아한 몸짓으로 지상에 내려섰다.
“루비오 군, 그럼 다음에 보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