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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23화)
9장 흑마법사(2)
제국의 현자 넬슨.
아카데미의 학장이자 최연소 졸업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그가 지금 내 앞에 서 있었다.
넬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여러 명의 마법사가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이들이 바로 아카데미의 최정예로 불리는 아케인이었다.
넬슨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여러분께 새로운 멤버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들 익히 아시고 계실 겁니다. 스웨인 왕국의 룬 드 루비오 군입니다.”
박수가 터져 나오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응이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눈빛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비쩍 마른 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학장님, 루비오 군은 좀 그렇지 않습니까?”
좌측 두 번째 열의 키가 큰 마법사도 넬슨에게 격렬히 항의했다.
“노멀 클래스 학생을 아케인으로 받는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루비오 군은 품행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 폭력 사건도 있었지 않습니까?”
이곳저곳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스웨인 왕국의 공작가가 이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귀족이었나?
내가 비록 자격이 모자란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이득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군.
넬슨은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날 단속시켰던 것 같았다. 내 아케인 가입은 예상과 달리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이건 있을 수 없는 경우입니다.”
“학장님께서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평소의 학장님께서는 이러시지 않았습니다. 아케인들의 의견을 존중해 주십시오.”
“학장님, 이건 아케인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리고 싶었다. 아케인 같은 지위를 바랐던 것이 아니다. 나는 어떤 클래스든 상관없었다. 마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여기서 이렇게 야유를 받을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런 식이라면 내가 아케인이 된다 해도 이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게 뻔했다.
다시 말해 반쪽짜리 아케인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넬슨은 달랐다. 그는 반드시 나를 아케인에 넣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대체 그는 뭘 원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아케인이 된다고 해서 아카데미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데. 그는 나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넬슨이 다른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루비오 군은 소드 익스퍼트입니다.”
넬슨이 소문을 사실로 만드는 순간이었다.
넬슨을 향해 항의하던 사람들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소드 익스퍼트?”
“설마요…….”
“그 나이에 소드 익스퍼트가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학장님, 루비오 군이 소드 익스퍼트라는 사실을 증명하실 수 있으십니까?”
넬슨이 키 큰 마법사를 향해 낭랑하게 말했다.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는 소드 익스퍼트입니다.”
아직도 상황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윽고 유피아나 선생이 넬슨을 지원하기 위해서 나섰다. 그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루비오 군이 소드 익스퍼트란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우리 아케인이 제국의 현자인 학장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 누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전 학장님을 믿습니다. 학장님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거짓을 말한단 말입니까? 전 학장님의 제자이기에 앞서 아케인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학장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케인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유피아나 선생의 통렬한 말이 사람들의 반발을 잠재웠다.
잠시 뒤 거칠게 항의하던 여러 사람들이 옆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몇 사람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학장님, 그래도 루비오 군은 마법사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케인이 되기에는 조건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왼쪽의 키 큰 마법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나를 꽤나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맞습니다. 소드 익스퍼트라면 아카데미가 아니라 기사단으로 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스웨인 왕국에는 좋은 기사단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넬슨이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우리 아카데미에도 기사단이 있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아, 아케인 나이트. 설마 거기에 루비오 군을 넣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안 됩니다. 아케인 나이트는 그곳을 관리하는 최정예입니다. 소드 익스퍼트라고 해도 그는…….”
넬슨이 그의 말을 잘랐다.
“여러분은 루비오 군이 스웨인 왕국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겁니까? 우리 아카데미가 언제 국적에 따라 사람을 차별했습니까? 제국 사람은 되고, 스웨인 왕국 사람은 되지 않는다면, 어찌 아카데미가 공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사고는 딱딱한 벽돌처럼 굳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들 아카데미의 존재 이유를 잊으신 겁니까? 왜 이 아카데미가 세워진 것입니까? 여러분은 왜 여기 모이신 겁니까?”
넬슨이 말을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었다.
약간의 정적인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닌가 싶었다.
“혹시 가슴에 달린 징표를 자랑하기 위함입니까? 아니란 것을 다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재능이 있는 자를 받아들여 흑마법사들과 싸우기 위해서 이곳에 모이신 것이 아닙니까?”
넬슨 학장이 주위 사람들을 사람을 쓰윽 훑어보면서 말했다.
“여러분, 부디 초심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루비오 군이 비록 어리더라도, 그가 소드 익스퍼트라면 아케인이 될 자격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그의 재능과 실력을 인정하지 않고 그의 출신 성분만을 문제 삼겠다면 이는 아케인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전 여러분이 현명한 판단을 해 주실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침묵이 회의장을 감싸고 돌았다.
그랬던 건가? 스웨인 왕국은 신생 국가였기 때문에 아직 기존의 왕국들 사이에서는 등한시되고 있었던 것인가?
잠시 뒤 한 중년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학장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희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한 명이 고개를 숙이자 다른 사람들도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좋습니다. 루비오 군의 가입을 인정하겠습니다.”
“스웨인 왕국도 아케인에 가입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제국의 현자라는 호칭은 허명이 아니었다. 그는 반대파를 깔끔히 잠재우고 나를 아케인에 가입시키는데 성공했다.
넬슨과 유피아나 선생의 지원 덕분에 난 아케인이 됨과 동시에 아케인 나이트가 되었다.
넬슨이 한 자루 장검을 내게 내밀면서 말했다.
“루비오 군, 검을 받게. 앞으로 아카데미를 위해서 힘써 주게나.”
나는 검을 받으면서 대답했다.
“제가 아카데미에 있는 한 아카데미를 위해서 싸울 것을 맹세합니다.”
아케인 나이트는 국가 기사단과 달리 다른 기사단과 중복 가입이 가능했다. 아케인 나이트가 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흑마법사와 악마. 그들은 전 세계의 공적이었다. 대륙의 어떤 기사단도 흑마법사와 악마를 친구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아케인 나이트는 다른 기사단에 중복 가입이 가능했다.
다음날 넬슨은 이 사실을 아카데미 전체에 공지하였고, 아카데미 전체가 들썩였다.
이제 학생들은 어디에서나 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심지어 내 앞에서도 말이다.
“루비오가 아케인?”
“아케인이라면 교수 급이잖아.”
“스무 살도 안 된 아케인이 나올 수 있는 건가?”
“안 될 건 없지. 그레시아 님도 아케인이잖아.”
“그레시아 님 같은 천재라면 모를까. 루비오는 노멀 클래스잖아. 믿을 수 없어.”
“혹시 이름만 루비오와 같은 것 아닐까?”
“여기 룬 드 루비오라고 적혀 있잖아. 스웨인 왕국의 루비오 공작에게는 룬이란 이름의 아들이 한 명밖에 없어.”
“그럼 정말 루비오란 말이군.”
루비오는 조용히 살 수 없을 만큼 유명해지고 말았다.
나는 도서관에서도 편히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동급생과 하급생들이 나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들 덕에 독서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식당이든 강의실이든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강호에 처음 나선 대사형이 이랬을까?
대사형은 어린 나이에 무당파를 대표해 영웅대연에 나갔다. 무당파를 대표하는 이는 많은 이들의 시기와 호기심을 한 몸에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대사형은 그것을 한 번도 무겁게 여긴 적이 없었다. 속으로는 어땠을지 몰라도 밖으로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그때 대사형의 행동이 얼마나 어른스러운 것인지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대사형의 그릇은 내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말했다.
“누구십니까?”
“나야.”
세실?
내가 문을 열자 그녀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왔다. 주변에 눈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무슨 일이야?”
세실이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루비오에게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잖아.”
“감사 인사는 무슨.”
“그래도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하고 싶어. 루비오는 내내 날 지켜 줬잖아. 루비오를 죽이려 했던 나를…….”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세실은 내 친구니까.”
“루비오는 항상 당연한 듯 친구를 지켜 줬지. 나도…… 플린도…… 루비오가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거야. 그런데 루비오, 이것으로 된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무슨 말이야?”
“유피아나 선생님께 들었어. 루비오가 날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포기했다면서?”
자신을 포기해? 이건 무슨 뜬금없는 소릴까?
“그게 무슨 소리야?”
“유피아나 선생님은 루비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대신 날 사들였다고 했어.”
나는 세실의 곁에 앉으면서 말했다.
“그건 아니야. 내가 세실을 살리기 위해서 약간의 꾀를 낸 건 사실이지만, 그것과 이것은 관계가 없어. 그 사람은 계속해서 날 미워할 테니까.”
세실이 말했다.
“루비오는 지금도 라인스에게 위협받고 있잖아. 나…… 며칠 전에 블레어를 만났어. 은의 블레어 말이야.”
나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세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블레어는 위험해. 그는 람과 다르단 말이야.”
“람?”
“유피아나 선생님께 죽은 간부야. 람은 유피아나 선생님이 마검사란 사실을 몰라서 허무하게 당했지만 블레어는 그렇지 않아. 그는 루비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단 말이야. 게다가 블레어는 위험할 정도로 꾀가 많아. 정말로 위험하단 말이야.”
블레어가 참모형이란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괜찮아. 블레어에게 당할 정도라면 난 그 정도 그릇밖에는 되지 않는 거겠지.”
“루비오…….”
나는 세실의 입을 식지로 막으면서 말했다.
“괜찮아. 블레어도 이기지 못하면 공작 부인에게는 상대도 안 될 테니까.”
세실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구나. 루비오에게는 공작 부인이 있었구나.”
세실의 말대로 블레어는 껄끄러운 상대였다. 아마도 그는 직접 손을 쓰지 않고 함정을 파서 날 옭아매려 할 것이다.
“세실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블레어가 아니라 암살단 전체라고 해도 나는 지지 않아. 내가 그들에게 쓰러진다면, 어머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겠지. ‘루비오 형편없구나. 너는 그것밖에 안 되는 아이였니?’ 난 이런 소리를 듣는 건 딱 질색이야. 그러니까 질 수 없어. 절대로 말이야.”
세실이 살며시 내 오른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좋아, 루비오. 내가 돕겠어. 루비오가 그런 소리를 듣지 않도록 내가 지킬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세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이 유난히 맑게 보였다.
세실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렇게 빤히 바라보지 마. 그리고…… 루비오 고마워.”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세실이 내 볼에 키스했다.
내가 멈칫하는 사이 세실이 얼굴을 붉히며 내 방을 빠져나갔다.
“그럼 난 간다.”
난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세실…….”
소녀의 키스.
소년을 설레게 하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나는 얼굴을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그녀의 입술이 지나간 자리가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