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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빌 엠페러 1(24화)
10장 사라진 플린(1)
휴일. 당연히 강의도 없었다.
“곤란한 걸……. 세실이 필요한데 말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세실의 방을 직접 찾아 나섰다.
“플린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플린의 방은 내 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플린은 이틀 전 급한 일이 생겼다며 본국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붙잡고 세실의 방을 물을 수도 없었다.
“여학생들의 방은 맞은편에 있으니까. 그쪽에 있겠지.”
나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중앙 계단을 막 넘어선 순간 나는 발을 멈추고 말았다.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여학생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남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이래서는 쉽게 접근할 수 없었다.
혹시 남자는 저 안으로 못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그래, 그럴 수도 있을 거야. 아니라면 왜 남녀 숙소가 이렇게 떨어져 있겠어.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망설이고 있는 동안 여학생들이 내 곁을 스쳐 갔다.
나는 복도 쪽으로 몸을 틀어 그녀들에게 길을 터 주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내일 강의 시간에 물어볼까?’
막 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루비오, 여긴 무슨 일이야?”
고개를 돌리자 한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야무진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레시아 선배님.”
“루비오가 별일이군. 여기까지 오다니.”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녀라면 내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을 찾아왔습니다.”
“사람?”
“네 친구를 찾고 있어요.”
그레시아가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면서 말했다.
“흠……. 루비오, 남학생은 여학생 방에 들어갈 수 없는 것 알고 있지?”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을 돌렸다.
“그……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지요. 그런데 약속 시간을 잘못 알고 있는지 아직 나오질 않았네요.”
그레시아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말해 주면 내가 조치를 취하겠어.”
“엘린다 시의 세실입니다. 저와 같은 2학년이죠.”
그레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실?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생겼지?”
“세실은 눈이 크고 파랗고, 머리가 긴 소녀입니다. 저와 같은 노멀 클래스입니다.”
그레시아가 손으로 좌우를 잇달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에 푸른 눈에 머리카락이 긴 소녀가 한둘인 줄 알아? 좀 더 구체적인 거 없을까?”
어떻게 더 설명하란 말이야? 암살단 출신이라 몸이 날렵한 소녀? 이렇게 말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한데.
“…….”
결국 그레시아가 방법을 찾아냈다. 그녀는 내가 침묵하고 있는 사이 지나가던 하급생을 불러 세웠다.
“거기. 세실이란 학생을 알아? 엘린다 시에서 온 2학년이야.”
이마가 살짝 앞으로 나온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네, 알아요. 저쪽 창가에서 두 번째 방이에요.”
“빙고.”
그레시아가 내게 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자, 내가 말을 전해 주면 루비오는 내게 뭘 해 줄 거지?”
뭘 해 주다니? 그레시아가 이런 사람이었나?
“제가 뭘 해 줘야 하는 건가요?”
그녀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쳇! 재미없어. 루비오, 너무 진지하잖아. 이건 장난이란 말이야. 장난. 여기에서 기다려. 세실을 불러 줄게.”
그레시아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잠시 후 세실이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
“루비오?”
“아, 물어볼 게 몇 가지 있어서.”
“여기선 안 되겠지?”
난 좌우를 둘러보면서 대답했다.
“조금 곤란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나가자.”
우리 두 사람은 본관을 나와 정원으로 향했다.
나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어제 일로 특별히 뭔가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그건 감사하다는 뜻이었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한 내가 지나치게 앞서 갔던 거야.’
세실과 난 외로이 서 있는 밤나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휴일이었기 때문일까? 주변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걸음을 멈추자 세실이 말했다.
“궁금한 게 뭐야?”
난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라인스 암살단에 대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해 줄 수 있겠어?”
“미안해. 난 어떤 것도 말해 줄 수 없어. 블레어가 날 찾아왔던 건 마스터의 마지막 명령을 전하기 위해서였어. 마스터는 내게 비밀을 지킬 것을 명했어.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날 죽이지 않겠다고. 블레어는 그렇게 마스터의 말을 전했어.”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그렇구나.”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명의 실패.
이것은 비단 한 명의 실패가 아니었다. 모든 암살단원의 실패와 같았다.
실패한 암살단원이 목숨을 끊지 못하고 사로잡힌다면 이것은 암살단 입장에서는 심각한 일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연락처, 집결지, 수신호, 간부들의 특기까지. 전부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암살단은 집단의 특성상 적이 많았다. 그들의 적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암살단원 모두가 위험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실패는 죽음이라는 기치를 내세운 것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블레어의 특기는 비상계 마법이지?”
“말해 줄 수 없어.”
“그것도 안 되는 거야?”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블레어가 이곳에 왔다는 것 정도야.”
나는 턱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휴우, 쉽게 갈 수는 없단 말이군.”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해.”
나는 세실에게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어쨌든 다음 상대가 블레어란 것은 알고 있으니까. 녀석만 꺾으면 당분간은 괜찮겠지.”
“응……. 아마도 그럴 거야.”
“좋아. 그 녀석을 꺾은 다음에 녀석에게 물어보겠어. 암살단에 대해서 말이야.”
암살단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 세실과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
이것이 친구란 것일까?
무당산에서의 나는 친구가 없었다. 사형제는 있었지만 이처럼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여어, 그림 좋습니다.”
세실의 목소리와는 다른 기분 나쁜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네 녀석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은발의 소년이 나무 덩굴 뒤에서 나타났다.
“세실 양께서 마스터의 명령을 지키고 계신지 확인하기 위해서 따라왔지요. 혹시라도 내부 기밀이 유출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기억을 지우는 마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마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습니다.”
따라왔다고?
그렇다면 왜 난 느끼지 못했던 거지? 설마,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세실에게 주의를 빼앗기고 있었단 말인가?
세실이 내 곁으로 한 발 더 다가왔다.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서 은신 마법을 사용한 거야.”
“은신 마법?”
블레어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짝짝!
“정답입니다. 세실 양께서는 판단력도 나쁘지 않고 검에 대한 이해도 높은 편인데, 루비오 군에게는 무척 약하군요. 무엇 때문일까요? 혹시…….”
나는 블레어의 말을 재빨리 잘랐다.
“우린 친구야.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야?”
블레어가 냉소했다.
“루비오 군, 친구끼리는 키스하지 않습니다.”
이 녀석…….
어제 내 방에도 숨어들어왔던 건가?
“…….”
날 대신해서 세실이 나섰다.
“블레어, 볼일이 끝났다면 이만 사라지는 게 좋을 걸? 지금 거리라면 내 비수가 네 심장을 충분히 꿰뚫는 건 어렵지 않아.”
블레어가 미소를 지으면서 뒤로 몸을 뺐다.
“좋습니다. 불청객은 사라져 드리지요.”
우리 두 사람은 블레어를 쫓지 않았다.
대신 우린 등을 돌리고 어색하게 섰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세실이었다.
“블레어의 말은 신경 쓰지 마.”
난 오른손을 뒤로 내밀어 세실의 손을 잡았다.
“신경 쓸 리 없잖아.”
세실이 말했다.
“루비오, 손 따뜻하다.”
햇살이 정원 한가운데 선 우리 두 사람을 잔잔히 비춰 주었다.
***
아케인이 된 다음부터 갑자기 일이 많아졌다. 넬슨 영감과 그레시아 황녀는 아케인으로서 지켜야 할 규칙이 가득 담긴 책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능하면 일주일 안에 끝내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일주일 내로 머릿속에 넣으란 말인가?
두 사람 덕분에 난 일주일 내내 내공 수련을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규칙 다음에는 아케인으로서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배웠다.
사실 이건 불필요한 것이었다. 아케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흑마법사로부터 세상을 지킨다.
이것을 일일이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하다니. 정말로 불필요한 것이었다.
그레시아 황녀와 넬슨 영감 덕분에 내 머릿속에서 블레어란 존재는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덜컥!
난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레시아가 시험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핀잔을 주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난 아케인에 대한 것들을 머릿속에 넣느라 며칠째 제대로 수업을 듣지 못했다.
그러니 시험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레시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케인 나이트는 우등생 중의 우등생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선도위원회를 나와 세 걸음쯤 걸었을 때였다. 기둥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급히 내력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했다.
조금 이른 감이 있긴 했지만 블레어의 기습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거기 누구지?”
또각, 또각.
한 소년이 반쯤 얼굴을 드러냈다.
“나야, 메디세.”
“아! 메디세 선배님.”
“지난 번에는 고마웠습니다.”
“아니야. 내가 고마웠지.”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 정도 부상은 문제도 아니라고.”
메디세 백작의 아들인 메디세는 스웨인 그룹의 리더였다.
“그런데 선배님께서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메디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급생들이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아.”
“절 노리고 말입니까?”
“그래.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일단 움직이고 있어. 자세한 소식을 알게 되면 또 전해 주도록 하지.”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도움, 고맙습니다.”
그러자 메디세가 오른손을 흔들면서 말했다.
“루비오, 나도 예전처럼 좌시하지는 않을 거야. 누군가 오는 것 같으니, 그럼 이만.”
쿵쿵쿵쿵!
메디세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급박한 발소리였다.
익숙한 얼굴이 이쪽을 향해 급히 뛰어오고 있었다.
“루비오!”
세실이잖아.
나는 그녀에게 급히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세실이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여기선 좀 곤란해.”
선도위원회 옆에는 음악실이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음악을 필수로 배우진 않았지만 취미로 배우는 사람은 몇몇 있었다.
이 음악실은 그런 특별한 몇몇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금은 수업이 모두 끝났기에 비어 있었다.
나는 세실과 함께 음악실로 들어갔다.
“암살단 녀석이야?”
세실은 내 물음에 쪽지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세실이 미간을 좁혔다.
“플린이 납치되었어.”
“플린이? 블레어의 짓이군! 비겁한 녀석!”
내가 화를 내자 세실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블레어가 아니야.”
“블레어가 아니라고? 그럼 아자크 왕자?”
“아자크 왕자도 아니야.”
나는 재빨리 쪽지를 펼쳐 읽었다. 쪽지에는 아주 생소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홀트 왕국의 발렌스라. 전혀 모르겠어. 어떤 녀석인지.”
세실이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암살단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이거 어떻게 하지? 플린의 목숨을 구하고 싶다면 자정에 대강당으로 나오라는군.”
세실이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발렌스의 정체에 대해서 조사해 볼게. 저녁 식사 전까지는 어떻게든 끝내겠어. 그다음에 대책을 세우자.”
“그래, 일단 발렌스가 어떤 녀석인지 알아내는 것이 먼저겠지.”
우리 두 사람은 각자 저녁 식사 전까지 정보를 수집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