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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4화)
제2장 반로환동(返老還童)(2)
조바심을 내던 아이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야! 야! 어서 눈 좀 떠 봐. 어서 눈 좀 떠 봐. 야! 어서 눈을 떠서 내 얼굴을 좀 봐 줄래?”
하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이가 보기에는 말이다.
“아이잉! 나 배고파! 어서 일어나서 나한테 맛있는 걸 주란 말야. 야! 야! 어서 눈 좀 떠 봐!”
아이가 아무리 고함쳐도 할아버지는 눈을 뜨기는커녕 돌부처처럼 미동도 없었다.
혼자 소리치던 아이는 할아버지에게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대뜸 그의 긴 수염을 마구 잡아당겼다. 수염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자, 이번에는 그의 몸을 한 바퀴 휘감고 있던 백발의 머리칼까지도 마구 잡아당겼다.
“아이 참! 야 이 잠꾸러기야! 이제 그만 일어나!”
***
‘기척이나 호흡으로 보아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민간인이라고 여겨 그나마 안심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 대체 뭐야, 이 녀석은? 곤륜파의 떨거지들 때문에 극심한 내상을 입어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기 직전이거늘…….’
뇌진천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연방 소리쳤다.
“야! 어서 일어나! 어서!”
‘으윽! 어린아이의 이런 앙칼진 소리는 정말 딱 질색인데…….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아. 내가요상(內家療傷)을 끝마치기 전까지는 움직일 수도 없고, 이거 정말 미치겠군.’
“일어나! 일어나! 당장 일어나란 말이야!”
한동안 난리 치던 아이가 갑자기 잠잠해졌다.
‘이제 포기하고 그만 돌아가려나? 그래, 이제라도 물러나면 지금까지의 무례는 없었던 걸로 해 주지. 고마운 줄 알아.’
그것은 섣부른 기대였다.
아이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뇌진천의 우측 눈꺼풀을 강제로 위로 들어 올린 것이다.
뇌진천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못했으나, 덕분에 아이의 모습은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아직 많이 어린 데다가 곱상한 용모를 지니고 있어서 외견상으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뇌진천은 아이에게서 풍기는 기운을 통해 소년임을 알아차렸다.
‘온 세상을 공포에 떨게 하던 이 혈해존자가 이런 쥐방울만 한 꼬맹이에게 이런 농락을 당하게 될 줄이야.’
뇌진천이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 동안에도 소년의 철딱서니 없는 행동은 계속되었다. 귀에다가 바람을 불기도 했고, 콧구멍에다가 손가락을 쑤셔 넣기도 했다.
발바닥을 간질이기도 했고, 겨드랑이를 간질이기도 했다.
급기야 소년은 목마라도 타려는 듯 그의 어깨 위에 양다리를 걸치고 올라앉기까지 했다.
소년은 마치 장난감이라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뇌진천의 전신을 마음대로 주물럭거렸다. 그것도 금세 질렸는지 소년은 그로부터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내 통곡으로 변했다.
“으아앙! 으아아앙! 으아아아앙! 어째서 나를 모른 척하는 거야? 나, 너무 무섭고 힘들어. 그리고 배도 너무 고프단 말이야. 제발 눈 좀 떠 봐! 제발 날 좀 봐 줘!”
마치 유리를 긁는 것 같은 소년의 앙칼진 목소리는 뇌진천의 심기를 사정없이 할퀴어 댔다.
‘미쳐도 정말 단단히 미쳤군. 감히 내 성질을 이토록 건드리다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내 당장 네 모가지를 비틀어서 죽여 버릴 테다. 아니, 그러면 너무 쉽게 끝나니까 안 되지. 그래, 천천히 가죽을 벗긴 다음, 불태워 죽여 주마.’
이렇듯 무시무시한 생각이 무색하게도 뇌진천의 귓전에는 전혀 뚱딴지같은 내용의 명랑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다. 내가 할부지한테 선물 하나 줄게. 이걸 줄 테니까 제발 눈 좀 떠 봐! 알았지?”
소년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아기자기한 목걸이였다. 소년은 그것을 걸어 주려고 뇌진천에게로 재차 다가갔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 조금만 더 있으면 다 끝나는데……. 젠장! 정말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녀석이로군.’
뇌진천의 곁으로 바짝 다가온 소년은 그에게 목걸이를 걸어 주려 했으나, 지나치게 긴 머리카락 때문에 불가능했다.
잠시 망설이던 소년은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마침 발검된 상태로 한쪽 구석에 놓인 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헤헤헤! 저거면 되겠다.”
소년은 만면에 미소를 떠올리며 칼의 손잡이를 손에 거머쥐고서 들어 올리려고 했다.
“아이 참. 뭐가 이렇게 무거운 거야?”
소년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이얍!”
그렇지만 칼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히 내 폭마혈검에 손을 대다니……. 당장 관두지 못해?’
그때였다. 낑낑거리던 소년은 얼떨결에 폭마혈검을 들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금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손에서 미끄러진 폭마혈검은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폭마혈검의 서슬 시퍼런 칼날은 뇌진천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여태껏 많은 사람의 피 맛을 보더니 이제는 주인의 것까지 맛보고 싶은 모양이다.
‘윽, 이런!’
뇌진천은 운기조상을 도중에서 중단해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겨우 폭마혈검의 칼날은 피해 냈다. 그러나 상태가 아주 심각해졌다. 전신의 혈관이 당장에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외부로 돌출되었다.
급기야 눈과 코, 귀를 비롯한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화입마에 제대로 걸려들었구나. 이대로라면 앞으로 반각도 채 못 되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이제야 겨우 바깥세상으로 나왔거늘, 이리도 허무하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뇌진천의 시선은 엎어진 채 아파서 울고 있는 소년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그의 안광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래, 그 방법밖에 없어. 비록 이 그릇에 모은 막대한 공력은 다 날아갈 테지만, 곤륜의 무공절학들을 집대성하여 창안이 무극신공(無極神功)을 위시하여 여태껏 축적한 모든 실전경험과 강호에 대한 지식은 고스란히 이어진다. 비록 육체적으로 새로 시작한다고 해도 다시금 무림을 휘어잡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는 않을 터. 좋아. 결행하자!’
뇌진천은 가까스로 몸을 가눈 다음, 소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오른손이 소년의 정수리에 닿는 순간이었다.
쏴아아아!
그 일대는 갑자기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구덩이 속이 온통 찬란한 광채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았다.
실로 장관이었다.
구덩이 밖으로는 광채의 안개가 녹음이 우거진 숲 전체로 스멀스멀 퍼져 나갔다.
잠시 후, 휘황찬란한 광휘가 모두 사라지자, 뇌진천의 거구는 썩은 고목처럼 옆으로 쓰러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만히 엎드려 있던 소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소년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까 전과 같은 개구쟁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매서운 안광을 번뜩이며 그야말로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년은 몸 풀기 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탈혼대법(奪魂大法)은 성공적인 듯하나…….”
소년 뇌진천의 얼굴에는 실망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몸집이 작은 건 둘째 치고, 이 정도로 약골일 줄은 몰랐군. 이걸 쓸 만하게 만들려면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겠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소년 뇌진천은 금세 체념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화경(神化境)을 넘어서야 또다시 탈혼대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겠군. 어디 보자…….’
뇌진천은 깊은 사색에 잠겨 들었다.
“부유한 상단의 금지옥엽이라……. 이제야 이 녀석의 아까 그 언동이 이해되는군. 기왕 이리된 이상,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는 수밖에……. 그래, 이제부터 난 한수겸(韓粹謙)이다.”
2
만상상단(萬象商團)은 청해성(靑海省)을 대표하는 상단으로 서쪽의 오로목제(烏魯木齊)와 남쪽의 랍살(拉薩)을 연결해 주는 서녕(西寧)에 기반을 두었다.
전장, 주루, 객잔, 도박장 등 청해성 곳곳에 백여 개에 달하는 점포를 운영했을 뿐 아니라, 무예가 뛰어난 표사들을 수백이나 둔 표국도 거느리고 있었다.
만상상단이 그동안 청해성에서 이토록 크게 성장한 것은 곤륜파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곤륜파도 반대급부로서 만상상단으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운영 자금을 공급 받았다.
바로 이 만상상단의 단주인 한경인(韓耿璘)에게는 늦은 나이에 얻게 된 막내아들이 있었으니, 올해로 여덟 살이 된 한수겸이었다.
한경인의 아내는 늦둥이를 낳다가 산고를 견디지 못하여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능숙한 산파의 도움으로 한수겸은 빛을 볼 수 있었으나, 지극히 허약한 체질을 갖게 되었다.
이에 한수겸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비롯하여 상단 가솔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라났다.
그야말로 금지옥엽 중의 금지옥엽이었다.
이런 성장 배경으로 인해 한수겸은 자연히 세상 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천방지축 개구쟁이가 되었다.
몸이 약한 탓에 언제나 집안에만 갇혀 지내야 하는 현실이 답답했던 한수겸은 오로목제로 표행을 떠나는 행렬에 끼어들었다. 나귀가 끄는 짐수레의 상자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표행을 떠난 지 반나절 만에 발견되기는 했지만, 한수겸은 돌아가는 걸 한사코 거부했다.
표행을 이끄는 표두로서도 만상상단에서는 황태자나 다름없는 소단주를 강제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이 소식은 금세 한경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비록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아들에게 한 번쯤은 바깥바람을 쐬게 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표사들의 수를 더욱 보강함과 더불어 한수겸의 표행 참가를 허락했다.
곤륜산 근처에서 행렬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단조로운 표행에 싫증을 느낀 한수겸은 표사들의 눈을 피해 행렬을 이탈했다가 길을 잃었다.
그렇게 하여 숲 속에서 한동안 헤매던 한수겸은 뇌진천과 조우하고, 결국 탈혼대법에 의해 몸까지 빼앗긴 것이다.
***
뇌진천은 자기가 원래 입고 있던, 그러나 지금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버린 예전의 육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군. 그야말로 무림에서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강환지체(剛環之體)였거늘…….”
그랬다. 강호인들에게 있어서 강환지체는 무림지존을 위해 하늘이 내렸다고들 하는, 그야말로 무공에 최적화된 특성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육체였다.
무림의 역사상 불세출의 위명을 떨쳤던 이들은 하나같이 강환지체였다는 게 강호의 정설이다.
태을진인의 사부이며, 곤륜파의 전임 장문인이었던 태명진인(太命眞人)은 녹림의 무리에 의해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된 뇌진천을 우연히 발견하여 곤륜파의 문하생으로 거두었다.
아무리 장문인이라고는 해도 이런 방식으로 제자를 뽑는 것은 규율이 엄격한 곤륜파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경우였다. 그러나 본산에서는 누구 하나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뇌진천이 강환지체로 태어난 아이였기 때문이다.
곤륜파 수뇌부는 뇌진천의 신상을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했다. 만에 하나 이 사실이 외부에 새어 나간다면 정파와 사파의 구분 없이 뇌진천에 대한 쟁탈전이 벌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뇌진천은 본산의 다른 문하생들과 마찬가지로 조사동(祖師洞)에서 개파조사를 비롯한 역대 조사들에게 제례를 올리고, 곤륜파의 장문인과 집법장로들 앞에서 정식으로 사제의 예를 갖춘 이후, 제일 말단의 제자로 출발했다.
그러나 역시 진주는 진흙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다. 동료들과 비교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뇌진천이 강환지체라는 사실은 금세 본산의 제자들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그 무렵, 그는 곤륜파의 제자로 확실히 자리 매김을 한 터라 수뇌부에서도 그가 사문을 배신하고 다른 곳으로 갈 것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못 먹는 밥이라면 재라도 뿌리자는 심산으로 외부의 자객에 의해 암살을 당할까 봐 노심초사하여 뇌진천을 더욱 특별하게 대우했다.
곤륜파에서는 그야말로 온갖 정성을 다하여 뇌진천을 훈육했다. 어지간한 영약들도 죄다 뇌진천의 몫으로 돌아갔다. 곤륜파에서는 그야말로 황태자로 자라난 것이다.
이러한 관심과 특별 대우를 차치하고라도 과연 강환지체답게 뇌진천의 무공에 대한 성취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물을 빨아들이는 목화솜처럼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몸이 먼저 그 어떤 무공이든 즉각적으로 받아들였다.
내공의 증진 속도는 어지간한 무림인의 열 배 이상이었다. 이에 그는 고작 마흔의 나이에 곤륜파의 모든 절학을 습득하여 그 끝을 보았다.
그 이후로도 뇌진천은 오로지 무공에만 매진하여 일갑자(육십 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 출신입화지경(出神入火之境)에 이르렀다. 무인으로서 최고의 정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듯 무공에서 더 이상 이룩할 것이 없어질 정도가 되자, 뇌진천의 관심사는 서서히 외부로 향했다. 이미 지존 중의 지존이 되어 버린 그는 사문의 어른들이나 규율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고리타분한 법도나 명분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온 세상을 자신의 발아래에 무릎 꿇리겠다는 맹렬한 야심이 공허하기 이를 데 없던 그의 마음을 점령했다.
일단 새로운 목표를 정하자, 뇌진천은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자신을 거두어 준 태명진인을 제외한 수뇌부를 전멸시키고 단숨에 곤륜파를 장악한 것이다.
그래도 자신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던 태명진인만큼은 전신의 혈도를 제압하여 지하의 뇌옥에 감금하는 선에서 그쳤다. 이것이 그가 베푼 유일한 자비였다.
그 이후, 뇌진천은 정파무림의 양대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소림사와 무당파까지 공격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고, 숭의맹에서도 감히 건드릴 엄두를 못 내던 화정회(火正會)까지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소림사의 방장대사와 무당파의 장문인이 목숨을 잃게 되면서 곤륜파와 숭의맹의 오랜 혈맹 관계는 완전한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화정회라고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회주가 뇌진천의 손에 목숨을 잃으면서 내분까지 일어났던 것이다. 흑혈회 역시 그때 갈라져 나온 일파였다. 그 이후, 화정회는 내부 결속을 위해 수라혈교(修羅血敎)로 개칭하게 된다.
이토록 무림 전체를 홀로 휘저으며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지금은 지극히 작고 허약한 몸을 가지게 되었다.
무공은커녕 일상에서의 평범한 활동조차 쉽지가 않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뇌진천은 회한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이제는 한낱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린 예전의 육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