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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5화)
제2장 반로환동(返老還童)(3)


3

“이제 와서 미련을 가져 봤자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렇게 중얼거린 뇌진천은 오른손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폭마혈검의 손잡이를 거머쥐고 무심코 들어 올리려 했다.
“으악!”
뇌진천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토했다. 손목과 팔꿈치에서 찌릿한 고통이 급습해 왔던 것이다.
“헉! 뭐야?”
탈혼대법이 펼쳐지기 전에 원래 몸의 주인이 너무 무리를 해서 칼을 들어 올린 탓에 관절과 인대에 충격이 가해진 모양이었다.
자신이 비명을 토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는 한편, 오기가 동한 뇌진천은 왼손을 동원하여 재차 들어 올리려 했다.
“으윽!”
조금 전과 같은 비명은 아니었으나, 이번에도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뇌진천의 미간에 깜찍한 주름이 생겨났다.
“제기랄! 이 정도 무게의 검은 내가 다섯 살 때도 거뜬하게 들고 휘둘렀건만…….”
바닥에 널브러진 폭마혈검을 노려보던 뇌진천의 얼굴에는 금세 체념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지금의 내 형편에 폭마혈검을 들고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욕심이지. 좋아. 이건 잠시 이곳에 보관해 두자.’
뇌진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벽 쪽의 통로로는 도저히 빠져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저곳밖에 없는데…….’
뇌진천은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 통로 위로 드리운 나무뿌리를 잡았다. 하지만 두 팔에 얼얼한 고통 때문에 금세 놓쳐 버렸다. 제자리에서 꼬꾸라진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 기가 막히는군. 아무리 몸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천하의 혈해존자가 대체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결연한 표정으로 다시금 도약한 뇌진천은 드디어 나무뿌리를 두 손으로 붙잡았다. 그 순간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구덩이 위로 올라서려고 애썼다.
두 팔은 파르르 떨렸지만, 물장구치듯 앙증맞은 두 다리를 흔들면서 몸부림을 친 끝에 간신히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뇌진천은 제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헉헉헉!”
턱밑까지 차올랐던 호흡이 가지런해지면서 몸의 열기가 식자, 이제는 오싹한 한기가 덮쳐 왔다.
“헉! 뭐야, 이건 또?”
냉큼 자리에서 일어난 뇌진천은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의 가냘픈 전신은 안쓰러울 정도로 파르르 떨렸다.
추위!
그것은 까마득하게 오래전에 한서가 불침하는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경지에 이르렀던 뇌진천으로서는 참으로 낯선 감각이었다.
‘천하의 혈해존자가 이깟 추위 때문에 떨고 있는 꼴이라니……. 정말 한심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아무리 떨지 않으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다.
늦가을, 홀로 산속에 있는 가녀린 꼬마의 몸으로는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때, 내부에서 또 다른 고통이 덮쳐 왔다.
꼬르르륵!
등봉조극(登峰造極)의 경지에 도달한 이후, 일주일 정도는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운기조식만으로도 신진대사를 조절할 수 있었던 뇌진천으로서는 배고픔 역시 낯설었다. 뱃가죽이 등짝과 조우하려고 발광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갈수록 태산이군.”
뇌진천은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먹을 만한 게 없을까?’
잠시 후, 뇌진천의 얼굴에는 미소가 깃들었다.
‘사삼(砂蔘, 더덕)이로군. 마룡동에서 이끼만 먹으며 이십 년을 버틴 나로서는 그야말로 훌륭한 식사 거리가 아닌가?’
더덕 옆에 쪼그리고 앉은 뇌진천은 뿌리 부분의 흙을 손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사리같이 가녀린 손으로 쉽게 파일 만큼 땅이 무르지가 않았다. 손끝이 아파 오자, 모서리가 뾰족한 돌멩이를 주워서 그것으로 땅파기 작업을 재개했다.
어느 정도 땅을 파내자, 뇌진천은 이제 줄기의 밑동을 두 손으로 거머쥔 채 힘껏 잡아당겼다.
이미 팔에는 감각이 없어진 터라, 아까 전과 같은 찌릿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마음껏 잡아당길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더덕 뿌리가 전혀 뽑힐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부아가 잔뜩 치밀어 오른 뇌진천은 자기 성미를 이기지 못하여 제자리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내질렀다.
만약 강환지체의 몸을 입고 있던 뇌진천이 이런 상태에 접어들었다면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살풍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영락없이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한동안 신경질을 부리며 난리를 치자, 그래도 다소 속이 시원해졌다. 그와 동시에 또다시 허기가 기승을 부렸다.
‘배고픈 게 이리도 고통스러운 감각이었던가?’
게다가 속에서 치민 천불이 가라앉아 잠시 잊혀졌던 추위까지 다시금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에 뇌진천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더덕을 노려보았다.
“어디 네가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한 번 해보자! 혈해존자의 위명을 걸고 맹세하건대 반드시 너를 먹고야 말리라!”

***

더덕의 밑동을 두 손으로 꽉 거머쥔 뇌진천은 자신의 몸무게까지 실어 전력으로 그것을 잡아당겼다.
뽀∼오옹!
너무나 용을 쓴 탓에 뒤에서 새어 나온 소리였다. 그러나 뇌진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잡아당겼다. 단단히 악에 받친 그는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를 내질렀다.
“이야아∼얍!”
기합이 효과가 있었던 탓일까?
드디어 더덕이 뿌리째 뽑혔다. 그런데 너무 갑작스레 뽑힌 탓에 뇌진천은 몸의 균형을 잃고서 그대로 허공중으로 떠올랐다. 분명히 그의 머리로는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과 같은 곤륜파의 탁월한 신법을 펼치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지만, 몸이 따라 줄 리가 만무했다.
“까아∼앗!”
앙칼지면서도 깜찍한 비명에 이어……. 털썩!
결국 뇌진천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런데 어찌나 아픈지 두 눈에서는 일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으아∼앙!”
뇌진천은 부지불식간에 이와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엉덩이의 통증이 어느 정도 완화될 무렵, 그는 황급히 오른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또한, 뇌진천은 자신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액체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맹호위서(猛虎爲鼠)라고 했던가?
참으로 위엄을 잃은 호랑이는 쥐와도 다름이 없음을 처절하게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뇌진천은 황당해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천하의 혈해존자가 엉덩방아를 찧어서 아프다고 찔찔 짜게 될 줄이야!
뇌진천에게는 이와 같은 배고픔이나 추위, 고통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낯설었다. 그는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러나 뇌진천은 이내 자존심도 직면한 배고픔 앞에서는 호사스러운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호들갑 떨 것도 없을 테지. 일단 허기부터 달래야겠다.’
뇌진천의 시선은 바로 앞에 떨어져 있던 더덕 뿌리로 향했다. 큰 뿌리에서 옆으로 뻗은 작은 뿌리를 떼어 낸 그는 흙먼지를 잘 털어 낸 다음, 한 입 깨물었다. 와그작 하는 소리와 더불어 쓰디쓴 맛이 그의 미각을 옥죄어 왔다.
“캑! 퉤!”
뇌진천은 당장 입 안에 있던 더덕 뿌리를 뱉어 버렸다. 도무지 인간이 먹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썼던 것이다.
“이건 또 뭐야? 더덕 맛이 도대체 왜 이래?”
사실, 문제는 더덕이 아니었다. 언제나 진수성찬만 접하다 못해 그마저도 편식을 일삼아 왔던 귀공자의 혀가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뇌진천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참으로 가지가지 한다!”
뇌진천은 더덕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야말로 계륵이다.
버리자니 아깝고, 그렇다고 먹을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 무렵, 그토록 난동을 부리던 배고픔은 다소 잦아들었다. 언제 또 괴롭힐지는 알 수 없으나, 당장은 견딜 만했다.
‘사삼 정도면 산에서는 정말 고급 식량인데……. 이런 몸을 가지고는 심산유곡에서 무공 수련에만 정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어. 수련은커녕 하루도 못 견디고 뒈져 버릴지도 몰라. 일단 몸부터 제대로 추스른 다음에 무얼 해도 해야겠어.’
뇌진천은 몸의 원래 주인의 기억을 더듬어 표행 중이던 무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래도 저곳이 내 무덤인데…….’
뇌진천은 주린 배를 움켜쥐며 다시 구덩이로 다가갔다. 그는 주변에 있는 낙엽이나 나뭇가지들을 한 아름씩 가지고 와서 그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한참을 공을 들인 끝에 이젠 예전의 육체가 있던 구덩이는 감쪽같이 은폐되었다.
뇌진천은 그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주변에는 잎사귀가 무성한 고목들이 많고 가을은 더욱 깊어지는 중이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 많은 낙엽이 떨어질 테고, 결국 무덤은 점점 더 깊숙이 감춰질 것이다.
‘이곳은 일반인들은 쉽게 진입하기 힘들지만, 또한 강호인들의 입장에서는 은신할 만한 장소가 아니다. 그야말로 교묘하게 심리적 사각을 파고든 지역이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내 무덤은 쉽사리 발각되지 않을 터. 언젠가 때가 되면 내 다시 한 번 찾아와서 폭마혈검을 회수하리라.’

***

대략 이 식경을 헤매던 끝에 뇌진천은 드디어 목표한 장소에 이르렀다.
그 순간, 뇌진천의 두 눈은 크게 떠졌다.
그곳에는 처절한 살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탓인지, 전원이 몰살을 당한 상태였다.
그 순간, 뇌진천은 곤륜파를 쳐들어온 흑의인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특히 그들의 두목은 무척 강한 자였다.
“아마도 그놈들에게 당한 모양이군.”
뇌진천은 앞이 캄캄해졌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집은 서녕(西寧)에 있는 것 같은데, 대체 그곳까지 어떻게 간단 말인가?”
그저 한숨만이 나올 따름이었다.
뇌진천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마침 저쪽으로 말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었다.
“훗! 저걸 타고 가면 되겠군.”
뇌진천은 말을 향해 걸어갔다. 고삐를 거머쥐려고 하자, 말은 거세게 투레질을 했다. 화들짝 놀란 그는 뒤로 자빠져 또다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젠장! 이젠 한낱 미물까지 나를 우습게보는구나. 근데 어찌 된 게 이놈의 몸뚱어리는 걸핏하면 자빠지는 거야? 이렇게 둔해서야 원. 그러고 보면, 설사 저놈이 가만히 있다 해도 이렇게 작고 둔한 몸으로 저걸 제대로 탈 수 있을 리가 만무하지.’
“이렇게 된 이상, 먹을 거나 찾아보자.”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는 와중에 뇌진천은 수송 중이던 짐뿐만 아니라, 돈과 귀중품까지도 그대로 있음을 발견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원한 관계인가? 하긴 청해성에서 상단을 한다면 곤륜파로부터 보호를 받아 왔을 테고……. 곤륜파를 공격한 놈들의 입장에서는 이들 역시 적이나 마찬가지일 터.’
뇌진천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진지한 표정은 금세 조바심으로 바뀌었다. 점점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꾸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뇌진천은 물통과 건량을 발견했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 얼른 허기와 목마름을 달랬다.
여덟 살짜리 어린아이가 시체들의 틈바구니에서 이렇게 식사를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참으로 이채로운 광경이었다.
배가 부르자, 뇌진천은 재차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 여행을 하려면 노자가 필요하지.”
뇌진천은 무게가 많이 나가는 동전이나 은자는 건드리지 않고, 종이로 된 전표만을 챙겼다.
‘그래도 청해성에서는 제일가는 상단에서 발행한 것이니, 어디에서나 다 통할 테지. 허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뇌진천은 주로 여자 시체들을 살피면서 진주나 목걸이, 반지와 같이 무게는 가벼우나 가치는 큰 귀중품들을 챙겨서 안주머니 속에 잘 갈무리했다.
또한, 뇌진천은 두꺼운 피풍의 하나를 발견했다.
‘노숙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뇌진천은 비수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그것으로 큰 피풍의를 자신의 몸에 맡게 잘랐다. 그런 다음, 어깨 위로 둘렀다. 그러자 꽤 그럴 듯한 차림새가 되었다.
‘무림제패 같은 건 잠시 접어 두고 일단은 새 육체의 주인이 살았던 집으로 가자.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야.’


4

뇌진천은 이윽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차올랐다. 뇌진천은 할 수 없이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정말이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군. 이래서야 대체 언제 서녕까지 간단 말인가? 그걸 떠나 당장 오늘이 문제로군.”
뇌진천은 서글픔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온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몰골이 참담하기가 이를 데 없다.
‘날이 저물기 전에 얼른 객잔을 찾아내야 한다.’
결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뇌진천은 재차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외딴곳에 자리한 산신각(山神閣)이 뇌진천의 시야에 들어왔다. 완전히 퇴락하여 주변의 담장은 허물어졌고, 곳곳에는 잡초로 뒤덮인 상태였다.
본당의 건물 또한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처마 밑은 온통 거미줄로 뒤엉켜 있었다.
이미 날이 거의 저물어 가던 터라 더는 객잔을 찾아 헤맬 여유가 없었다. 이에 뇌진천은 산신각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뇌진천은 서너 걸음을 옮기다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산신각 안으로부터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