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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6화)
제2장 반로환동(返老還童)(4)
“이건 틀림없이…….”
뇌진천은 황급히 발걸음을 돌이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때가 늦었음을 깨달았다.
산신각 안에서 십여 마리나 되는 늑대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등을 보이고 달아난다면 녀석들은 지체 없이 달려들 것이 자명했다.
‘지금의 난 무공은 차치하고라도 기본적인 체력이나 완력조차 없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인 셈이지. 궁여지책으로 어린아이의 몸을 빌렸건만, 한낱 이리 떼의 밥으로 전락할 줄이야.’
뇌진천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표정으로 대장 늑대를 노려봤다.
비록 어린아이였으나 조금도 물러섬이 없는 당당한 태도 때문인지 대장 늑대 또한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이렇듯 뇌진천과 늑대 무리의 대치는 잠시 이어졌다.
그러나 대장 늑대는 금세 상대방의 허세를 간파했다. 그와 동시에 섬뜩한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덮쳐 왔다.
‘젠장! 이렇게 끝나는구나. 허나 내 비록 늑대에게 갈가리 찢길지언정 절대로 구차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으리라.’
뇌진천은 눈도 감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장 늑대가 뇌진천의 지척까지 이르기 직전에 어디에선가 수리검 하나가 섬전처럼 날아들었다.
그것은 대장 늑대의 몸에 적중했다.
날아든 수리검의 위력이 제법 대단하여 대장 늑대는 하릴없이 반대편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수리검이 날아든 방향에서는 청색 무복의 장한들 예닐곱이 달려오고 있었다. 대장 늑대가 당한 데다가 범상치 않은 인간들이 몰려오자, 나머지 늑대들은 재빨리 줄행랑을 쳤다.
‘저놈들은 또 뭐지? 어쩐지 낯이 익은 것 같은데…….’
뇌진천은 몸 주인의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 보았다. 특히 무리를 이끄는 중년인의 얼굴은 친근하게 느껴졌다.
‘정확하게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적이 아닌 건 분명하군. 아무튼 살았다.’
뇌진천이 내심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한경인의 첫째 아들이자 만상표국의 총표두를 맡고 있던 한성호(韓成晧)였다.
“겸아! 괜찮으냐?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그래도 여전히 경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던 뇌진천의 귓전으로 흘러드는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어∼어!”
이와 같은 신음과 더불어 뇌진천은 제자리에서 허물어졌다. 갑자기 긴장이 사라지자 두 다리도 풀려 버린 것이다.
한성호는 신속하게 다가와 바닥으로 넘어지려는 그를 안아 들었다.
‘헉!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다니……. 허나 이놈의 몸뚱어리 자체가 부실한 걸 난들 어찌하랴?’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난감해진 뇌진천은 얼른 눈을 감고 기절한 척했다. 그러나 워낙 피곤했던 터라 그는 금세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당황하여 막내둥이의 상태를 살피던 한성호는 코 고는 소리가 나직이 들려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3장 와호잠룡(臥虎潛龍)(1)
1
긴 속눈썹으로 둘린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자, 그 아래에 감추어진 눈동자가 깜찍한 자태를 드러냈다.
반쯤 떠진 뇌진천의 눈은 여전히 잠에 취한 상태였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깔끔한 침상, 휘황찬란한 휘장과 장식품들. 잠시 후, 멍하던 그의 두 눈동자에는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여긴 어디지? 대체 뭐가 어찌 된 거지?’
바로 그때, 뇌진천의 귓전으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겸아! 드디어 일어났구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방문을 통해 들어오는 홍삼의 소녀가 보였다. 한설지(韓雪池)였다.
올해로 열여섯 살이 된 한설지는 몹시 귀여운 소녀였다.
양옆으로 땋아 내린 머리칼은 아기처럼 뽀송뽀송한 그녀의 우윳빛 피부만큼이나 산뜻했고, 사과처럼 빨갛게 영글어 가는 두 뺨은 싱그럽기가 그지없었다.
침상으로 뽀르르 달려와서 뇌진천을 응시하는 그녀의 사슴처럼 큰 두 눈망울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괜찮은 거야? 어디에 아픈 데는 없어?”
‘이 물건은 또 뭐지?’
뇌진천은 도끼눈으로 한설지를 노려보았다.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계집인데?’
아니나 다를까? 한설지는 느닷없이 뇌진천을 껴안았다.
“캐액!”
뇌진천은 신음했다. 한설지가 숨이 막힐 정도로 자신을 꽉 껴안았기 때문이다.
뇌진천은 한설지에게서 벗어나려고 버둥댔지만, 그녀는 좀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열이 뻗친 그가 욕설을 내뱉으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겸아, 네가 죽었을까 봐 이 누나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정말 고마워. 살아 있어 주어 정말 고마워.”
향긋한 방향과 더불어 한설지의 고동 소리와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뇌진천은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로부터 이런 애정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제기랄! 낯간지럽게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뇌진천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한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내던 한설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확 바뀌었다.
특유의 말괄량이 같은 표정이 떠오른 것이다.
한설지는 갑자기 새침한 시선으로 뇌진천을 응시했다.
“쳇! 뭐야? 누님께서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너는 무뚝뚝하게 가만히 있다니……. 겸아, 넌 내가 반갑지 않은 거야?”
‘대체 이 계집아이는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거지?’
뇌진천은 일단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자 한설지의 얼굴에는 이채가 떠올랐다.
“에∼에? 너, 어쩐지 분위기가 많이 바뀐 것 같다?”
연이어 한설지의 얼굴에는 근심의 빛이 몰려왔다. 참으로 변화무쌍한 표정의 소녀가 아닐 수 없었다.
“하긴, 어린 나이에 그렇게 힘든 일을 겪었으니…….”
한설지는 안쓰러운 시선으로 뇌진천을 가만히 응시했다.
“겸아! 너 정말 괜찮아?”
뇌진천은 한설지의 눈길이 참으로 부담스러웠다. 지금껏 그 누구와의 눈싸움도 피해 본 적 없는 그였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눈빛을 교환하는 것 자체가 몹시 괴로웠다.
“괘,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거라.”
뇌진천이 시선을 회피하면서 이렇게 말하자, 한설지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쳇! 뭐야? 말투가 왜 그래?”
한설지의 얼굴에는 금세 환한 미소가 깃들었다.
“오∼라! 이제 알았다. 겸아 너! 지금 장난치는 거지? 요게, 감히 누나를 또 가지고 놀고 있어? 어디 맛 좀 봐라.”
한설지는 또다시 뇌진천에게로 덮쳐 왔다. 그리고는 그의 겨드랑이와 목, 그리고 배를 사정없이 간질이기 시작했다.
***
“다, 당장 그, 그만두지 못할까? 깔깔깔!”
“요게 아직도 누나를 놀려? 아직 멀었어. 멀었다고.”
강환지체일 때는 간지럼 같은 건 아예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의 몸은 그야말로 간질이는 시늉만 해도 간지럼을 느끼는 체질이었다.
독보강호하면서 극한의 고통을 다 감내해 온 뇌진천이었지만, 간지럼이라는 감각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깔깔깔! 제, 제발……. 그, 그만!”
격렬하게 웃은 탓에 두 눈가는 눈물로 범벅이 되었으며, 복근에서는 경련이 일어날 정도가 되었다.
뇌진천이 이처럼 진저리를 치며 괴로워하자, 한설지는 이윽고 간지럼 세례를 멈추었다. 뇌진천은 너무 지친 나머지 화를 낼 기운조차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뇌진천은 아예 자리에서 뻗어 버렸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한설지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앗, 괜찮아?”
뇌진천은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심신이 많이 지쳤을 텐데, 깜빡했어. 정말 미안해.”
꼬르르륵!
뇌진천의 배에서 나는 소리가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한설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힝, 이제 보니 배가 고파서 그런 거였구나. 잠깐만 기다려. 이 누나가 금방 맛있는 거 차려서 가져올 테니까.”
이 말을 남긴 한설지는 문밖으로 냅다 달려 나갔다. 그 광경을 곁눈으로 지켜보던 뇌진천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2
홍삼의 여인 하나가 다섯 개의 찻잔이 얹힌 다반(茶盤)을 들고서 회랑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넓은 대청으로 들어섰다. 바로 만상상단의 회의청이었다.
그 안에서는 단주인 한경인의 장자이자 총표두이자 호위 총관인 한성호, 외총관을 맡고 있는 차남 한성진(韓成進), 내총관을 맡고 있는 삼남 한성준(韓成俊), 그리고 집사인 추동진(錘同進)과 더불어 회의 중이었다.
차 수발을 드는 여인이 각 사람의 좌석 옆쪽 탁자 위에 찻잔을 하나씩 올려놓고 밖으로 나가자, 대화는 재개됐다.
“지금 상황이 아주 좋지 못합니다. 이곳 서녕의 읍내에 있는 점포들을 제외하고는 청해성의 각처에 있던 상당수의 사업장이 정체불명의 무인들로부터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대부분 더 이상 영업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고요.”
한성호의 말에 한경인은 탄식하듯이 말했다.
“표행 중인 행렬이 습격을 받은 것도 그렇고, 대체 누가 본 상단을 이렇게 괴롭힌단 말이냐?”
이번에는 추동진이 말을 받았다.
“소인의 생각에는……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흑혈회 휘하의 무인들이 저지른 소행으로 추정됩니다.”
“흑혈회라면?”
“오래전에 신강(新疆)의 화정회로부터 갈라져 나와 청해성에서 새롭게 기반을 다진 사도 집단입니다.”
“헌데, 그들이 대체 어째서 무림 조직도 아닌 우리 만상상단을 공격한단 말인가?”
“한 나라에 두 주인이 있을 수가 없듯이 무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흑혈회는 근자에 들어 청해성의 사파무림을 완전히 통합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랫동안 청해성 강호의 맹주로 군림해 오던 곤륜파까지 노리는 모양입니다. 들려오는 풍설에 따르면 얼마 전에는 곤륜파의 본산까지 쳐들어간 모양입니다.”
한경인은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본 상단을 몰락시켜서 곤륜파의 자금줄을 끊어 버리겠다는 속셈이로군.”
“그렇습니다.”
“허면 이제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십 년 전에 곤륜파의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외부에 알려진 바가 없으나, 그 힘이 현저하게 약화된 것은 분명합니다. 특히, 그때 숭의맹에서 파문을 당하면서 문하생과 속가제자의 숫자도 크게 줄어서 곤륜파는 줄곧 쇠퇴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반면, 흑혈회는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네 말은 곤륜파가 흑혈회에 의해 멸문을 당하게 될 거라는 말인가?”
“꼭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흑혈회의 패권 다툼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오리무중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는 절대로 무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추 집사의 말이 지당합니다. 표행을 떠났다가 몰살을 당한 표사들과 쟁자수들의 유족들에게도 상당한 보상금이 지급되어 지금 우리 상단의 재정이 많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지방의 점포들은 모두 포기하고 서녕 성읍 내에서의 장사에만 전념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한성진의 의견이었다. 연이어 한성준이 말을 받았다.
“청해성에 널리 포진해 있던 곤륜의 지파들도 대부분 흑혈회의 공격으로 문을 닫았습니다. 지방의 사업장들은 영업을 계속하더라도 제대로 보호 받을 수가 없는 실정이지요.”
이번에는 다시 한성호가 말했다.
“소자가 맡고 있는 표국 사업도 중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전의 일로 표사와 쟁자수가 전체의 절반 이상이 죽었고, 남은 자들도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표국은 신용이 생명인데, 이번 일로 그간 쌓아 온 신뢰가 일거에 무너졌습니다. 의뢰가 갑자기 뚝 끊겨 버린 게 바로 그 증거이지요. 그러니 표국은 일단 접고, 표사들은 본 상단의 호위 무사로, 쟁자수들은 전원 사환으로 전용할 것을 건의합니다.”
한경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인지……. 그래도 우리 겸아가 무사하게 돌아와서 참으로 다행이다. 헌데, 그런 큰일을 겪어서인지 예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더구나.”
한성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말수도 현저하게 적어졌고, 웃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충격이 너무 컸을 테지. 앞으로도 너희가 막둥이를 잘 챙겨 주어라.”
한성진이 수심에 잠긴 한경인을 위로했다.
“아버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지아가 항상 곁에서 돌봐주고 기운도 북돋아 주고 있으니 머지않아 본모습을 되찾을 겁니다. 게다가, 꼭 나쁜 쪽으로만 변화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예전에는 그렇게 편식을 하더니, 이제는 전 같으면 전혀 입에도 대지 않던 음식들까지 아주 골고루 먹습니다. 그뿐 아니라, 끼니마다 먹는 음식의 양도 예전의 갑절이나 됩니다.”
그 말에 한성준은 미소하며 말했다.
“역시 애나 어른이나 사람은 고생을 해 봐야 철이 드는 모양입니다. 비록 당장은 심적인 충격으로 침울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좋은 약이 될 겁니다.”
그제야 한경인의 얼굴이 다소 밝아졌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혹시 다른 후유증이 있을지도 모르니, 너희가 막둥이를 잘 보살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