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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7화)
제3장 와호잠룡(臥虎潛龍)(2)
3
“이 누나가 해 줄게.”
“글쎄, 됐다지 않느냐? 목욕 정도는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어서 물러가거라.”
“지금까지는 늘 내가 씻겨 주었잖아? 예전에는 걸핏하면 나한테 목욕을 시켜 달라고 떼를 쓰던 주제에…….”
“얼른 물러가라니까.”
“너도 이제 사내라 이거지? 그치만, 내 눈에 넌 여전히 꼬맹이에 불과해. 아직은 널 사내로 인정해 주지 않을 테야.”
한설지는 뇌진천에게 달려들어 강제로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는 나름대로 반항을 해 보았으나, 완력으로는 그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뇌진천은 완전히 발가벗겨져 버렸다. 그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그는 두 손으로 중요한 부분을 가리면서 버럭 호통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나가지 못할까!”
“꼬맹이 주제에 새삼스럽게 뭘 그렇게 부끄럼을 타는 거야? 엄마나 다름없는 누나 앞에서 가릴 게 뭐가 있다고?”
뇌진천은 더는 참기가 어려워졌다.
“야 이 경박한 계집년아! 당장 나가지 못해?”
비록 천방지축이기는 했지만, 평소에 그렇게 착하고 순진하던, 그저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하던 남동생의 입에서 이런 육두문자가 튀어나오자, 한설지의 두 눈은 토끼처럼 동그랗게 떠졌다.
“겸아! 너 갑자기 왜 그래? 대체 그런 상스러운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꺼져! 네년의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기 전에 당장 꺼지란 말이야!”
뇌진천이 다시 한 번 이렇게 소리치자, 한설지의 두 눈에서는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야 이 창기 같은 계집아! 빨리 안 나가?!”
결정타였다. 크게 충격을 받은 표정의 한설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욕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감히 어른을 놀리다니……. 그래도 내 호통 한번에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군. 훗!”
모처럼 혈해존자로서의 위신을 세웠다는 생각에 뇌진천은 무척 흐뭇해졌다.
잠시 후, 뇌진천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뜨거운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목제 욕조 속으로 들어갔다.
“캬∼아! 조∼오타!”
즐거운 기분을 만끽하던 뇌진천의 뇌리에는 놀란 표정으로 눈물을 주르륵 흘리던 한설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근데, 고작 한소리 했다고 찔찔 짜고 지랄이야? 하여간, 계집아이들은 종잡을 수가 없다니까.”
뇌진천은 왠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아! 어째서 기분이 심란하지? 설마 내가 젖비린내 나는 그 계집아이한테 마음을 쓰고 있단 말인가? 아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지금껏 험난한 강호를 살아오면서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고 수많은 인명을 죽여 온 내가 고작 계집 하나 때문에 신경을 쓰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아암! 그렇고말고.’
4
휘이이이!
북방에서는 벌써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이미 초겨울로 접어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녕의 시가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장소는 만상각(萬象閣)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장원이었다.
오 층짜리 고루거각(高樓巨閣)의 양측으로 길게 뻗은 행각은 중앙 정원을 병풍처럼 둘러쌌다.
정방형의 평면을 이루는 대지의 중앙에는 가산(假山)과 부교(浮橋)가 딸린 연못이 있는 정원이 자리했다.
주요 건물들은 그것을 에워싸듯 주랑으로 연결된 채 각 방위별로 포진해 있었다.
석사자상이 좌우로 배치되어 있는 문루 아래의 정문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두터운 털가죽 옷을 입은 채로 바로 이 만상상단의 장원을 거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뇌진천의 발걸음은 후원으로 향했다.
이제 이곳에 온 지 한 달쯤 되니,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진 모양이었다.
‘여독도 다 풀린 듯하고, 그동안 포식하여 허하던 몸의 기운도 많이 보강되었군. 이제 슬슬 무공 수련을 시작해 볼까?’
그 무렵, 뇌진천의 귓전으로는 기합이 들려왔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후원의 연무장에서는 만상상단의 호위 무사 여섯 명이 모여 목검을 휘두르며 검술 대련을 벌이고 있었다.
때마침 호위 무사 하나가 뇌진천을 발견했다. 그는 뇌진천을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공자님!”
나머지 다섯 명의 호위 무사도 뇌진천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뇌진천은 여전히 뒷짐을 진 채로 그들을 향해 가까이 걸어갔다.
이윽고 발걸음을 멈춘 뇌진천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내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하던 거나 계속해 봐.”
호위 무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이 머뭇거리자 뇌진천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계속하라니까.”
뇌진천이 사뭇 엄한 표정으로 호통하자, 호위 무사들은 마지못해 둘씩 짝을 지은 다음 목검 대련을 재개했다.
“야 이 멍청아! 몸을 그렇게 붕붕 띄우면 어떻게 해? 거기서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이런 식으로 뇌진천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호위 무사들을 질책했다.
만상상단의 단주가 애지중지하는 막내 도련님이라 감히 반박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저런 꼬맹이가 무공에 대해 뭐라고 훈수를 놓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뇌진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흔히 검법을 연마할 때는 손에 쥐고 있는 검의 움직임에만 신경 쓰기 쉽지만, 사실은 하체의 보법(步法)이 훨씬 중요하다. 검법이란 무릇 발을 초석으로, 다리를 거쳐 허리를 축으로 삼아 팔과 손을 통해 완성된다. 하반신의 안정이 선행되어야 전신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신속하고 정확하며 위력이 충만하게 깃들은 검식을 쏟아 낼 수 있는 것이지.”
무공이라고는 전혀 배운 적도 없고, 평소에도 허약하기 그지없는 어린아이인 줄만 알았던 사공자의 입에서 무공에 대한 심도 있는 훈수가 나오자, 호위 무사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뇌진천은 더욱 열띤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너희가 보여 주는 검법은 겉멋만 들어 있는 장난질에 불과하다. 분명히 말하지만, 검이라는 것은 절대로 묘기를 부리는 도구가 아니다. 살인을 위한 흉기란 말이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는 모두 내어 버리고, 필요한 동작만 하는 게 핵심이다.”
급기야 검법의 도(道)에 관한 이야기까지 흘러나오자 호위 무사들은 더욱 어리둥절해졌다. 이에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각자를 향해 눈짓했다.
자연히 대련은 형식적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뇌진천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제대로 못하겠느냐? 검술은 장난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거라. 언제나 실전을 염두에 두고 연습에 임하란 말이다.”
뇌진천의 추상같은 질책에 호위 무사들은 다시금 진지하게 대련에 임했다.
뇌진천은 준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실전에서는 자기 검의 길이를 고려해서 늘 자신의 간격에서 싸우도록 상황을 이끌어 나가야 한다. 공격은 언제나 신속 정확하게 상대방의 사각으로 파고들어 가야 하지. 사각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일종의 심리전이지. 상대가 미처 예측하지 못하는 지점을 기습하여 의표를 찌르는 것이 승부의 핵심이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듣던 호위 무사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진지함이 깃들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무공을 익히던 무인인 그들로서는 사공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결코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한동안 검술에 대해 상당히 수준 높은 강론을 선사한 뇌진천은 이윽고 마무리를 지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뇌진천의 말에 호위 무사들은 입을 모아 대꾸했다.
“네, 도련님!”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호위 무사들의 동작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자, 뇌진천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쯧쯧즛! 그래도 꼴에 무사라고.”
이렇게 중얼거리던 뇌진천은 체념한 듯 발걸음을 돌이켰다. 호위 무사들은 저만치 걸어가는 사공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연방 고개를 갸웃거렸다.
5
한설지는 행각을 따라 백화난만(百花爛漫)의 후원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향하는 후원의 중앙에는 가산(假山)이 똬리를 틀고 있었고, 그 앞으로는 연못이 자리했으니,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였다.
기암괴석의 가산을 중심으로 곳곳에는 작은 누각들이 자리했고, 그것들 사이는 운남(雲南) 대리(大理)에서 산출되는 대리석이 융단처럼 깔린 주랑(柱廊)으로 연결되었다.
아울러, 다채로운 화초들과 신선한 향내를 풍기는 수목들이 후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산 앞의 연못 위에는 흡사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수상의 누각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설지는 바로 그 수상 정자와 이어지는 돌다리의 난간에 기대어 서서 얼마 동안 연못 속의 잉어들을 가만히 구경했다.
마침, 가산의 뒤편으로 걸어가는 뇌진천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띄었다.
“우리 겸아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
가산 뒤편의 공터에 이른 뇌진천은 두 손을 바닥에다 대고 팔 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금세 엎드리고 말았다.
‘고작 열 개를 채우지 못하다니……. 안 되겠다. 당분간은 완력과 체력 보강에 주력해야겠어.’
뇌진천이 자리에서 일어설 무렵이었다. 저쪽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으니, 한설지였다.
한설지는 몹시 쭈뼛거리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연방 그를 힐끔거렸다.
뇌진천은 살그머니 다가서는 한설지를 쏘아보았다.
열여섯 살이나 된 소녀가 자기 나이의 반절에 불과한 남동생의 눈치를 보는 광경이 꽤 이채로웠다.
뇌진천은 얼마 전에 자기가 한설지에게 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동안 마음에 걸렸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 표현을 해 본 일이 없는 뇌진천으로서는 그저 한설지가 눈에 거슬릴 따름이었다.
“뭐냐?”
뇌진천이 대뜸 이렇게 말하자 한설지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그냥 겸아 네가 보고 싶어서…….”
“…….”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야?”
“…….”
“미안해. 그때 일은 내가 사과할게.”
“…….”
“그치만, 겸아 너도 말이 좀 심했어. 아무리 화가 나기로서니 누나한테 그런 심한 욕을 하면 안 되는 거잖아?”
“…….”
뇌진천이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무서운 표정으로 응시하자, 한설지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댔다.
그게 왠지 불쌍해 보였던 걸까?
뇌진천은 옆으로 눈길을 돌리면서 말했다.
“미안!”
뇌진천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컥! 뭐야?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당황할 만도 한 것이 뇌진천은 근 팔십 년에 이르는 세월을 살아오면서 사과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목소리도 작았고 경황이 없는 와중에 불쑥 지나간 말이지만, 한설지는 그 말을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그녀는 반색하며 말했다.
“겸아! 방금 뭐라고 했어? 한 번만 더 말해 주면 안 돼?”
뇌진천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그래도 지금 자기가 내뱉은 말 때문에 충격을 받은 그에게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거듭 요구하는 한설지가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남동생이 악동 같은 눈길로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자, 한설지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아니야. 신경 쓰지 마.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니까.”
“험험!”
괜스레 헛기침을 한 뇌진천은 뒷짐을 진 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한설지도 조심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뇌진천은 고개를 홱 돌렸다.
“또 뭐야?”
“아, 아니야.”
“볼일 없으면 그만 가 봐.”
뇌진천의 퉁명스러운 말에 한설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그녀가 멀찌감치 걸어가는 걸 확인한 뇌진천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가산 앞 고목 아래에는 공터가 있었다. 몸집이 작은 뇌진천이 들어가면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을 만한 공간이었다. 그곳에 쏙 들어간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운기조식을 한번 시도해 볼까? 무극신공은 아직 익힐 여건이 되지 않으니, 우선은 적양공(赤陽功)부터…….’
뇌진천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심법을 적용하려면 일단 마음을 비우고 입정(入精)에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눈을 감자마자 그의 뇌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풀이 죽은 한설지의 얼굴이었다.
뇌진천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얼굴은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한설지의 쓸쓸한 뒷모습이 떠올랐다. 재차 고개를 흔들자, 또다시 울상을 짓고 있는 한설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이처럼 슬픔에 잠긴 한설지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에 뇌진천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이런, 제기랄! 그 계집년은 왜 자꾸 알짱거려서 내 심기를 다 흩뜨려 놓는 거지? 고것만 한 번 왔다 가면 마음이 뒤숭숭해진다니까. 그래도 일단은 누나이니 어쩌지도 못하겠고…….”
뇌진천은 지금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불편한 기분이 미안함 때문이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