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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8화)
제3장 와호잠룡(臥虎潛龍)(3)
6
여든 살의 노인에서 졸지에 여덟 살의 꼬마가 되자 모든 것이 낯설고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석 달쯤 지나자, 뇌진천도 새로운 환경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말투나 행동도 제법 어린아이처럼 취할 수 있게 되었고, 한설지를 비롯하여 만상상단의 가솔들과도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외적인 환경이 안정되고 한겨울의 추위도 한풀 꺾이자, 뇌진천은 본격적으로 무공 수련에 돌입했다.
뇌진천은 일 년 동안 공격이나 방어 기술을 익히기에 앞서 몸만들기에 온전히 전념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근력과 체력, 유연성, 그리고 균형 감각까지 네 분야로 구분하여 체계적인 수련에 돌입했다.
처음에는 열 개도 쉽지 않았던 팔 굽혀 펴기가 이제는 물구나무를 선 채로 단번에 백 개도 거뜬히 해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십 리를 걷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제는 십 리를 달리는 것도 가뿐해졌다.
처음에는 다리를 모은 채로 두 손끝이 간신히 바닥에 닿았으나, 이제는 얼굴이 다리와 완전히 밀착될 정도였다.
처음에는 개천의 징검다리조차 제대로 건너지 못했으나 이제는 폭이 좁은 석교의 난간 위를 뛰어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뇌진천은 훈장으로부터 글공부를 배우거나 가끔 한설지와 산책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무공 수련에 매진했다.
강환지체를 기반으로 무공을 연마할 때는 성취가 너무 빨라서 중간 단계는 건너뛰기 일쑤였다.
그러나 평균 이하인 몸으로 새롭게 무공을 익히면서 뇌진천은 기초의 중요성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뇌진천은 예전에 시시하게 생각하던 곤륜파의 기본적인 무공들이 얼마나 탁월한지 잘 알게 되었다. 위에서 볼 때와 밑에서 볼 때의 차이는 실로 컸던 것이다.
그래서 뇌진천은 자신이 마룡동에 있을 때 완성한 무극신공은 잠시 접어 두고 적양공을 비롯하여 곤륜파의 가장 기초적인 무공부터 차근차근 익혀 나갔다.
뇌진천은 하루에 한 시진 이상 적양공의 조식(調息)을 하려 했다. 그런데 새로운 몸이 너무 둔감하여 좀처럼 기감(氣感)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진기회전(眞氣回轉) 자체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이에 뇌진천은 내가요상술 가운데 하나인 추궁과혈(推宮過穴)을 응용하여 전신의 주요한 혈도를 수시로 지압하며 자극했다. 그 결과, 이윽고 기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뇌진천은 언제나 적양공의 원리에 입각하여 몸의 자세를 가다듬었으니, 이는 조신(調身)이었다.
뇌진천은 복부 및 항문 수축, 온갖 종류의 체조, 혀로 입 안을 휘저으며 양손으로 신당혈(腎堂穴)을 문질러 주는 것 등등 곤륜파에 이제 막 입문한 초심자들이 사용하는 수십 가지의 조신법을 꾸준히 적용했다.
뇌진천은 항상 적양공의 원리에 따라서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었으니, 이는 조심(調心)이었다.
또한, 뇌진천은 언제나 적양공의 원리를 적용하여 음식물을 섭취했으니 바로 식양생(食養生)이었다.
항상 조심법으로 의식 훈련을 했으며, 음식물도 철저히 가려서 먹고, 씹는 횟수조차도 철두철미하게 통제했다.
이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방식, 그리고 식습관까지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적양공의 원리를 도입했던 것이다.
바로 이 세 가지는 조식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보조 수단이었다.
뇌진천이 이렇게까지 한 건 지금의 육체로서는 단지 조식만으로 내공을 증진시키기가 여의치 않았던 탓이다.
이처럼 필사적인 조식, 조신, 조심, 식양생으로 인해 뇌진천의 단전에도 비록 더디나마 내공이 쌓이기 시작했다.
뇌진천은 적양공의 조식 가운데서 단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행하는 좌식(座息)에서 벗어나서 점점 입식(立息), 와식(臥息), 행식(行息), 면식(眠息)으로 발전해 나가려고 애썼다.
조식을 할 때는 모든 잡념을 물리치고 오직 단전에만 의식을 집중시켜야 한다. 좌식의 경우에는 일단 가부좌를 튼 상태에서 모든 의식을 배꼽 아래의 하단전에 집중시킨다.
이러한 의수(意守)를 계속하면 어느새 의수 자체에 대한 인식조차 사라지고, 무념무상의 상태에 들게 되니, 이를 입정이라고 한다.
언제든지 입정의 상태로 접어들어 자유자재로 좌식을 수행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면 입식도 가능해진다.
입식은 말 그대로 걸어 다니면서 조식하는 것이다. 입식이 익숙해지면 누워서도 조식하는 와식도 가능해진다.
와식까지 완전히 체득하면 깬 상태에서 어떤 활동을 하든 자연스럽게 조식을 통해 내공을 증진시키는 행식까지 가능해진다. 마지막으로는 누워서 잠이 들었을 때도 조식 상태에 있는 면식의 경지에 이를 수가 있다.
이러한 면식까지 가능해지면 불철주야 내공의 증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뇌진천은 본격적으로 적양공을 수련한 지 만 삼 년이 지나자 면식이 가능한 경지까지 이르렀다.
예전에는 너무나 손쉽게 이룩한 단계였으나, 이번에는 삼 년 동안 전심전력을 다한 끝에 이루어진 결과인 터라 뇌진천이 느끼는 감회는 상당했다.
사실 처음에 수련을 시작할 때만 해도 속에서 천불이 솟았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가운데 한 단계씩 올라설 때의 성취감은 그러한 실증을 상쇄하기에 충분했다.
아울러, 인고를 머금은 수련의 과정에서 뇌진천은 욱하는 다혈질의 성품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뿐 아니라, 함량 미달의 몸을 개조하는 와중에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도 가지게 되었으며, 특히 약자의 심정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지난 사 년의 세월 동안 가족들로부터 받은 따뜻한 사랑은 삭막하기만 하던 뇌진천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자양분이 되었다.
7
묘령의 한설지에게서는 이제 말괄량이 같은 분위기 대신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녀는 등롱에 달린 등불을 든 홍의 소녀와 금을 든 녹의 소녀를 대동한 채 후원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 무렵,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점점 부풀어 가는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수상 정자에 당도한 한설지는 자리를 잡고 앉아 녹의 소녀가 들고 온 금을 앞에 두고서 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맑고 청명한 소리가 만상상단의 후원을 가득 채워 갔다.
“사공자께서 드셨습니다.”
다소 놀란 듯한 녹의 소녀의 이와 같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당당한 기품의 소년 하나가 정자로 들어섰다.
“겸아!”
크게 반색하는 한설지의 목전에 나타난 소년은 이제 더 이상 코흘리개 꼬맹이가 아니었다.
올해로 열두 살이 된 뇌진천은 비록 한설지에 비하면 여전히 머리 하나 정도로 신장 차이가 났으나, 정말 몰라볼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한 모습이었다.
“누님께서 금을 타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황홀하군요.”
“겸아, 너한테서 그런 말을 들으니 너무 기쁜걸. 그런데, 네가 갑자기 여기는 어쩐 일이니?”
“동생이 사랑하는 누님을 만나러 오는 데 반드시 무슨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뇌진천의 너스레에 한설지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자, 어서 와서 이쪽으로 앉아.”
오누이는 탁자를 두고서 마주 앉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는 사이, 홍의 소녀는 용정차(龍井茶)를 대령했다.
뇌진천은 찻잔을 입가에 가지고 가서 한 모금 들이켰다. 눈을 지그시 감고 용정차의 뒷맛을 음미하던 그는 이윽고 눈을 떴다.
“누님!”
“응?”
“모처럼 함께 산책이나 하지 않겠습니까?”
“산책이라……. 그치만 밤인걸?”
“밤이면 어떻습니까? 제가 누님을 잘 지켜 드릴 텐데요?”
“칫, 무공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백면서생 주제에…….”
한설지의 핀잔에 뇌진천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소했다.
“껄껄껄! 하긴, 그렇군요.”
뇌진천은 한경인이 자신을 문사로 키우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의 시선을 피해 몰래 무공을 익혀 왔던 것이다.
곤륜파에 있을 때 비록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운 적은 없으나, 팔십 세 노인의 지성을 가진 뇌진천으로서는 훈장으로부터 배우는 글공부 정도는 별것 아니었다.
이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눈에는 뇌진천이 참으로 신동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를 가르치면 정말 열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막내아들을 제대로 공부시켜서 조정의 관리로 출사시키려는 꿈을 품고 있던 한경인으로서는 참으로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뇌진천과 함께 웃고 있던 한설지의 얼굴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그녀는 뇌진천과 다정하게 눈을 맞추면서 말했다.
“이곳에 불쑥 찾아온 것도 그렇고, 뜬금없이 산책을 가자는 것도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이야?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 거지? 그렇지? 빙빙 돌리지 말고 어서 말해 봐.”
한설지의 종용에 뇌진천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실은 며칠 후, 낙양(洛陽)에 있는 삼촌댁으로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한설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떠나다니, 대체 누가? 설마……?”
한설지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뇌진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뇌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떠납니다.”
벌써부터 한설지의 두 눈동자는 호수 속으로 잠겼다.
“왜? 갑자기 왜 낙양으로 가려는 건데?”
“아버님께서 학문에 대해 제게 거는 기대가 크십니다. 그래서 저를 낙양으로 유학을 보내시려는 거지요.”
한설지는 정색하며 소리쳤다.
“안 돼! 절대로 보낼 수 없어.”
“누님!”
“공부는 이곳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어째서 그렇게 먼 곳까지 가려는 거야?”
한설지의 양 뺨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낙양에는 황실의 대학사와 같은 고위 문관 출신의 향신들이 설립한 사학기관이 밀집해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입학하게 되는 풍림학관(風林學館) 역시 조정의 관리들을 많이 배출해 온 명문이라고 합니다. 아버님께서는 그런 곳에서 공부를 하고 줄도 잡아야 출사의 길이 쉽게 열린다고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그치만……. 그럼, 너도 가고 싶은 거야? 네가 가기 싫다고 하면 아버님도 억지로 보내려고 하시진 않을 거야.”
낙양으로 가게 되면, 뇌진천은 이제 더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자유롭게 무공을 수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게…….”
뇌진천이 뭐라고 대답하려는 찰나 한설지가 갑자기 곁으로 다가왔다. 그를 와락 끌어안은 그녀는 간절히 애원했다.
“제발 가지 마! 가지 않겠다고 말해 줘.”
뇌진천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을 이토록 아껴 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위로가 됨을 이미 깨닫고 있는 그였다.
뇌진천 역시 두 손으로 한설지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우리 울보 누님을 어이할꼬!”
뇌진천은 아이를 달래듯이 한설지의 등을 다독였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크게 흐느껴 울었다.
얼마 후, 한설지는 뇌진천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로 쌔근쌔근 잠이 들고 말았다. 그녀의 뺨을 가만히 어루만지던 그의 얼굴에는 이내 결연함이 떠올랐다.
‘이 아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곳에서 마냥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래! 낙양으로 가자.’
제4장 와신상담(臥薪嘗膽)(1)
1
뇌진천을 태운 마차의 주위로는 만상상단의 정예 가병 스물네 명이 함께 말을 몰아 달리면서 호위하는 중이다.
고원 지대에 형성된 서녕 성읍을 완전히 빠져나온 이래로 마차는 남동쪽으로 한 시진가량 질주했다. 그리고 다소 험난한 구릉지 사이의 비포장도로로 접어들게 되었다.
뇌진천은 휘장을 걷고서 창문을 통해 주변을 살폈다.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이 든 뇌진천은 앞좌석의 마부를 향해 말했다.
“매복하기에 딱 좋은 지형이네. 좀 더 속도록 내게.”
“분부 받들겠습니다.”
공손하게 대꾸한 마부는 마차를 이끌고 있는 두 마리의 말에게 연방 채찍질을 가하며 호령했다.
“이랴! 이랴!”
두 마리의 말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지축을 박차며 더욱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고, 마차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마차의 바퀴는 이따금 바닥의 박힌 돌로 인해 덜컹거렸다.
지면 위로는 두 갈래의 깊숙한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면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렇게 대략 일다경 정도 지났을까?
“앗, 적입니다!”
앞좌석의 우측에서 말을 몰아 달리고 있던 호위대장의 목소리였다.
이에 뇌진천이 창밖으로 황급히 고개를 내밀어 보니 과연 진행 방향의 전방으로는 적색 무복 차림의 복면인들 수십 명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후에는 좌우의 언덕에서도 많은 숫자의 복면인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후방에서도 적지 않은 인원의 복면인들이 상승의 신법을 전개하며 육박해 오는 중이었다.
‘혹시나 해서 해 본 말인데, 정말 매복이 있을 줄이야. 차림새로 보아하니 단순한 녹림의 무리 같지는 않은데…….’
***
“어차피 퇴로는 막혔습니다. 기왕 이리된 바에야 정면으로 뚫고 나갈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사공자님께서는 의자를 꼭 붙들고 계십시오. 절대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마시고요.”
이렇게 말한 호위대장은 부하들과 더불어 더욱 속력을 끌어올리는 마차의 주변으로 산개하며 질주해 나갔다.
그들은 복면인들이 마차로 접근하는 것을 원천봉쇄하고자 선공을 가했다. 그런데 복면인들이 날린 암기 가운데 하나가 마차를 몰던 마부의 목에 적중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로 인해 마차는 향방을 잃고서 제멋대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맹렬히 회전하고 있던 마차의 한쪽 바퀴가 노면 위로 불쑥 튀어나온 고목의 뿌리에 부딪히면서 균열이 생기고 말았다.
마차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이상한 방향으로 질주해 나가자, 뇌진천은 마부에게 일이 생긴 것을 직감했다.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그는 진행 방향의 낭떠러지를 발견했다.
“얼른 빠져나가야 해.”
뇌진천의 몸집도 많이 커져서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에 그는 문을 열고자 했지만 잠금 장치의 이음매가 찌그러진 탓에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제기랄! 이거 대체 왜 이래?”
다급해진 뇌진천은 발로 문을 마구 걷어찼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와중에 마차는 점점 가속도가 붙었다.
절벽에 도달하기 직전, 마차의 한쪽 바퀴가 빠지면서 방향이 급격하게 틀어졌다. 그 충격으로 인하여 문은 부숴졌고, 뇌진천은 마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마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 재빨리 나무뿌리를 붙잡은 덕분에 그는 추락을 면할 수 있었다.
“겨우 목숨은 건진 것 같군.”
뇌진천은 벽면을 따라 기어 올라갔다. 그렇지만 그의 움직임은 금세 멈추어졌다. 위쪽에서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처연한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