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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9화)
제4장 와신상담(臥薪嘗膽)(2)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 우리 가병들이 당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숫자도 숫자이거니와, 복면을 한 자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무인들은 아니었으니까. 괜히 지금 올라갔다가는 나 역시 무사하지 못할 거야.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자.’
그로부터 채 반 각도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낭떠러지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전해졌다.
뇌진천은 절벽의 움푹 파인 부분으로 황급히 몸을 숨겼다. 낭떠러지 아래의 상황을 유심히 살펴보던 복면인은 이내 발걸음을 돌이켰다. 연이어 말소리가 들려왔다.
“시체는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정도 높이에서 추락했으니, 그 꼬맹이도 틀림없이 즉사했을 거야. 굳이 확인까지 할 필요는 없을 테지.”
“하긴 그렇군. 아무튼 이제 이걸로 한씨 일가는 완전히 몰살을 당한 셈이로군.”
그 말에 뇌진천의 두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한씨 일가라면……. 우리 만상상단을 일컫는 거잖아?’
두 복면인이 나누는 말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며칠 전에 곤륜파도 완전히 멸문을 당했고, 그동안 곤륜파를 도와주거나 추정하던 세력들도 깡그리 정리되었으니, 청해성은 이제 우리 수라혈교의 손에 완전히 들어온 셈이군.”
“어부지리(漁夫之利)라고나 할까? 지난번에 곤륜파와 흑혈회가 격돌하여 서로 세력이 약화된 덕분이지. 무엇보다, 그때 어찌 된 영문인지 곤륜산에 친정을 나섰던 위재항이 난데없이 뒈져 버린 덕을 많이 보았지. 내란에 휩싸인 흑혈회를 다시 본교로 흡수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맞는 말이야. 이제 포달랍궁이 틀어쥐고 있는 서장(西藏)만 차지하면 바야흐로 본교가 새외강호의 진정한 맹주가 될 수 있어. 그리되면 숭의맹도 얼마든지 넘볼 수 있을 테고.”
“숭의맹을 무너뜨린다라…….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로군. 하루라도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군.”
이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말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 무렵, 뇌진천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뇌진천의 뇌리에는 자신을 끔찍하게도 사랑해 주던 가족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특히, 이별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끌어안고서 놓아주려고 하지 않던 한설지의 모습이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실로 해일과도 같은 슬픔이 가슴속을 침범해 왔다.
“그래!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내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한 줄기의 희망을 부여잡은 뇌진천은 단숨에 절벽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서녕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2

새벽녘에야 뇌진천은 서녕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는 수문장의 눈을 피해 성벽을 타고 넘어 성읍 안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만상상단의 장원을 향해 내달렸다.
얼마 후, 저 멀리서 치솟는 연기가 보였다.
뇌진천은 불길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쉴 새 없이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만상상단의 장원에 당도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주변에는 관부에서 파견된 병사들이 장원으로부터 시체를 옮기는 중이었다.
뇌진천은 주변의 구경꾼들을 밀치며 미친 듯이 참사의 현장으로 접근했다.
그러자 장한 하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넌?”
뇌진천은 그 나이의 어린아이로서는 도저히 지을 수가 없는 그런 표정을 지으며 장한을 노려보았다.
뇌진천의 두 눈에서는 최근 삼 년 동안 완전히 사라졌던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모골이 송연해진 장한은 움찔하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꼬, 꼬맹이 주제에 감히…….”
하지만 장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퍽!
뇌진천의 우측 무릎이 장한의 턱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고개가 뒤로 홱 젖혀진 장한은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뭐야, 저 녀석은? 감히 관군에게 대들어?”
뇌진천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또 다른 장한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공중제비를 돌며 상대방의 머리 위로 지나간 그는 동시에 뒷발을 쭉 내밀어 장한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안 그래도 몸의 중심이 전방으로 쏠려 있던 장한은 그대로 고꾸라지면서 턱을 맞고 엎어졌다가 이제 막 일어서던 장한과 부딪혔다.
뒷발공격을 성공시킨 뇌진천이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앉을 때였다. 다른 장한 하나가 자신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뇌진천을 붙잡으려 했다. 그는 힐끗 뒤돌아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공중으로 치솟았다.
좌측으로 원을 그리며 회전한 뇌진천은 우측 발을 휘돌려 차서 자신을 붙잡으려던 장한의 면상을 가격했다.
“커억!”
장한은 얼굴을 감싸 쥐며 비틀거렸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러자 뇌진천은 그의 사타구니를 그대로 올려 차 버렸다.
“으악!”
중요한 부위를 걷어차인 장한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감싸고서 펄쩍펄쩍 뛰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주변에 있던 여러 명의 병사들이 뇌진천의 곁으로 일제히 다가오면서 포위했다.
그때였다.
“그만들 두십시오. 이분은 만상상단의 사공자님이십니다.”
병사들의 앞을 막아서면서 이렇게 말한 사람은 바로 만상상단의 집사인 추동진이었다.
뇌진천에게 얻어맞은 세 명의 관병은 몹시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황을 이해한 병졸장이 눈짓을 하자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추동진은 반색하며 말했다.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이죠?”
“그게…….”
추동진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해 주세요.”
“실은 정체불명의 자객들이 본 상단의 장원을 기습해 왔습니다. 놈들은 장원의 곳곳에 불을 지른 다음, 단주님뿐만 아니라, 세 분의 공자님과 그 가족들까지 모조리 암살했습니다.”
“그, 그럴 수가……. 그럼 누, 누나는요?”
추동진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멍석으로 덮어진 한 구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뇌진천은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멍석을 들어 올렸다.
제발 아니기를 바랐지만……. 제발 아니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사나웠다.
멍석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한설지의 그것이었다.

***

사실 뇌진천의 호전성은 자기 방어의 수단이었다. 그가 품고 있던 독기는 전갈이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지니고 있는 독, 혹은 고슴도치의 가시와도 같았다.
한설지는 독에 쏘여 괴로워하면서도, 가시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기어코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와서는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한설지는 뇌진천이 여태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애정을 원 없이 쏟아 부어 주었다.
사실 뇌진천이 과거에 그토록 독한 성품을 가지게 된 것은 사랑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멋대로 엄마요, 누나가 된 그녀는 그러한 갈증을 마음껏 해소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은 그의 가슴속에 사무친 독기를 중화시켜 버렸다. 가시를 다 뽑아 버렸다.
그래 놓고는…… 그래 놓고는…… 그래 놓고는…….
한설지는 야속하게도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제 독 없는 전갈이 되어 버린 그만을 이 세상에 홀로 남겨 둔 채로. 더 이상 가시가 없는 고슴도치가 된 뇌진천만을 홀로 남겨 둔 채로.
“누나! 누나!”
뇌진천은 진심으로 불러 보았다.
사실 나이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뇌진천에게 있어서 한설지는 정말로 누나였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이 세상에 없다. 고아인 그에게 처음으로 엄마의 따뜻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던 그녀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한설지라는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인식한 그 순간의 상실감은 뇌진천을 참으로 진저리치게 만들었다.
가슴속 깊은 곳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허전하다 못해 시릴 정도였다.
과거에 험난한 강호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처절한 아수라장을 다 겪어 보았으나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나 슬펐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뇌진천의 두 눈동자는 호수 속에 깊이 잠기어 떠오를 줄 몰랐다.
사실 한설지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뇌진천은 여전히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사건 직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 일을 계기로 뇌진천은 한설지가 그 누구보다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였고, 자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 주고 싶은 존재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라는 건가? 참으로 정이라는 건 칼보다도 더 무섭구나.’
뇌진천은 과거처럼 다혈질의 성질을 못 이겨서 그저 포학하게 날뛰던 철없는 모습에서 완전히 탈피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타인과 정답게 지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 순간, 그는 죽음보다도 소중한 사람을 잃을 때의 상실감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앞으로 다시는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
뇌진천이 너무 슬퍼하자,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구경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역시나 안타깝게 지켜보던 추동진이 뇌진천에게로 다가오면서 말했다.
“그만 아가씨를 보내 드리세요. 그리고 마음 단단히 잡수세요. 이제 도련님께서 만상상단을 이끄셔야 하니까요.”
뇌진천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한설지의 얼굴을 다시금 멍석으로 덮었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의 슬픔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완벽하게 예전의 혈해존자로 되돌아간 것이다.
‘오늘부로 혈곤륜의 부활을 선언한다!’


3

‘서녕부(西寧府)’라는 현판이 붙은 문루 아래의 정문에는 제복 차림의 관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야심한 밤이지만, 정문 양쪽의 석사자상 앞에 위치한 화로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인해 그 주변은 무척 환했다.
아울러 서녕부의 경내에도 곳곳에 횃불을 든 병사들이 배치되어 삼엄한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서녕부의 후원에 자리한 별전(別殿)의 한 객실 안이다. 호롱불이 밝혀진 서탁 뒤에는 앳된 소년 하나가 앉아 있었다.
‘엄연히 관부의 공권력이 미치는, 서녕 도심의 한복판에서 대규모의 살인 방화 사건이 발생했어. 게다가 자객들은 낙양으로 떠나는 열두 살짜리 막내아들까지 제거하려고 했지. 일련의 사건들로 짐작건대, 상단의 내부에 세작이 있음이 분명하다.’
청해성은 이미 수라혈교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반면, 뇌진천은 이제 겨우 무극신공을 연마할 여건을 확보한 상태였다. 아직은 혈교의 고수들을 감당해 낼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두 개의 패가 있었다.
첫째, 혈교에서는 뇌진천이 이 사건의 배후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둘째, 혈교에서는 사공자를 단지 열두 살짜리 꼬마로만 여길 뿐, 진면목은 전혀 모르고 있다.
‘상단의 내부에 세작이 있는 만큼, 이미 나의 행적은 놈들에게 노출되었다고 봐야 한다. 혈교에서는 언제고 다시 자객을 보내 나를 암살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도망갈 수도 없다. 지금은 그나마 관부의 보호라도 받고 있지만, 서녕의 성읍 밖으로 나가는 순간,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기 때문이지.’
자리에서 일어난 뇌진천은 객실 안을 왔다 갔다 했다.
‘마냥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언제든지 빈틈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혈교의 자객들에 의해 즉시 내 목이 달아날 테니까. 어떻게든 혈교의 마수를 떨쳐 버리고 서녕을 빠져나가야 곤륜파를 재건하고, 한씨 일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곤륜파가 망하는 것을 방관한 숭의맹에도 철퇴를 가할 수가 있지. 과연 어떻게 해야 이 난국을 벗어날 수 있을까?’
뇌진천은 산만해지려는 정신을 더욱 동여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 패를 최대한 활용해야 해야 한다. 그러자면 세작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되면 세작을 역이용하여 놈들을 교란시킬 수가 있을 테지.’
생각이 이에 미친 뇌진천이 가장 먼저 의심한 사람은 집사인 추동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단의 간부급 인물들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는 추동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 녀석, 겉으로는 한없이 사람 좋은 할아버지 같지만, 실상은 혈교에서 진작에 심어 둔 하수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제부터인가 매수되어 놈들의 끄나풀로 전락했을 수도 있고. 녀석이 세작인지 아닌지 알아낼 방도가 있긴 하지.’
날이 밝자, 뇌진천은 추동진을 서녕부에 임시로 마련된 자신의 처소로 소환했다.
추동진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뇌진천은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로 달려가 와락 안겼다.
“아저씨!”
“도련님!”
“잠시만 이렇게 있어 줘요.”
애절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 뇌진천은 추동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한동안 흐느껴 울었다.
‘지금은 내 눈물로 젖지만, 네가 만약 세작이라면 나중에 찢긴 네 심장에서 치솟는 피로 물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