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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10화)
제4장 와신상담(臥薪嘗膽)(3)


“도련님, 아니 이젠 단주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아무튼 진정이 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미안해요. 그런 추태를 보여서요. 그치만 추 집사는 내게 할아버지와도 같아요. 그러니 나를 그렇게 너무 딱딱하게 대하지 말아요. 추 집사마저 날 멀리하면 너무 외롭단 말이에요.”
뇌진천은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추동진이 황송한 표정으로 쭈뼛거리자, 뇌진천은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그곳의 일은 어찌 되어 가나요?”
“이제 뒷수습은 대부분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내일, 단주님 일가의 합동 장례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아! 정말 추 집사님이 안 계셨으면 이 모든 일을 저 혼자서 어떻게 다 감당했을지……. 정말 고마워요.”
“무슨 말씀을……. 소인은 나으리와 아가씨, 그리고 공자님들을 지켜 드리지 못한 천고의 죄인일 뿐입니다.”
“자책하지 말아요. 이번 일이 어떻게 추 집사님의 잘못이란 말인가요? 그러니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소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헌데, 관부에서는 이번 일에 대해 뭔가 단서라도 잡았습니까?”
“아직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어요. 단지 원한 관계가 얽힌 무림인들의 짓일 거라는 추측만을 내놓고 있어요.”
“그렇군요. 근데 일전에 보니 도련님께서 무공 실력이 참으로 대단하시던데요? 무척 감탄했습니다.”
뇌진천은 추동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왜 안 물어보나 했지.’
뇌진천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실은 큰형님께서 내가 몸이 약하다고 아버님 몰래 무공을 가르쳐 주셨어요. 그치만 그때 보여 드린 그게 내 실력의 전부예요. 관병들도 내가 꼬마라고 방심하다가 당한 것뿐이고요.”
이와 같은 대답에 추동진은 내심 안도하는 듯했다.
‘역시 혐의가 짙어. 하지만 아직까지 단정할 수는 없다. 좀 더 떠 보는 수밖에…….’
잠깐의 침묵을 깨고 뇌진천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이번 장례식 때 곤륜파의 도사님들도 초청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요?”
추동진은 난색을 표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니요? 어째서요? 그래도 우리 상단은 전통적으로 곤륜파와 근린 관계를 유지해 왔잖아요?”
“곤륜파는 이제 없습니다.”
그 순간, 뇌진천의 안광이 번뜩였다.
‘걸려들었군. 곤륜파의 멸문은 불과 나흘 전에 있었던 일이다. 혈교의 인물이 아니고서는 벌써 이 소식을 알 수가 없지. 아마도 이 녀석은 내가 세상 물정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여 별생각 없이 대꾸한 모양인데…….’
뇌진천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곤륜파가 없다니요?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실은 얼마 전에 숭의맹에 의해 멸문을 당했습니다.”
뇌진천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숭의맹에 덮어씌운다? 훗, 이걸로 추동진이 수라혈교의 세작이라는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녀석을 통해 수라혈교에서 나를 죽이는 것보다는 그냥 살려 두면서 이용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을 확실하게 심어 줄 필요가 있겠어.’
뇌진천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질문했다.
“아니, 그게 사실인가요? 어째서요?”
“도련님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이십여 년 전에 곤륜파와 숭의맹 사이에 아주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쌓인 앙금이 더욱 깊어져서 결국 이런 사태까지 벌어졌지요.”
추동진은 마치 해명이라도 하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소인이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전에 단주님의 분부로 곤륜파에 심부름을 갔다가 그곳의 생존자로부터 우연히 전해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숭의맹에서는 그 일이 마치 수라혈교에서 저지른 것처럼 소문을 퍼뜨리고 있지요.”
“수라혈교라니요? 거긴 또 어떤 곳이죠?”
“신강 일대에 기반을 둔 무림 조직입니다. 세간에서는 마교라고 부르며 멀리하지만, 이것 역시 숭의맹에서 퍼뜨린 헛소문일 뿐입니다. 수라혈교는 그 명칭과는 달리 그렇게 무서운 집단은 아니라고 합니다. 수라혈교는 원래 신강에서 불을 숭상하는 종교 집단인 화정회가 그 전신입니다. 다만, 그 당시 발생한 내분을 정돈하고자 그 이름을 지금과 같이 조금 강렬하게 바꾸었을 뿐이지요.”
뇌진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이번 일도 숭의맹이 저지른 게 아닐까요?”
추동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우리 만상상단은 그동안 숭의맹이 적대시하는 곤륜파에 꾸준히 자금을 대어 주었습니다. 이런 행동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곱게 보일 리가 없었겠지요. 그래서 본 상단에 앙갚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숭의맹은 비록 겉으로는 의를 숭상하는 척하나 실상은 자기네 이익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있으면 가차 없이 처단하는 족속들이니까요.”
뇌진천은 사뭇 격앙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게 정말인가요? 이런 위선자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헌데, 대체 어찌하면 그들과 맞설 수가 있을까요?”
“글쎄요……. 일개 상단인 우리의 힘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수라혈교의 힘을 빌리면 됩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시도는 한 번 해 볼 만합니다. 소인에게 맡겨 주십시오.”
“네, 그럴게요. 제발 부탁드려요. 수라혈교를 찾아가서 제발 만상상단의 원수를 대신 갚아 달라고 부탁해 주세요. 그렇게만 해 준다면 사례는 얼마든지 하겠다고 말해 주고요.”
“단주님의 뜻을 잘 알았습니다. 어떻게든 소인이 수라혈교와 접촉하여 일을 한 번 엮어 보겠습니다.”
추동진이 밖으로 나가자 뇌진천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로써 간신히 목숨은 건진 듯하군. 하지만 앞으로 무공은 더욱 철두철미하게 감춰야 한다. 혈교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경계하게 만들어서는 안 돼. 완전히 방심하도록 만들어야 해.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이곳을 탈출할 수 있을 테니까.’


4

서녕에 똬리를 틀고 있는 청해호(靑海湖)와 그 일대는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호반에는 유람선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배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것들은 단순한 고기잡이배나 나룻배가 아니라, 선창에 화려한 오색등(五色燈)을 밝혀 놓은 채로 한 명씩의 아리따운 기녀가 대기 중인 환락용 그림배였다.
각 기루에서 운영하는 배들은 호반의 특정 영역을 차지했는데, 배들은 목교로 연결이 되어 있어서 육지처럼 이동할 수 있었다.
호반 환락가로는 기녀들의 간드러지는 듯한 웃음소리와 호객을 하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각 그림배는 일단 선창으로 손님이 들면 호수로 나아간 다음, 등불이 꺼지고는 했다.
그러한 그림배들 가운데 하나에 추동진이 승선했다. 그런데 그를 맞이한 사람은 색기 어린 기녀가 아니라 죽립을 눌러쓴 사내였다.
“어서 오게.”
“속하가 당주님을 뵈옵니다.”

***

“당초 우리의 목표는 본교의 계율에 따른 철저한 심판의 차원에서 만상상단을 없애는 것이었네.”
“하지만 다시 한 번 재고해 주십시오. 청해성 내 다른 지역의 사업은 접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거대 상단입니다. 이대로 와해시키는 건 너무나 아까운 일입니다.”
“정 그렇다면 추 향주가 맡아서 계속 운영해 보게.”
“그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어째서인가?”
“사실 만상상단이 급격하게 규모를 키울 수 있었던 건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허가를 받아 채광 시설을 갖추고 야철을 생산하는, 전국에서 몇 안 되는 민영 상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성호가 가업으로 삼고자 조정과 직접 약언조서를 작성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한씨 일가의 대가 끊기면 저절로 취소됩니다. 물론, 채굴권은 자연히 다른 상단으로 넘어갈 테지요.”
“허면, 야철업은 그냥 포기하면 될 게 아닌가?”
“한 단주는 죽기 전에 면직과 염색, 제지업까지 손을 대었습니다. 만약 야철업의 수익이 끊기면 무리하게 벌여 놓은 사업들 때문에 결국 파산하고 말 겁니다. 무엇보다 현행 국법에 의하면 유언장이 없는 상태에서 대가 끊어질 경우, 전 재산이 조정으로 귀속되도록 정해져 있습니다. 즉, 사공자마저 죽으면 만상상단의 재산은 결국 조정의 쌈짓돈으로 전락하고 말 겁니다.”
“그것참…….”
“게다가 급격하게 세를 확장하고 있는 본교는 그 어느 때보다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상황이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만약 적법한 상속자인 사공자를 잘 활용한다면 만상상단을 계속해서 이 상태로 꾸려 갈 수 있습니다. 아직 철부지 꼬맹이에 불과하니,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결국은 그 아이를 죽이지 말자는 이야기인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본교에 훨씬 이득이 됩니다. 게다가, 사공자는 숭의맹을 이제 원수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본교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태도가 되었지요. 그러니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을 겁니다.”
“이 안건은 상부에 건의해 보겠네. 아마도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을 듯하이. 허나 언제라도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없애 버릴 것이야. 괜한 후환을 남겨 둘 필요는 없으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5

뇌진천은 만상상단의 실질적인 운영에 대해서는 전혀 간섭하지 않고 추동진에게 맡겨 두었다.
자신은 중요한 사안에 대해 압서(押署, 서명 날인)로서 최종적인 재가를 내리는 업무만을 감당할 따름이었다.
물론 이것 역시 형식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뇌진천은 이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글공부에만 매진하는 척했다.
뇌진천은 자신에게 언제나 감시의 눈이 붙어 있음을 알고서 조금이라도 의심을 살 만한 일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무공 수련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외공 수련은 불가능했지만, 적양공 수련에 있어서는 좌식을 제외한 입식, 와식, 행식, 면식을 은밀하게 적용했다.
그렇게 이 년의 세월이 지나자, 감시의 고삐도 많이 느슨해졌다. 수라혈교에서도 뇌진천이 단지 글공부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서생으로 여기고서 그다지 크게 경계하지 않는 듯했다.
‘수라혈교와 손을 잡은 이후 청해성의 각 지방에 대한 상권까지 회복되어 만상상단은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다. 이제 놈들로서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을 정도의 주요한 자금줄로서 확실히 자리 매김을 했을 테지. 소유권만 확실하게 틀어쥐고 있다면 나라는 존재의 이용 가치도 유효할 것이고. 무엇보다 이제 나에 대한 의심도 대부분 사라진 듯하니, 슬슬 탈출을 감행해 볼까?’
마음을 정한 뇌진천은 지체 없이 집무실로 찾아가 추동진을 만났다. 그리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난 이 년간 열심히 학문에만 매진하는 가운데 복수 같은 건 모두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어차피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차라리 아버님의 유지를 이어받기로 했어요. 원래의 계획대로 낙양에 있는 풍림학관으로 가서 열심히 수학하여 조정의 문관이 되겠어요. 기왕이면 아주 훌륭한 대학사가 되어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싶어요.”
추동진은 전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이곳을 떠나시려는 겁니까?”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어차피 상단 일은 추 집사에게 다 맡겼으니 제가 굳이 여기 있을 이유는 없잖아요?”
“단주님께서 낙양으로 가시면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그곳으로 가서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건 좀…….”
뇌진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선 전혀 걱정하지 말아요. 이참에 품재(稟裁)를 포함하여 상단 운영의 전반에 대한 전권을 추 집사한테 완전히 위임하겠어요. 이러면 더는 문제 될 게 없겠죠?”
“그, 그렇기는 하지만…….”
추동진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저 공부만 하겠다니, 영락없는 꽁생원이로군. 낙양에서의 소재지가 분명하니 그곳에 감시를 붙여 놓으면 될 테고……. 이 기회에 상단을 통째로 넘겨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테지. 어차피 본교에 위협이 될 인물은 아니니까.’
뇌진천은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숙부님 댁에서 머무를 테니, 그저 내가 낙양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학비만 확실하게 보내 줘요.”
생각 정리가 끝난 추동진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도련님의 뜻이 정 그렇다면……. 잘 알겠습니다. 올겨울이 끝나면 낙양으로 떠나실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6

과거에 낙읍(洛邑)이라 불리던 낙양은 장안(長安)과 더불어 중국의 칠대 고도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손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낙양은 동주(東周), 후한(後漢), 삼국(三國)의 위(魏), 서진(西晉)을 비롯한 구대 왕조의 도읍지였던 것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만큼 그 일대에는 수많은 명승고적이 자리한다.
중국 최고(最古)의 사찰인 백마사(白馬寺)를 위시하여 천진교(天津橋), 관제총(關帝塚), 용문(龍門), 그리고 불상의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 천불암(千佛巖) 등이 대표적이다.
동쪽으로는 호로관(葫虜關), 서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 남쪽으로는 이락(伊洛), 그리고 북쪽으로는 황하의 지류인 낙하(洛河)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낙양은 전략적인 요충지이면서도 천하문물의 집산지이다.
오랜 역사와 함께 흥망성쇠를 반복해 온 만큼, 예로부터 관부의 병가(兵家)들뿐만 아니라, 강호의 많은 무가(武家)들 역시 이곳에다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낙양의 서쪽 성문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많은 사람으로 분주했다.
성문에서는 관병들이 수문장의 역할을 하면서 각종 물자들을 싣고 다니는 우마차와 행상들을 비롯한 과객들로부터 통행세를 거두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후, 사륜마차 하나가 호위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성문으로 접근해 왔다.
“만상상단의 단주님이십니다. 관패(官牌)와 인허증(認許證)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통행세입니다.”
그러면서 호위대장은 큼직한 금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 순간 수문장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이어 그의 두 입은 양쪽 귓가에 걸릴 정도가 되었다.
부하들이 마차의 내부를 검문하려 하자, 수문장은 손짓으로 저지하며 황급히 통과시켰다.
마차는 한동안 낙양의 경내로 시원하게 뚫린 관도(官道)를 따라 달렸다.
대로변으로는 공경대부나 고관대작과 같은 명문거족들이 살고 있을 법한 고각대루(高閣大樓)들이 처마와 처마를 마주하며 도열해 있었다.
고대광실(高臺廣室)의 대저택들이 즐비한 지역의 대로를 중심으로 하여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는 크고 작은 가로(街路)의 주변에는 수많은 이 층의 목조 주택이 포진하고 있는데, 도저히 그 수를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얼마 후, 마차는 시가지로 접어들었다.
저잣거리에는 서점이나 다채로운 옷감을 파는 포목점을 비롯하여 각양각색의 잡화나 서화, 진귀한 골동품이나 장신구 등을 판매하는 가게들까지 무수한 점포로 가득 들어찼다.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는 상가에는 실로 천하각처의 온갖 산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창문을 통해 이런 광경을 지켜보는 뇌진천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은밀히 자객을 보내 올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으니, 다시금 절정고수의 반열로 올라서기 전까지는 철저히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낙양은 정파무림의 최고봉인 소림사(小林寺)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지역이다. 게다가 이곳과 그리 멀지 않은 개봉(開封)에는 숭의맹의 총단까지 있는 만큼, 이젠 사실상 수라혈교의 마수에서는 벗어났다고 봐도 무방할 터!’
뇌진천의 얼굴에는 기묘한 미소가 깃들었다.
‘혈교의 마도들아! 숭의맹의 위선자들아! 지금의 평화를 마음껏 즐겨라. 곤륜이 다시금 천하의 중심에 서는 그날, 처절한 공포에 몸서리치며 차라리 죽기를 소원하게 될 테니까.’
마침 그때, 꽃잎 하나가 뇌진천에게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재처럼 흩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