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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12화)
제5장 암중모색(暗中摸索)(2)
더 나아가 두뇌 속에 있는 생사현관(生死玄關)까지 타통시키면 비로소 신의 경지라 불리는 경지에 올라선다. 이것은 바로 명궁개화(命宮開化), 곧 상단전의 타통을 의미한다.
과거 혈해존자라 불리던 때의 뇌진천은 무극신공을 통해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는 이 단계까지 올라선 바 있었다.
물론 새로운 육체로 새롭게 시작하는 뇌진천이 당면한 문제는 심궁개화를 이룩하고 임독양맥을 뚫는 것이었다.
사실 잘 타통된 경맥이 있다고 해도 하단전에 축적된 공력을 진기로 활성화하여 그것을 전신의 기혈로 순환시키면서 내공의 수위를 끌어올리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된다.
하지만 애당초 전신의 경락과 중첩된 채로 존재하는 골수 속에 공력이 저장되어 있을 경우, 만약 경락이 충분하게 타통만 되어 있다면 거의 즉각적으로 활성화된다.
즉, 같은 양의 공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의 운행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사 상대보다 내공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일천할지라도 속도전을 감행할 경우 순간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압도적이다.
서녕에서 육 년 동안, 뇌진천은 꾸준히 적양공을 연마했다. 하지만 새로운 육체가 워낙 둔감하여 기감을 느끼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겨우 기감을 얻은 후에도 진기회전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하단전에 공력이 쌓이는 속도도 너무나 더뎠고, 전신의 경락도 제대로 뚫리지 않았다.
이에 뇌진천은 내공 수련의 지름길을 찾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써 보았지만, 현 상황에서는 정석대로 차근차근 밟아 가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양공의 연마를 시작한 지 십 년, 그러니까 낙양에 온 지 사 년째가 되자, 겨우나마 하단전에 한 줌의 내공이 축기되었다.
그 무렵, 뇌진천은 이미 학문에 관한 한 충분할 정도로 성취를 이룬 상태였고, 꾸준한 단련을 통해 몸 상태 또한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에 그는 심궁개화를 시도했다.
무극신공의 출발점이 바로 심궁개화이기 때문이다.
먼저 심궁개화를 이룩해야 골수에 공력을 저장할 수 있는 체계가 확보된다.
비록 지금까지는 극악할 정도로 내가무공의 성취가 느렸지만, 심궁개화를 이룩하여 무극신공을 본격적으로 연마하게 되면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돌이켜 보면, 무극신공의 오의를 깨달은 이후 십 년 동안 얻은 공력의 양이 그전까지 오십 년 동안 모은 공력의 열 배에 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단 심궁개화만 이룩하면 아무리 이런 몸이라고 해도 향후 삼 년 안에 등봉조극에 이를 수 있다. 그 정도만 되더라도 천하를 움직일 수 있다. 이제 난 더 이상 힘만 믿고 설치던 풋내기가 아니니까.’
4
서녕의 시가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왕래하며 활기를 띠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난히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장소는 십오 경이 넘는 장원을 겸비한 만상상단의 총단이었다.
장원의 북쪽에는 만상각이라는 현판이 붙은 오 층 높이의 거대한 전각이 솟아 있었다.
장원의 드넓은 대지 위로는 가병이나 하인이 거하는 집들이 수백 칸이나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담장 주변에는 무장된 가병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보초를 섰다.
이러한 가운데 청색 제복의 중년인 하나가 만상각으로 이어지는 주랑을 따라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곧이어 집무실로 들어섰다.
서탁의 후위에 앉아 있는 중후한 분위기의 노인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청의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단주로부터 전권을 위임 받아 만상상단을 꾸려 가는 행수로서 과거에 추 집사라 불리던 자였다.
본명은 목형준(牧炯俊)으로 수라혈교의 명을 받고 만상상단으로 스며든 인물이었다.
그때만 해도 서녕 일대의 동향을 파악하는 일개 향주에 불과했으나, 한씨 일가 몰살 사건에 지대한 공을 세워 루주로 진급했다. 그리고 근래에 이르러서는 수라혈교 청해 분타 제삼지국을 책임지는 국주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만상상단 본점인 바로 이곳이 이제는 청해 분타 제삼지국이 되었다.
무공이 약한 목형준이 국주가 된다는 것은 교 내에서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상인으로서의 수완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만큼 현재 만상상단이 수라혈교의 중요한 자금줄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국주님을 뵈옵니다.”
“긴히 이를 말이 있어 불렀다. 일단 그쪽으로 앉도록.”
“복명!”
목형준에 이어 외향주가 된 노도경(魯導耿)은 현재 만상상단에서는 호위 총관의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목형준의 지시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목형준의 감았던 두 눈이 떠졌다.
“그래, 한수겸의 동향은 좀 어떠하더냐?”
“이곳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난 사 년간 완전히 책벌레가 되어 글공부에만 전념해 왔다고 합니다. 다만…….”
“다만?”
“새벽에 일어나서 한 시진 정도는 저잣거리의 외곽으로 구보를 하고 생활 중에서도 틈틈이 난간 같은 데에 매달려 근육 단련을 하는 모습도 지속적으로 목격되었습니다.”
“외공을 익혀 왔단 말이냐?”
“속하의 생각으로는, 무공 수련은 아닌 듯싶습니다. 학업에 온전히 매진하려면 그만큼 강한 체력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체력 단련의 일환일 것입니다.”
“체력 단련이라……. 그러니까 낙양에 가서도 사 년 동안은 전혀 이상한 점이 없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헌데 어찌하여 그러시는 것이옵니까?”
“사실은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지시라니요? 설마……?”
목형준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때문입니까? 속하의 판단으로는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두어도 본교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겁니다.”
“닥쳐라! 누가 너더러 판단하라고 했느냐?”
“송구하옵니다.”
“판단은 위에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명령에 따를 뿐이지. 외부에 파견을 오래 나와 있었다고 절대적 상명하복이라는 본교의 지엄한 계율조차 망각한 것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속하는 다만…….”
“내키지 않는다는 말이로군.”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목형준은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항상 곁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으니 정이 들 만도 하지.”
겉으로는 부정했지만, 목형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는 사공자 전담 호위 무사로서 어릴 때부터 한수겸을 보호하고 돌봐 주었다. 그에게는 실로 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나, 임무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면 어찌 되는지는 육종당(陸終黨) 출신인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터.”
노도경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조금의 실수도 없이 이 일을 처리하겠습니다.”
목형준은 두 주먹을 불끈 거머쥐는 노도경을 비릿한 시선으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은 적당한 구실을 붙여 한수겸을 이리로 불러들일 것이다. 그 뒤의 일은 말 안 해도 짐작이 갈 테지.”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서녕은 험준한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으니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도 처리할 만한 장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목형준은 고개를 저었다.
“장원의 경내로 불러들여서 은밀히 처리할 것이다. 혹시라도 외부인의 눈에 띄어서는 곤란하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아무튼, 글밖에 모르는 백면서생 하나 해치우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목형준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한수겸은 고작 열두 살의 나이로 서너 명의 장정을 제압한 적이 있으니까.”
“그들은 군기도 제대로 안 잡힌 말단의 병졸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상대가 꼬마라고 방심하여 당했겠지요. 게다가 일가족이 몰살을 당하여 독이 잔뜩 오른 상태였으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말단이라고는 하나, 속하는 본교의 살객 출신입니다. 부디 믿어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뭘 어찌하겠다는 말이냐?”
“속하가 거느린 가병들 가운데 실력이 좋은 자들을 차출하여 놈을 처치하겠습니다.”
“내향 직할대의 도움은 필요가 없다는 것이냐?”
“외향을 맡은 이래로 속하는 그동안 착실히 훈련시켜 왔고, 실력이 많이 늘었습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예비 인원도 충분히 준비해 둘 테니, 심려치 마십시오.”
“좋다. 이 일은 너한테 일임하겠다. 절대로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노도경이 나가고 집무실에 홀로 남은 목형준의 곁으로 어느새 요염한 분위기의 여인 하나가 나타났다. 만상상단의 삼공자 한성준의 아내였던 맹소홍(孟炤紅)이었다.
“그 아이를 정말 죽일 생각이세요?”
“그래도 시동생이라고 걱정이 되는 것이냐?”
그 말에 맹소홍은 새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이 참! 짓궂기도 하셔라! 상공의 뜻에 따라 남편까지 독살한 신첩이 아닌가요? 그까짓 시동생이 뭐라고…….”
“껄껄껄! 하긴, 그렇지.”
“신첩은 다만 걱정이 되어서 그래요. 그 아이가 없으면 상단의 운영에 여러 가지로 차질이 생기잖아요?”
“내가 그걸 모르겠느냐? 허나 성질 더러운 소교주가 분타주에게 직접 압력을 넣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지.”
“대체 소교주는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자기네들한테 뭐가 이익이 되는지도 분간을 못하다니…….”
목형준은 자신의 어깨 위에 얼굴을 얹고 있던 맹소홍의 입을 손으로 가로막으면서 주의를 주었다.
“어허! 말조심하여라. 홍아 네가 외인이라 본교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잘 모르나 본데…….”
그러자 맹소홍은 등 뒤에서 목형준의 목을 감싸 안으며 애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잉! 설마 상공께서 이르실 건 아니죠?”
“농담할 일이 아니다. 아무튼, 좀 더 언행에 신경을…….”
하지만 목형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반라의 몸이 된 맹소홍이 입술을 포개어 왔기 때문이다.
5
많은 인파로 북적대는 낙양의 한 저잣거리를 관통하는 실개천 위로 놓인 석교 위에는 학창의 차림에 유건(儒巾)을 두른 문사 하나가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언뜻 보면 여인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수려한 용모를 지닌 청년이었다.
얼굴선은 단아하고, 코는 오뚝하며 입술은 석류처럼 붉었다.
학창의 문사는 개천에서 피어난 연분홍의 수련을 응시하며 그 정취에 한껏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붉었으면 좋겠군. 차라리 피라도 묻혀 볼까?”
이렇게 중얼거리는 학창의 문사에게 대답이나 하듯, 어디선가 한 줄기의 세찬 돌풍이 불어왔다.
학창의 문사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는 사이, 뒷머리를 올려 묶어 주던 붉은 천의 매듭이 풀어졌다. 그러자 그의 긴 머리칼은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렸다.
잠시 후, 눈언저리의 하단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주던 긴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니, 눈꺼풀 속에 감춰진 두 눈동자는 영롱한 빛을 반짝이며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냈다.
그의 머리칼은 중천의 햇살에 반사되며 은은한 빛깔을 띠어, 은발(銀髮)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해파리의 촉수처럼 하늘거렸다.
이렇듯 아름다운 용모와는 달리, 전반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었다.
얼굴의 앞으로 드리워진 앞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강렬하고 싸늘했다. 한없이 차가워 보이는 그의 무표정함 속에는 용솟음치는 듯 뜨거운 무언가가 아슬아슬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만 같았다.
이처럼 범접하기 어려운 풍모에도 불구하고 뽀송뽀송한 솜털로 덮여 있는 피부와 볼에 붙은 통통한 젖살이 그가 사실은 아직 생각보다 어린 나이임을 말해 주는 듯했다.
학창의 문사는 올해로 열여덟 살이 된 한수겸, 아니 뇌진천이었다. 그는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된 것이다.
뇌진천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난데없이 본가에서 보낸 전령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용건은 간단했다.
지금 목전에 두고 있는 거래의 규모가 워낙 큰 데다가 사안이 사안인지라 상대편에서 대리인이 아니라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을 만나고 싶어 하니 잠시만 돌아오라는 것이다.
‘최대한 냉정하게 돌이켜 보더라도 지금까지 나는 결코 놈들의 의심을 살 만한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째서 나를 불러들이려는 것일까?’
어차피 무더위로 인해 풍림학관도 잠시 휴관을 한 상태였다. 또한, 설사 이번 거래 건이 아니더라도 낙양으로 떠난 지 벌써 사 년이 넘어가니, 그래도 명색이 단주인 뇌진천이 한 번쯤은 본가를 방문해 주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상황이 어떠하든 놈들이 나를 서녕으로 불러들이려는 의도는 두 가지 가운데 하나다. 첫 번째는 말 그대로 정말 거래의 목적상 내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당연히 내 목숨을 노리는 것이겠지.’
뇌진천이 응시하는 홍련이 왠지 더 붉어 보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거절할 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가지 않는다면 놈들은 진짜로 나를 의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되면 멸문지화 이후 지금까지 숨 쉬는 것조차 조심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지내 온 나날들이 한순간에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만약 혈교에서 일류자객을 보내온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뇌진천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천을 주워서 한차례 털어 낸 다음, 뒷머리칼을 재차 올려 묶었다.
‘일단 현재까지의 정황을 놓고 볼 때 내 진면목이 들통 난 것은 아닐 터. 내가 놈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상황에서도 나를 죽일 수 있을까? 물론이다. 이용 가치만 사라지면 놈들은 언제든지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게 혈교의 생리이니까. 그럼, 과연 현재의 나에 대한 이용 가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