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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13화)
제5장 암중모색(暗中摸索)(3)
‘만상상단은 지난 수년간 수라혈교의 후광을 힘입어 급격하게 성장해 왔고 재정적인 기반도 아주 튼튼해졌다. 그만큼 나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진 건 분명하다. 게다가 추 집사가 내게 전권을 위임 받은 상황이니 나를 죽인 다음, 사체를 훼손하여 없애 버리더라도 당분간은 별일이 없을 터.’
서녕에 있을 당시의 뇌진천은 수라혈교의 그늘에서 항상 살얼음 위를 걷듯이 지내야 했다.
그런 반면, 서녕 관부의 보호도 동시에 받았다. 관부로서도 조세 수입에 큰 기여를 하는 만상상단의 동향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수라혈교 역시 경거망동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미 낙양에 온 지 사 년이 넘었다.
그만큼 뇌진천은 서녕 관부의 관심에서 멀어진 상황이었다. 그래도 학문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어 풍림학관에서는 아주 유명했고, 낙양관부에서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명사가 되었다.
‘게다가 낙양은 숭의맹의 영향력을 받는 지역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나를 암살하려고 들진 않을 것이다. 정말 나를 죽일 의도가 있을 때에도 지금처럼 나를 본가로 불러들이겠지. 그렇다면 지금의 관건은 과연 놈들에게 나를 살해할 의사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 후환을 없애려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나의 이용 가치와 관련된 문제라는 건데…….’
한경인은 당금 조정의 선황인 홍무제의 지지 기반이었던 명교(明敎)에 군자금을 공급한 바 있다.
훗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한경인은 홍무제(洪武帝)로부터 야철광산 채굴권을 선물로 받았다.
그 당시, 한경인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상단이 아니라 자신의 직계혈통을 계약 당사자로 상정했다.
그리고 그것은 십 년마다 갱신하게 되어 있었다. 즉, 본인이나 후계자의 생존 여부가 십 년마다 조정에 의해 자연스럽게 확인된다.
따라서 계약 당사자가 계약을 갱신하고자 황성에 나타나지 않으면 채굴권은 저절로 조정으로 넘어간다.
한경인은 이렇게 조치함으로써 상단의 근간을 이루는 야철 채굴권을 한씨 일가에 대한 충성심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아울러,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자신의 핏줄만은 이어 갈 수 있는 여건을 미리 안배해 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한수겸, 곧 뇌진천의 목숨을 지금까지 지켜 주었다.
물론 이제 만상상단은 굳이 야철 채굴권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굴러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는 하나, 만상상단의 기반은 역시 야철업이었다.
상단 운영에서 야철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거만큼은 안 되어도 오 할은 넘을 것이다.
‘과연 그 오 할을 포기하면서까지 내 목숨을 거둘 이유가 있을까? 내가 알기로는 칠 년 전에 계약이 갱신되었다. 만약 내가 놈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면 행방불명으로 가장하더라도 삼 년이 지나면 결국 야철 채굴권은 상실하게 되지.’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워낙 큰 이권이 걸린 사안인지라 조정에서 만상상단에 실사를 나올 가능성이 컸다.
만약 그때 단주인 뇌진천의 행방불명 사실이 알려질 경우, 자칫 만상상단의 전 재산이 몰수당할 수도 있다.
당금 조정은 강병책을 근간으로 하는 만큼 군자금 확보를 위해 조금이라도 틈만 있으면 부자들의 재산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만상상단은 혈교의 가장 큰 자금줄 가운데 하나로 자리 매김을 했을 것이다. 그리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테지. 물론 삼 년 내에 인장 반지를 위조하고 내 필체를 흉내 내어 양도각서를 위조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야철 채굴권을 빼앗기는 것은 불가피하다. 게다가, 설사 양도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조정에서는 막대한 세금을 떼어 갈 것이다.’
홍무제를 이어 혁명으로 황제가 된 영락제(永樂帝)는 이미 전대의 은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빈틈만 보이면 즉시 야철 채굴권을 회수하여 관영화시킬 것이 자명했다. 그리되면 수라혈교로서도 더는 어찌할 수가 없게 된다.
제아무리 사파무림의 지붕이라 불리는 수라혈교라고 할지라도 국법은 지켜야 한다. 백만의 금군을 가진 조정과 맞서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국법이다. 결국 국법이 나를 지켜 줄 것이다. 내 생명은 곧 채굴권이다. 그러니 내가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한 이상, 나를 죽일 이유가 없다.’
뇌진천의 얼굴에는 결연함이 깃들었다.
‘지레 겁을 먹고 도주하면 내 정체를 자백하는 격이 된다. 그리되면 차후, 혈교에서 파견한 특급살수들의 추격을 받게 될 테지. 그래! 충분히 감수해 볼 만한 위험이다. 이번 시험만 통과하면 풍림학관을 마칠 때까지 최소한 삼 년의 세월을 벌 수 있다. 그때쯤이면 나는 심궁개화를 이룩하고 나서도 이미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있을 것이다. 좋다! 여기까지 와서 도망자 신세를 자처하지 말자. 한 번 부딪혀 보는 거다.’
6
“이랴! 이랴!”
마부는 마차를 이끌고 있는 두 마리의 말에게 연신 채찍질을 가했다. 마차의 속도는 계속해서 빨라졌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날씨는 화창하게 개었지만, 아까 내린 소나기로 인해 젖은 지면 위로는 두 갈래의 깊숙한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면서 줄곧 이어졌다.
뇌진천을 태우고 서녕의 본가로 돌아가는 마차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인가?”
뇌진천의 말에 마부는 황송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낙뢰로 고목이 쓰러진 모양입니다. 얼른 치우고 다시 길을 재촉하겠습니다.”
뇌진천이 마차의 창문을 통해 고개를 내밀어 전방을 살펴보니, 정말 큰 통나무 하나가 길을 막고 있었다.
‘이거 왠지 느낌이 좋지 않은데?’
뇌진천은 촉각을 잔뜩 곤두세운 상태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그를 호위하던 무사들 가운데 몇 명이 말에서 내려 길을 가로막고 있던 통나무를 옆으로 굴렸다.
장애물이 치워지자 마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뇌진천은 여전히 경계의 고삐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어쩐지 호랑이 소굴로 들어가는 기분이로군.’
얼마 후, 외성곽의 성문을 통과한 마차는 서녕으로 진입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저잣거리의 전경이 시야에 들어오자 새삼스럽게 한설지와 함께 보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혈해존자 시절을 포함하여 근 백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녀와 보냈던 그 사 년이 유일하게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잠시 상념에 젖어들던 뇌진천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이렇게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지.’
마음을 추스른 뇌진천은 끊임없이 주변의 동향을 살폈다. 그사이, 마차는 만상상단 본점의 정문에 도착했다.
입구에서는 제삼지국 외향주 노도경이 뇌진천을 맞이했다.
“단주님을 뵈옵니다.”
뇌진천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노도경의 행색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복장을 보니, 호위 총관으로 승진한 모양이군.”
“송구합니다.”
“송구할 게 무엇인가? 능력이 있으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지.”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헌데, 어째서 자네가 있는가? 그래도 명색이 단주인데 추 집사, 아니 추 행수가 나를 영접해야 하지 않겠나?”
노도경은 다소 당황했다. 외견상으로도 지난 사 년 동안 뇌진천은 정말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앳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기골이 장대하지는 않지만, 아주 옹골차고 다부진 체격의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특히, 단주의 두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예리했다.
‘단지 몸만 자란 것이 아니다. 너무 박식해져서 그런가? 아무튼, 결코 얕볼 수만은 없는 인물이 되어 버렸구나. 아무래도 좀 더 신중하게 거사를 치러야겠어.’
마음을 다잡은 노도경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추 행수께서는 급한 일이 생겨 잠시 출타 중입니다. 일단 거처에서 쉬고 계시면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뇌진천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노도경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회피했다.
‘눈빛이 흔들리는군.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걸까? 아직은 모든 게 불투명하다.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겠어.’
뇌진천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알겠네. 그리하지.”
“그럼, 소인이 처소까지 모시겠습니다.”
뇌진천은 노도경의 수행을 받으며 만상상단의 경내로 진입했다. 노도경은 그간의 근황을 간략하게 보고했다. 뇌진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이따금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었다.
만상상단 경내의 모든 이들은 뇌진천을 볼 때마다 허리까지 굽히며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런 가운데, 뇌진천은 어느새 만상각 사층에 위치한 단주실로 안내되었다. 노도경은 공손하게 말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제6장 창해유주(滄海遺珠)(1)
1
황금 향로에서 흘러나오는 신선한 향내가 은은하게 밴 드넓은 실내의 곳곳에는 역시나 황금으로 된 촛대 위에 황촛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그리고 내부를 실용적으로 구획하는 비단 휘장에는 실로 정교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다.
‘겉으로는 단아하고 조용한 방이지만…….’
뇌진천은 실내의 구석구석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자단목으로 된 침상 위에 잠시 걸터앉아 있던 뇌진천은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통해 밖을 내려다보았으나 어떠한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지나치게 민감한 걸까? 아니다. 이곳은 사지나 다름없다.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다. 만약 나를 암살할 의도가 있다면 필시 잠이 든 때를 노릴 것이다. 일단 잠든 척하고 있으면 본색을 드러낼 테지. 부디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군. 아직도 난 힘이 많이 부족한 처지이니까.’
단주실에 부속된 욕실에서 간단하게 세면을 하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뇌진천은 이윽고 침상 위에 누웠다.
그렇게 일다경쯤 지났으나,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긴장이 다소 풀리자, 마차를 타고 먼 길을 오면서 쌓인 여독 탓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뇌진천은 잠이 들지 않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세차게 꼬집었다. 피멍이 들 정도였다.
더는 졸음을 참지 못한 뇌진천이 일어나 앉으려 할 때였다. 마침내 복도에서 수상한 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젠 굳이 졸음을 쫓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창졸간에 잠이 확 달아났기 때문이다.
뇌진천은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잠시 후, 단주실의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기척도 제대로 숨기지 못하고, 살기도 전혀 갈무리하지 못하는 걸로 봐서 하류무사로군. 내가 어지간히도 우습게보인 모양인데? 어쨌든, 이걸로 나를 제거하려는 놈들의 의도는 명백해졌군. 헌데, 왜지? 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없애려는 거지?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변수가 있는 모양이군. 역시 무공 이상으로 중요한 건 정보력이로구나.’
복면인이 뇌진천의 지척에 이를 때였다. 대번에 몸을 일으킨 뇌진천은 침상을 박차며 위로 솟았다. 그의 우측 무릎은 복면인의 턱을 강타했다. 오 년 전과는 달랐다.
그때, 뇌진천에 의해 턱을 가격당한 장한은 단지 뒤로 자빠질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복면인은 목뼈가 부러지며 즉사해 버렸다.
‘내 육체가 이 정도로 강해진 줄은 미처 몰랐군. 하긴, 그동안 실전에서 힘을 가늠해 볼 기회가 전혀 없었으니까.’
자신감을 얻은 뇌진천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복면인을 향해 마주 치달았다.
공중제비를 돌며 상대방의 머리 위로 지나간 뇌진천은 뒷발을 후위로 쭉 뻗으며 복면인의 뒤통수를 강하게 가격했다.
안 그래도 몸의 중심이 전방으로 쏠려 있던 터라 복면인은 하릴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뇌진천이 사뿐하게 착지할 때였다.
또 다른 복면인 하나가 칼을 휘두르며 덮쳐 왔다. 칼날이 지척으로 이르는 순간, 회전하면서 주저앉듯이 자세를 낮춘 뇌진천은 왼손으로는 상대의 우측 손목을, 오른손으로는 그의 좌측 팔꿈치를 거머쥐었다.
그와 동시에 뇌진천은 관성을 이용하여 검으로 찔러 오던 복면인을 진행 방향을 따라 물 흐르듯이 내팽개쳤다.
뇌진천을 노리던 검은 앞서 뒤통수를 맞고 엎드려졌다가 다시 일어서던 복면인의 몸을 찌르고 말았다.
이렇게 실내로 들어선 세 명의 복면인을 제압하고 복도로 나설 때였다.
이번에는 호피 옷차림의 대머리 거한이 앞을 막아섰다. 그는 뇌진천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컸다.
“뭐야, 넌? 오호라, 혈교에서 보낸 개로구나.”
뇌진천의 말에 거한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쥐방울만 한 게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나를 죽인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한번 해 봐.”
뇌진천은 망설임 없이 거한을 향해 달려갔다.
그 무렵, 거한은 어서 오라는 듯 뇌진천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뇌진천은 거한의 두 손이 자신을 붙잡으려는 순간, 더욱 가속했다. 빙판 위를 미끄러지듯이 뒤로 넘어지며 앞으로 나아간 뇌진천은 하릴없이 허공만을 끌어안은 거한의 두 팔 가운데 우측 팔목을 두 손으로 거머쥐었다.
뇌진천은 안 그래도 앞으로 쏠려 있는 거한의 팔을 자신의 체중을 최대한 실으면서 아래로 힘껏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그는 거한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갔다.
거한은 몸의 균형을 잃고서 꼬꾸라져 바닥에다 얼굴을 처박았다.
쿠우웅!
곧장 몸을 일으켜 세운 뇌진천은 우측 무릎으로 거한의 정수리 중앙, 곧 천령혈(天靈穴)을 강타했다.
“크윽!”
거한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절명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앞서 자신의 칼로 동료를 찌른 복면인이 호각을 분 것이었다.
‘제기랄! 진작 숨통을 끊어 놓았어야 했는데…….’
다급해진 뇌진천은 당장에 달려들어 복면인의 목을 꺾어 버렸다. 그러나 이미 곳곳에서 가병들이 달려왔다. 뇌진천은 자신에게로 덤벼드는 그들을 향해 추상처럼 호통했다.
“멈춰라!”
뇌진천의 기세에 가병들은 잠시 움찔했다.
“나는 본 상단의 단주 한수겸이다. 아무리 사 년의 세월이 지났기로서니 단주의 얼굴까지 잊어버린 것이냐?”
하지만 가병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뇌진천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상단 자체가 통째로 수라혈교의 근거지로 전락한 모양이군.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지.’
뇌진천은 쇄도하면서 높이 도약했다.
그리고는 허공을 걷는 것처럼 두 발을 교차시켜 휘저으며 두 가병의 가슴팍을 가격했다.
그로 인해 앞의 두 명이 뒤로 나동그라졌고, 뒤따르던 다른 가병들 역시 휩쓸리면서 함께 꼬꾸라졌다. 뇌진천은 한데 뒤엉긴 채 쓰러진 가병들 위를 밟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