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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16화)
제7장 권토중래(捲土重來)(1)
1
뇌진천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금세 두 팔이 등 뒤로 포박된 채 함거로 압송되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했다. 그뿐 아니라, 전신의 혈도가 제압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뇌진천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의 상황을 살폈다.
‘대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길가의 정경이 왠지 눈에 익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곤륜산과 불과 일 마장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곤륜파는 이미 사라졌을 텐데……. 내가 왜 이곳으로 끌려가는 거지? 그러고 보니, 곤륜파가 있던 자리에 수라혈교 청해 분타가 세워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래도 나는 바로 그곳으로 끌려가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게 나를 죽이려고 하더니, 대체 무엇 때문에 또 살려 둔 거지?’
마침 그때, 뇌진천의 귓전으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노도경을 향해 구연우가 하는 말이었다.
“난 말이야, 지금도 저 녀석을 보고 있으면 한설지가 생각나더군. 그녀는 서녕일미(西寧一美)라는 별명답게 내가 여태껏 품어 본 여자 중에서도 정말 최고였지.”
노도경은 듣기 싫다는 듯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구연우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어 갔다.
“그렇게 흥분해 본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한설지의 살결은 참으로 새끼 노루의 털처럼 부드러웠고, 새하얀 목덜미는 눈부실 정도였지. 꽃봉오리처럼 봉긋한 가슴은 포도송이처럼 달콤했고, 배꼽은 여아홍을 담은 술잔처럼 향긋했지.”
이를 시작으로 구연우의 노골적인 음담패설이 이어졌다.
한편, 본의 아니게 그 이야기를 엿듣게 된 뇌진천의 가슴속에서는 해일과도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찌나 격분했던지 두 눈에 곤두선 핏발에서는 급기야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실핏줄이 터져 버린 것이다.
그것은 눈물과 합쳐진 채로 뇌진천의 양 뺨 위를 흘러내렸다. 그야말로 피눈물이었다.
‘용서할 수 없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지난 십 년간 길러 온 통제력도 뇌진천의 내면에서 열화처럼 일어나는 혈기를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록 얼마 되지는 않으나, 뇌진천의 하단전에 축적된 공력은 이미 진기로 활성화되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전신 기혈은 충분히 타통되지 않은 데다가 혈도마저 제압되어서 진기는 제대로 순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은 갈팡질팡하며 심하게 요동치며 사지백해를 방황했다.
뇌진천의 전신에서는 거미줄 같은 혈관들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 무렵, 뇌진천의 몸 안에서는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빠져나갈 통로를 찾지 못하여 날뛰던 폭기(暴氣)가 심궁 쪽으로 몰려들더니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그것을 뚫고 나가 버렸다. 심궁개화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심궁개화와 더불어 하단전에서 끓어올라 설치던 폭기는 대해와도 같은 골수 속으로 스르르 스며들었다. 그뿐 아니라, 제압되어 있던 혈도 역시 순식간에 풀려 버렸다.
***
“사실 그렇게 혀를 깨물고 뒈져 버리지 않았어도 소교주가 척살령을 내렸으니, 결국은 죽일 수밖에 없었…….”
바로 그때, 구연우의 등 뒤로는 마치 갈고리처럼 기이하게 굽어진 인간의 손이 나타났다. 그것은 그의 등을 그대로 파고들었다. 구연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당장에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크게 떠졌다.
구연우는 진저리치며 온몸을 비틀었다.
비명을 내지를 것 같으면서도 신음조차 토해 내지 못했다. 극렬한 고통에 몸서리칠 따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뇌진천의 운룡조가 등 뒤로부터 파고들어 구연우의 심장을 불끈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아니, 자네! 갑자기 왜…….”
노도경 역시 말을 잇지 못했다.
뇌진천의 손바닥 위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도 여전히 팔딱팔딱 뛰고 있는 구연우의 심장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그 광경에 대경실색한 노도경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다 부숴 버리겠다. 모조리 부숴 버릴 테다!”
함께 뇌진천을 압송하던 무인들 역시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뇌진천은 실로 악귀와도 같은 시선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비록 한설지를 욕보인 원흉을 처치하기는 했으나 그는 전혀 분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한설지와 관련된 감정이 이미 그의 머릿속을 완전히 장악해 버린 것이었다.
2
시뻘건 기운이 피어오르는 뇌진천의 두 손바닥은 전후좌우 구분 없이, 여러 방향으로 빠르게 내질러졌다.
수많은 장영(掌影)이 난무하여 그의 주변을 보호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장막(掌膜)의 결계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그것은 주변의 적들을 무서운 기세로 덮쳐 갔다.
누구든지 뇌진천의 일장을 선사 받으면 완전히 피곤죽으로 변하여 맥없이 허물어졌다.
“호, 홍사장(紅沙掌)!”
노도경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무렵, 뇌진천은 상대가 휘두르던 귀두도를 빼앗았다. 뇌진천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귀두도의 도신(刀身)에서는 불그스름한 기류가 발산되었다.
전방으로 쇄도한 뇌진천은 진로에 있던 무인을 향해 두 손으로 거머쥔 귀두도를 하단으로 내리그었다.
이 일격으로 그는 상대방을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단번에 베었다.
귀두도를 비틀면서 뒤로 회전한 뇌진천은 그 방향에서 달려들던 무인 세 명의 목을 한꺼번에 베었다.
‘저, 저건 틀림없는 추명도법이다! 그렇게 순진하고 귀엽던 아이가 어떻게 저런 괴물이 될 수가 있는 거지? 아니, 그걸 떠나서 어떻게 갑자기 저런 위력을 뿜어낼 수 있는 거지? 일단은 막아야 한다. 막고 나서 생각할 일이다.’
잠시 멍해 있던 노도경이 본격적으로 움직이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혈교의 무인들도 전열을 가다듬었다.
노도경의 통솔 하에 적들이 검진을 펼치며 압박해 오자, 뇌진천은 지축을 박차며 물 찬 제비처럼 위로 훌쩍 도약했다.
그런 다음 크게 한 바퀴를 도니, 도기가 쫙 펼쳐지며 순간적으로 검진의 최전선을 이루고 있던 무인들 일곱의 목이 잘렸다.
이를 시작으로 뇌진천은 두 손으로 거머쥔 귀두도의 칼날을 횡으로 뻗으면서 자신의 몸을 팽이처럼 계속 회전시켰다.
그의 몸을 축으로 하여 회전하는 칼날에 의해서 검진을 형성하던 무인들 대부분의 몸이 공중에서 분해되듯 박살나고 말았다.
그 주변에는 안개처럼 선혈이 흩뿌려졌다.
‘회룡쇄마도(廻龍碎魔刀)까지 펼치다니……. 정말 곤륜파의 정수를 이어받은 전인인 모양이구나. 이미 부하들도 대부분 잃은 마당에 나 혼자 어찌해 볼 상대가 아니다. 우선은 이 사실을 분타주님과 국주님께 알리는 게 급선무다.’
마음을 정한 노도경은 즉시 퇴각령을 내렸다. 그러자 살아남은 무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줄행랑을 쳤다.
뇌진천은 굳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지는 않았다. 너무 광분하여 날뛴 탓에 그 역시 지칠 대로 지쳤다.
아무리 심궁개화가 이루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기혈이 제대로 타통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치게 무리하여 내상까지 입은 터였다.
게다가, 지난 십 년간 적양공으로 모았던 진기도 이미 할 일을 다 마치고는 사지백해로 흩어져 버렸다.
비록 얼마 되지는 않지만 적양진기는 무극신공의 탁월한 운공에 힘입어 방금 전, 뇌진천이 보여 준 상승무공의 원동력으로 충분한 역할을 해 주었다.
그것을 다시 갈무리하여 진기로 활성화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활화산처럼 들끓던 폭기가 사라지자 뇌진천 겨우 진정되었다. 그는 자신과 주변의 상황을 검토했다.
‘너무 흥분을 했던 모양이군. 앞으로는 더욱 자제해야겠다. 헌데, 놈들의 앞마당에서 이런 일을 벌였으니 필시 추격이 붙을 것이다. 청해 분타에는 쟁쟁한 고수들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게다가, 몸이 지금 이런 상태이니 추격을 따돌리고 도주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테지. 이제 어찌한다?’
그 순간, 뇌진천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래, 내 무덤! 일단 그리로 한번 가 보자. 그곳에는 나의 애검(愛劍)도 있고, 은신하기도 안성맞춤이니…….’
상처에 대한 지혈을 재빨리 끝마치고 몸에 묻은 적들의 피를 깔끔하게 닦아 낸 뇌진천은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3
뇌진천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하면서 자신의 무덤으로 향했다. 수년간 퇴적된 두터운 낙엽층 때문에 그의 무덤은 이제 전혀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과연 내 예상대로군.’
많이 지친 상황이었지만 뇌진천은 낭떠러지의 가파른 비탈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외곽으로 돌출된 암벽 아래에는 나무뿌리들이 드리워진 작은 동굴이 있었다. 뇌진천은 가급적 은폐물을 훼손시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구덩이 안으로 온전히 안착했다.
뇌진천은 절벽 쪽의 통로를 통해 미세하게 새어 드는 달빛에 의지하여 구덩이의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암순응이 되면서 점점 시야가 열렸다.
내부에는 반짝이는 것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이미 백골이 된 강환지체에서 발산되는 인광이었고, 다른 하나는 폭마혈검의 검집에 박힌 비취옥이었다.
뇌진천은 먼저 자신의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위풍당당한 풍모는 온데간데없고 바짝 마른 뼈다귀에 불과했다.
‘한때는 저 육체를 입고서 온 천하를 호령했거늘……. 참으로 인생이라는 건 무상하구나. 그러고 보면 제아무리 천하를 뒤흔들던 영웅들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지.’
뇌진천은 문득 복수라든가 무림제패 같은 게 다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허하고 허탈한 기분에 취해 있던 그의 시선은 폭마혈검으로 향했다.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것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그 순간, 그것을 쥔 손을 따라 온몸으로 짜릿한 전율 같은 것이 휩쓸고 지나갔다.
‘비록 몸은 달라졌어도 너는 나를 알아보는구나.’
발검하자 폭마혈검은 기묘한 검광을 발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뇌진천의 얼굴에는 재차 결의가 깃들었다.
‘그래! 어차피 나중에 먼지로 사라질 인생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불태울 따름이다!’
폭마혈검을 다시 검집으로 넣은 뇌진천은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꿈꾸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예전 육신을 더듬었다. 옷섶의 갈비뼈 사이로 뭔가가 구슬처럼 둥그런 것이 만져졌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는 이채가 깃들었다.
“어라, 이게 뭐지? 사리 같은 건가?”
뇌진천은 그것을 꺼내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실로 오묘한 빛을 발했다.
흡사 공청석유와도 같은 모양이었다.
이에 뇌진천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사리가 아니다. 그래, 이건 내단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내 시체에서 생겨난 내단이야. 어찌 이런 일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뇌진천은 이내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모든 무림인이 탐내는 강환지체였을 뿐 아니라, 이 몸에 쌓였던 내공이 무려 십오 갑자에 달했으니, 이 정도의 내단 하나쯤은 생겨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터.’
뇌진천은 혹시나 하여 백골의 곳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더 이상의 내단은 발견되지 않았다.
“쳇, 아쉽군.”
뇌진천은 손바닥 위에 놓인 내단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려 그것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과연 여기에 담긴 내공이 얼마나 될까?’
한동안 내단을 응시하던 뇌진천은 금세 그것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특별한 맛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내단은 봄 눈 녹듯 사르르 녹으면서 식도를 따라 몸 안으로 들어갔다.
체내로 흡수되는 순간, 내단에 서려 있던 내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어 그의 사지백해를 주유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체할 수 없는 기운이 곳곳에서 불끈불끈 치솟았다. 그것은 길들지 않은 천리마와도 같았다.
뇌진천은 격렬하게 진저리쳐지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새로운 육체가 받아들이기에 혈룡진기는 너무나 강력했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애당초 혈해존자의 공력에서 비롯된 내단인지라 특별한 거부 반응은 없었다.
내단에 응축된 공력은 유실되지 않고 뇌진천의 새로운 육체로 고스란히 흡수되었다.
그 이후, 사지백해를 떠돌던 혈룡진기는 이윽고 하단전으로 집결되었다.
뇌진천은 운집된 내공의 양을 가늠해 보았다.
‘어림잡아 반 갑자 정도 되는군. 좋아. 우선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일단 전신의 기혈부터 타통시켜야겠군. 아무리 기감이 둔한 몸이더라도 반 갑자의 혈룡진기라면 단지 기압(氣壓)만으로도 능히 뚫을 수 있다. 게다가, 일단 전신의 세맥까지 뚫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체질 자체가 완전히 바뀔 테니, 이 육체도 더는 내게 장애가 되지 못한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뇌진천은 하단전으로부터 혈룡진기를 끌어올리며 본격적인 운공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