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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무쌍 1권(19화)
제8장 파죽지세(破竹之勢)(2)
광범위한 독질려 매설지가 전방으로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미 서녕에서 한 번 경험한 바 있다. 그때는 도저히 건널 수가 없어서 포기했었지. 지금은 다르다. 물론 곳곳에 매복도 있겠지만 돌파하는 건 어렵지 않다.’
휘이이익!
똬리를 트는 용처럼 뇌진천의 온몸을 휘감아 돌던 호신기풍은 더욱 거세지면서 이내 강렬한 수직 상승의 기류로 바뀌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바닥에서 서서히 떠올랐다.
그렇게 그의 발은 지상에서 대략 일 척가량 떨어졌다.
허공으로 몸이 약간 떠오른 상태에서 뇌진천은 활시위처럼 몸을 뒤로 젖혔다가 그 반동을 이용해 전방으로 치고 나갔다.
뇌진천은 궁신탄영(弓身彈影)의 신법을 시전하여 일순간에 가속하며 독질려 매설지 위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뇌진천은 궁신탄영에 이은 답허성실(踏虛成實)로 독질려 매복지 위를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그러자 철저히 기척을 숨기고 있던 적들도 이윽고 행동을 개시했다.
피쉿, 피윳!
잎사귀가 무성한 나무 위에서 비도나 표창, 돈표와 같은 암기들이 뇌진천을 향해 무수히 날아들었다. 각각의 암기에는 상당한 내력이 서려 있어서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암기 가운데 어떤 것도 그의 몸에 적중하지는 못했다.
궁신탄영으로 가속하며 돌파를 시작한 뇌진천은 금안행운(金雁行雲)의 신법을 펼쳐 구름 사이를 나는 금기러기처럼 자유자재로 방향을 틀며 모든 암기를 피해 냈다.
이따금 제대로 날아든 암기들도 뇌진천의 전신으로 휘감아 도는 호신기풍에 휩쓸리면서 바닥으로 맥없이 떨어질 따름이었다.
암기가 제대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사방에서 비조가 날아들었다.
교룡의 힘줄로 된 밧줄 끝에 달린 매서운 갈퀴들은 뇌진천의 몸을 쥐어뜯을 듯이 덮쳐 왔다. 하지만 교룡삭 비조 역시 호신기풍의 풍압을 견딜 수는 없었다.
쉬이이익!
뇌진천은 바람을 가르며 전광석화처럼 날아갔다. 그리고 어느덧 독질려 밭의 돌파를 목전에 두게 되었다.
뇌진천의 몸은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전방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물 위를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무력답수(無力踏水)의 신법을 응용하고 있었다.
공기를 물로 삼고, 호신기풍의 상승 기류를 부력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궁신탄영으로 자신의 몸이라는 배를 대기라는 물 위에 띄운 뇌진천이 무력답수를 순풍의 돛으로 삼고, 금안행운을 방향조절의 타(舵)로 삼아 질주하는 동안에도 나무 위에 매복된 적들은 그의 털끝 하나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다.
바닥에 온통 독질려가 깔렸음을 알기에 그들은 감히 지상에서의 근접전을 펼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여지없이 독질려에 발을 찔려 죽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트드득, 트드득!
뇌진천이 통과해 가던 바닥에서 적색 무복의 복면인들 수십 명이 검을 하늘을 향해 곧추세우며 물 찬 제비처럼 치솟았다. 땅속에 매복했던 무인들이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지금껏 좌우의 나무 위로부터 계속 공격받아 그쪽에만 신경이 집중되어 있던 터라, 뇌진천에게 있어 아래쪽은 사각지대였다.
설마 적들이 땅속에서 치솟아 오르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뇌진천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뇌진천은 어기충소(馭氣沖宵)의 신법을 펼쳐 순간적으로 자신의 몸을 위로 높이 띄웠다.
그가 허공으로 신속하게 솟구칠 때, 머리 위에서는 천잠사(天蠶絲)로 된 그물이 지체 없이 덮쳐 왔다.
주변의 나무 위에 매복 중이던 북두육살 소속 서른 명의 녹의인(綠衣人)이 협력하여 펼친 것이었다.
위에서는 천잠사의 그물이 덮쳐 오고, 아래에서는 서슬이 시퍼런 수십 개의 검이 치솟아 온다.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3
허공으로 치솟던 뇌진천은 위에서 강하하는 그물을 발견했다. 그의 흑단처럼 검은 눈동자는 구슬처럼 신속하게 좌우로 굴렀다. 그는 도중에 몸을 비틀어 바위를 박찼다.
타닥!
그 순간, 뇌진천은 엎드리듯 몸을 기울였다. 그와 동시에 머리가 자신의 사타구니 사이에 들어갈 정도로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두 다리를 쫙 벌리면서 회전했다.
용무선회각(龍舞旋回脚)이었다.
일순간에 몸을 지상으로 평행하게 만든 뇌진천은 나무 둥치를 박찬 반동을 이용하여 전방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며 회전한 것이다.
뇌진천의 전신으로는 여전히 호신기풍이 휘감아 돌고 있었다. 원래 지상과 직각으로 회전하던 호신기풍은 이제 지상과 평행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회전력까지 더해지자, 호신기풍의 풍압은 몇 배 이상으로 폭증했다.
“크아아악!”
검을 위로 곧추세운 채 아래에서 치솟던 무인들 가운데 뇌진천의 지척까지 이른 이들은 용무선회각을 시전하는 그의 발에 강타당하며 지상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조금 늦게 치솟은 검객들은 폭기를 머금은 호신기풍에 휘말려 제대로 접근조차 못하고서 사방으로 나동그라져야 했다.
그 과정에서 재수 없게 동료의 눈먼 검에 찔려 죽는 자도 여럿이 생겨났다. 그리고 대다수는 매복지 위로 떨어져서 여지없이 독질려의 독침에 찔리고 말았다.
아울러, 녹의인들이 각각 가장자리의 한쪽 귀퉁이를 잡고서 강하시키던 천잠사의 그물도 풍압으로 인해 다시 위로 떠올랐다.
이렇듯 자객들이 혼란에 휩싸인 와중에, 뇌진천은 독질려가 깔린 수림 지대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바닥에 착지하여 잠시 뒤를 돌아보는 뇌진천은 다소 흐트러진 호흡을 입공으로서 가다듬었다.
간단하게나마 운공하자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들은 어느새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기화되어 대기 중으로 사라졌다.
다시금 전의를 가다듬은 녹의인들이 추격해 오는 모습이 보이자, 뇌진천은 곧장 전방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뇌진천이 섬광처럼 질주하는 협로 앞으로는 양쪽으로 비탈진 두 개의 언덕이 자리했다.
그곳은 태청오로관이 하나로 합쳐지는 용봉관이었다. 비록 곤륜파가 망하고 그 자리에 수라혈교 청해 분타가 들어섰다고는 하나, 본산으로 진입하는 통로는 용봉관밖에 없었다.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뇌진천은 상당한 위험이 있음을 알고도 바로 그 용봉관을 향해 치달았다.
그가 진입하는 순간, 가파른 언덕 위에서는 거대한 통나무와 바위들이 무서운 기세로 굴러 떨어졌다.
뇌진천은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의 신법을 펼치며 자신의 곁으로 육박해 오는 통나무와 바위 사이를 교묘하게 통과했다. 가끔씩은 바위나 통나무를 박차며 허공으로 치솟기도 했다.
그 밖에도 온갖 위험천만한 함정과 기관 장치가 발동하여 뇌진천을 공격했다.
그때마다 뇌진천은 표홀한 신법을 선보이며 그다지 어렵지 않게 장애물들을 통과했다.
그 광경에 뇌진천의 뒤를 쫓다가 잠시 협곡의 입구에서 멈추어 서 있던 백여 명의 녹의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들은 북두육살과 북두오살에 소속된 무인들이었다.
“세상에나! 저 녀석은 우리가 예측한 것을 훨씬 뛰어넘는 불세출의 고수임이 틀림없어.”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정말 격이 다르군.”
“그래! 우리는 여기까지일세. 이제 뒷일은 내당의 무사들에게 맡길 수밖에…….”
전의를 상실한 복면인들이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뇌진천은 어느덧 용봉관을 벗어나고 있었다.
4
청해 분타주 섭동천은 뱀처럼 몸이 가늘었으며, 족제비처럼 날카롭고 음흉한 눈을 지닌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일단 출수하면 반드시 피를 보는 잔인한 상품으로 인해 냉면혈귀(冷面血鬼)라고 불렸다.
섭동천은 북두전(北斗殿)에서 내당의 간부들과 더불어 간부 회합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섭동천을 비롯한 청해 분타의 주요 수뇌들은 한수겸이 설마 살아서 산채에까지 이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령이 급히 와서 모든 상황을 소상히 보고하자, 좀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는 섭동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씨 일가의 애송이가 외당의 일차 방어선에 이어 열두 군데의 매복처까지 돌파했다니……. 정녕 사실이렷다?”
회의청의 태사의에 앉아 있는 섭동천의 종용에 그의 앞에 부복한 척후 무사가 확신 있게 대답했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대로라면 그놈이 이곳까지 당도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싶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용담호혈(龍潭虎穴)을 뚫으려고 하다니……. 어쩌면 예상 이상으로 위험한 놈일지도 모르겠군.”
혼잣말과도 같은 섭동천의 이러한 반응에 주변에 있던 간부들의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그래 봤자 혼자일 뿐입니다.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 머지않아 제 풀에 지쳐서 나가떨어질 겁니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녀석의 몸놀림이나 기세를 보면 정말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기껏해야 아직 약관도 안 된 풋내기일 뿐입니다. 내공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습니까? 날뛰는 것도 잠시일 겁니다. 이제 곧 한계를 드러낼 테지요.”
“모든 걸 외양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지국으로 돌아간 노 향주의 말에 따르면 한수겸은 참으로 심계가 대단한 인물입니다. 믿는 구석도 없이 무턱대고 사지로 뛰어들 인물은 아니지요. 분명히 뭔가가 있습니다.”
이후로도 청해 분타 간부들의 설전이 이어졌다. 듣기만 하던 섭동천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자자! 다들 조용히 하라. 어쨌든 한수겸은 그 험난한 관문을 다 뚫고 이곳까지 이르렀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건 입증되었다. 각 살주들은 내당의 고수들을 산채의 수비에 총동원하도록 하라!”
이에 주변의 심복들은 일제히 입을 모았다.
“복명!”
***
섭동천은 매사에 몹시 조심스러운 자라, 언제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대비를 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간부는 아무런 불만 없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섭동천은 심복들과 함께 산채의 중앙에 설치된 북두단(北斗壇)으로 올라가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저 멀리서는 백색 경장의 청년 하나가 산채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 뒤로는 열두 개의 매복처에 있어야 할 수하들 가운데 일부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더 아래에서는 산자락을 책임진 외당의 무인들도 개미 떼처럼 우르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곳까지 당도하는 데는 까마득한 시간이 걸릴 듯했다.
“곤륜파의 마지막 전인이라…….”
섭동천은 점점 산채로 접근해 오는 뇌진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산채의 내부에서는 간부들의 통솔 하에 각 내당의 고수들이 각자의 위치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산채의 주변으로는 높은 목책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형국이었고, 목책의 앞으로는 약 이 장의 폭을 지닌 해자가 있었다.
그 구덩이 속에는 많은 숫자의 날카로운 죽창들이 하늘을 향해 직립한 상태였다.
목책 상단의 보행로 위로는 활시위에 화살을 메긴 궁수들이 나란히 포진해 있었다.
섭동천은 이렇듯 훌륭하게 구축된 산채와 자신의 휘하에 있는 수하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이 용케 이곳까지 이르기는 했지만, 만용은 명을 단축시키는 첩경일 뿐이지. 결국은 너도 거기까지다!”
5
뇌진천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눈앞에 펼쳐진 오만한 자태의 산채를 응시했다.
수천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오더라도 쉽사리 함락되지 않을 것 같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러나 일정한 경지를 넘어선 고수에게는 병력이나 탄탄하게 구축된 군사 시설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도 뇌진천은 안색 한 번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고향과도 같은 곤륜파의 본산을 완전히 제멋대로 바꾸어 놓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뇌진천이 목책으로부터 이십 장 이내의 거리로 다가서자, 무수한 화살이 그를 향하여 빗발치기 시작했다.
“이번엔 화살인가?”
뇌진천은 화살을 피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전신으로는 또다시 맹렬한 회오리의 기풍이 휘몰아쳤다.
쉬이이이잉!
애초에 뇌진천을 향해 쏘았을 수많은 화살들은, 기이하게도 다들 그의 곁을 피해 전혀 엉뚱한 곳으로 나가떨어졌다.
호신기풍의 풍압도 풍압이었으나, 비룡축전을 전개하는 뇌진천의 이동 속도가 워낙 빠르고, 몸놀림 또한 표홀하여 애초부터 제대로 겨누어 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궁수의 일반적인 연사력으로 끊임없는 뇌진천의 움직임을 따라잡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화살의 소나기를 피해 공간을 압축하듯 전방으로 전진한 뇌진천은 어느덧 목책의 요철 부위를 연속으로 내디디며 목책 위의 보행로까지 이르렀다.
이에 혈교의 궁수들은 더 이상 화살을 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뇌진천이 목책을 건너서 산채의 내부로 진입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아군들이 함께 섞여 있는 상태에서 무작정 화살을 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