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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인종 1권(8화)
3. 기군망상의 죄(3)


인종 1년 7월 18일 2번째 기사.
경상도 풍기군에 큰물이 나서 사람과 가옥이 표몰되다.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에 큰물이 져서 시내 곁에 살던 민간인 남녀 8명과 온 가옥이 모두 표몰(漂沒)되었다.
한바탕 조정에 난리를 치르고 나자 한여름인데도 궐내 에 찬바람이 불었다. 처음엔 육조대신들과 사림들이 무슨 일이라도 벌일 듯 자주 왕래하며 몰려다니며 떠들더니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명분을 중시하는 대신들이기에 적당한 명분을 찾지 못하니 더 이상 떠들기도 지친 모양이었다.
더불어 죽다 살았다며 대비나 소윤 일파는 더욱 몸을 사리는 모양새였다. 아무리 신권이내 뭐내 떠들어 봐야 왕명 하나면 죽을 자도 살아나고 죄 없는 자도 목이 달아나는 것이 조선이었다.
공식 행사장인 근정전 앞에는 영제교가 있다. 그곳을 지나면 궐의 정문사이에 너른 뜰이 있는데 인종은 지금 선공감 제조가 데려온 20여 명의 직급 낮은 하신들을 모아 놓고 시험을 보고 있었다.
시험은 두 가지로 하나는 근정전을 한 자(1자 30cm) 크기로 축소하여 만들라는 것과 나머지 한 가지는 화사 최성현이 그려 준 새와 호랑이가 들어간 민화를 목판에 새기라는 것이었다. 시험에 통과하면 직급을 올려 주고 중히 쓴다 하니 모두들 열성을 보였다.
시험에 통과하는 기준은 당연히 누가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진척을 보이며 완성도 높게 만들었느냐이다. 빨리도 만들어야 하고 완성도도 높아야 한다.
한여름인지라 뜨거운 태양 아래 모여 있지만 더운 줄 모르고 열심히 만들며 나무를 파고 있는 선공감원들이었다.
“이각(30분) 남았소! 마무리를 하시오!”
내관이 급조된 해시계를 보며 남은 시각을 알리자 선공감은들의 손길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오늘 뽑힌 자들 중 근정전모형을 만드는 이들은 한양 전도가 만들어지면 그를 보고 한양모형도를 만들게 될 것이나 그 후에는 모형 배나 건축물 등을 새롭게 만들 때 미리 모형 등을 만들어 참고할 수 있게 축소 모형물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목판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현재 언문이라고 불리는 한글 이야기 책을 목판화에 새겨 대량 출판할 계획이었다.
그것을 끝내게 되면 후일 국가에서 발행할 소식지의 그림을 판화에 새기거나 그림(만화)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때 담당할 인원들이었다. 인종은 국가를 변화시키는 최우선 과제로 양민들의 교육을 생각했다.
한데 당장 국가의 재정도 적을뿐더러 기득권층인 사대부뿐만 아니라 중인이나 양인들까지 모두 조선 시대, 그것도 신분제가 막 정착한 시기의 사람들이다.
왕 하나가 바뀐다고 절대로 세상이 바뀔 리가 없다. 그저 왕만 사라질 위험이 크다. 인종 입장에서 보면 고고조 할아버지인 세종 대왕의 치세를 생각 안 할 수 없다.
언로를 확대하고 국가의 큰 대사가 있으면 양인에 천인들의 말까지 경청했으며, 무엇보다 백성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한글을 창제했고, 조선만의 하늘을 가지게 해 준 할아버지였다.
그 세종 대왕의 업적을 참조하여 하나씩 변화를 줘 가면서 바꿔 나가야 한다. 현재 언문은 사대부의 모든 아녀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며, 대신들 또한 사용함에 무리가 없다. 생각해 보면 너무도 쉽고 편한 글이기에 중전 또한 급히 말을 받아 적거나, 가까운 친인에게 편지를 보낼 때는 한글을 사용한다.
이것을 일반 양인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사용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어린 시절 가르치는 것이 좋다. 경서를 공부하기 전에 누구나 배워야 하는 기본적인 글로 정착시킬 계획이다.
자신의 당대에는 힘들지라도 나중에 가서는 국가 공식 문자가 될 수 있게 기초는 다져 놓고 죽고 싶은 인종이었다.
“종료하시오! 시각이 다되었소!”
징이 울렸다. 시험을 마치라는 신호이다. 국왕이 직접 참관하는 시험이다 보니 여느 과시 못지않게 엄중하게 치러진 시험이었다. 일찍이 임금이 잡과를 직접 참관한 예가 있겠는가? 물론 임금이 직접 주재하였으니 이 경우는 별개의 경우가 되겠다.
시험 인원도 적어서 즉시 채점에 들어간다. 모두들 자신이 작업한 것들을 한쪽에 놓고 그 뒤에서 긴장한 채 결과를 기다린다. 인종은 하나씩 살펴보며 갑을병정 순으로 점수를 말하고 뒤따르는 승지가 이름과 점수를 적는다.
어떤 이는 근정전의 뼈대만을 만든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기와까지 만들어 올린 이도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나무를 깎아 만들었는데 매우 정교했으며 뛰어나 보였다. 역시 손재주하나는 타고난 민족이라 여겼다.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모두 완성도 높게 만들었을 것이나 그렇게 되면 채점하기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판화 역시 비슷했다. 모형을 만드는 이들보다는 빠를 것을 대비해 각기 다른 그림 4장을 걸어 놓고 새기라 했더니 어떤 이는 완성도는 높지만 달랑 한 장을 완성했고, 어떤 이는 완성도는 조금 떨어졌지만 3장 넘게 작업한 이도 있었다.
채점이 모두 끝나고 즉시 발표를 시작했다. 발표는 인종의 확인을 거쳐 승지가 했다.
“결과를 발표하겠소! 공작과 목판으로 나뉘며 각 3명씩이 선정되었소. 공작에 유인열, 한대수, 강상국이며 목판에는 권희찬, 나대만, 이진만이오. 이들은 주상 전하께서 약조하신 대로 오늘부로 종7품 직장에 명하오.”
승지의 발표가 있자 만면에 웃음을 보이는 이들부터 탄식하는 이들까지 보였다. 말이 종7품이지 중인이라 하더라도 종7품은 결코 낮은 벼슬이 아니었다. 이곳에 온 대부분의 이들이 평생 가도 오르지 못할 벼슬인 것이다.
새롭게 뽑힌 이들은 화사 최성현이 머물고 있던 중향각으로 근무지를 옮기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중향각은 수정전의 행각중 하나지만 33칸의 꽤 규모가 큰 행각이었다. 중향각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행각이나 전각들이 국가의 중대한 업무를 보거나 연구하는 곳이었다. 일명 학술동이라고 불리는 곳이 바로 수정전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중향각에 짐을 풀고 승지로부터 승급 교서를 받고 제일 먼저 한 것은 인종을 만나러 간 것이다. 강녕전에 이제 겨우 종7품 벼슬을 제수 받은 직장 6명이 잔뜩 긴장한 채로 인종에게 큰절을 올렸다.
“너희는 들어라, 너희는 공작과 영선을 하는 잡직들이었다. 허나 이제부터는 당당히 종7품 직장이 되었다. 이는 너희들의 손재주가 뛰어났기 때문이며 과인이 꼭 필요로 하는 재주를 너희가 갖추었기 때문이다. 과인은 너희들이 각별히 자부심을 가지고 왕실과 조정을 위해 충성해 주길 바란다. 너희들이 하는 일이 작아 보일지 모르나 이는 결코 작지 않은 일이다. 성심을 다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명하겠다. 공작사들은 공조에서 넘겨 주는 재료를 가지고 궁궐 축소 모형도를 만들 것이며, 그 일이 끝나면 조선에 존재하는 모든 배들의 축소 모형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목판화사로 선출된 이들은 내관이 전해 주는 그림을 그대로 목판에 새기도록 해라 이 일은 올해 안에 끝내야 한다. 알겠느냐?”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이들이 작업하는 동안 인종은 또 하나의 산을 넘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집현전이다. 세종 대왕 당대에는 국가를 반석 위로 끌어 올린 최고의 기관이었지만 그 뒤로는 유명무실해지고 사라졌다 만들어지기를 반복하다 결국 이름도 바뀌고 사라져 버렸다.
이유야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자 집현전 출신 신료들이 대부분 불복하고 단종 복위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집현전을 만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만들게 되면 분명 사림파에서는 대단히 호응이 좋을 것이다. 훈구파는 매우 반대할 공산이 컸다.
그러나 인종 입장에서는 사림파도, 훈구파도 아닌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물들을 원한다. 못해도 40여 명의 젊은 학사들을 모으려는 생각을 했다. 업무도 기존의 철학과 유교 사상을 공부하고 관련 저서를 출판하는 일이 당연히 아니었다.

인종 1년 7월 20일.
좌찬성 이언적이 언문 소학을 인출하여 경연에서 진강하게 할 것을 청하다.

이언적이 아뢰기를,
“왕세제 저하가 어리시니 급선무는 바로 보양(輔養)하는 도리인데 그 요체는 반드시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후세 사람들은 요(堯)·순(舜)의 일은 너무도 높고 멀어서 실행하기 어려운 것으로 여기지만, 진정 그 도(道)를 살펴본다면 효(孝)·제(悌) 이 두 가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능히 효제의 도를 행한다면 왕세제 저하께서도 반드시 요순과 같은 군주가 될 것인데, 효제의 도는 주 문공(朱文公)의 《소학(小學)》 한 책에 다 들어 있습니다. 중종 조 때 소학의 법도가 꼭 세상에 시행할 만하다 하여 바야흐로 번역 인출하여 여항(閭巷)의 아녀자도 누구나 해독할 수 있게 하려고 계획하다가 불행하게도 사림(士林)의 화가 참혹하게 일어나 그 일이 정지되고 말았는데, 【이는 조광조 등이 정학(正學)으로 일세(一世)를 창도하다가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게 해를 당한 것을 가리킴.】 세속에서는 《소학》을 쓸모없는 글이라 하여 폐하고 강습하지 않은 지 오랩니다. 이러니 윤상(倫常)이 무너져 자식으로서 아비를 시해하는 자가 간혹 속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위로 임금에서부터 아래로 사서(士庶)까지 실로 하루도 이 책이 없을 수 없는데, 치적을 이루고 풍속을 선하게 하는 방법은 다만 국본이 어떻게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빨리 언문으로 풀어 인출케 하여 경연에서의 진강에 일조가 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국본의 나이가 아직 15세도 차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일은 다 아뢴 대로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소학》이 어찌 잠깐 익혀서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래서 나도 이 책으로 항상 교도하려고 하니, 속히 인출하게 하라.”

참으로 이언적이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다. 경원대군이 어려 한자로만 된 책을 보고서는 소학 하나 떼기 힘드니 한글로 된 책으로 우선 외우게 하면서 그 뜻을 반복 학습시키면 빠르게 익힐 것이라며 한글로 풀이된 책으로 가르치자는 말이었다.
소학이 초반에 배우는 책이기는 하지만 사실 결코 쉬운 책은 아니었다.
천자문부터가 다 떼기가 어렵기는 하다. 단순히 암기만을 한다면 하겠지만 뜻 글자이니 그 의미와 뜻을 생각하면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어떤 이는 글자가 무슨 공부냐며 말하는 이도 있으나, 단순히 글자라고 보면 공부가 아닐 수도 있다. 소통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나 그 글에 뜻이 있고 그 뜻을 아는 것이 공부이다. 그런데 문제는 딸랑 글 몇 자 적어 놓고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깊은 뜻을 논하라거나, 심오한 철학을 풀이하라 한다면 그건 정말 억지에 가깝다.
스승이 있어 옆에서 가르쳐 준다면 모를까. 스승이 없거나 스승이 그 뜻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수수께끼를 푸는 것 같은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한글 보급이 중요하며, 한글이 더욱 뛰어난 것이다. 읽을 수만 있으면 누구나 그 의미와 뜻을 알 수 있다.
소통의 도구로서도 깊은 문학과 철학을 표현하는 방법으로써도 한글만큼 뛰어난 문자는 없다. 배우기는 또 얼마나 쉬운가.
“과인이 좌찬성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여 보니 참으로 옳다. 어린 아이들은 심오한 뜻이 담긴 경서를 읽을 수 없으며 읽는다 하더라도 그 뜻을 알고 실천하기 어렵다. 해서 과인은 좌찬성에게 명한다.”
“하명하시옵소서. 전하!”
“경을 집현전의 수장인 정1품 영전사에 봉한다. 경은 쪹경희궁에 집현전을 설치하고 그 휘하로 사관 10인 성균관 유생 10인과 6조의 당하관 1인씩을 차출하여 두고, 경서의 언문해독과 출판에 매진하라. 이는 아국 조선 만백성에게 도리와 예를 가르치기 위함이다. 또한 구전되는 전래 동화와 야사를 언문으로 취합하여 엮어서 책으로 묶고 새롭게 직장에 오른 목판화사 3인을 휘하에 붙여 줄 터이니 이 또한 출판하라.”
이에 이언적은 자신의 본래 뜻과는 다르게 일이 진행되자 몹시 당황하였으나 정1품이라는 영의정과 동급 벼슬에 집현전 수장이라는 말에 성심을 다하겠다는 말로 수락한다.
물론 이렇게 집현전이 출발하기는 했지만 당장에 재정이 어렵기 때문에 대량 출판은 어렵고 나중을 위해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 주된 업무이며 목판화사 3명 또한 인종이 시킨 일이 있으니 당장은 그 일이 우선이었다.

인종 1년 7월 25일.
첨지중추부사 채세영을 북경에 보내 천추절을 하례하다.

인종은 채세영에게 북경에 가게 되면 되도록 북경의 조정 상황과 주변 정세에 관해서 소상히 알아 오라고 시켰다. 더불어 타국에서 사신으로 오는 사람들과 되도록 친분을 쌓으라고도 명했다.
아무리 인종이 미래의 일에 대해 안다고 해도 세밀한 내용

본래 경희궁은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1616년 선조의 아들이며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새문동 집터의 사저를 증축하여 만든 궁이다.
이 경덕궁은 광해군이 건축을 시작했으나 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가 이괄의 난으로 거처하던 창경궁이 불타자 1624년부터 이곳으로 옮겨 거처했다.
인종은 집현전을 비롯해 학문을 연구하고 책을 발간하며 논하는 대학의 연구소와 같은 공간이 필요함을 느껴 후일 경덕궁이 들어서는 새문동 터에 살고 있던 왕실 인척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을 경희궁이라 이름 짓고 집현전과 장서각, 책을 만들고 관리하는 교서관(校書館)등을 이곳으로 이관시키라 명했다.
까지 알지는 못했으며 각 국가의 현시대 인물들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북경은 주변 10여 국의 국가나 부족 등에서 수시로 드나들며 통교하는 이들이 항상 있으니 그들과의 교류를 통하면 수천 리 밖의 타국 사정도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채세영에게 각별히 명한 것이다.

인종 1년 7월 26일.
전라도 흥양에서 왜인으로 오인하여 중국인들을 참획한 사건이 일어나다.

전라도 관찰사 심광언(沈光彦)의 계본(啓本)을 정원에 내리며 일렀다.
“이 계본을 보면 흥양(興陽)에서 참획(斬獲)한 것은 분명히 조난당한 중국 배의 사람들인데 매우 경악스런 일이다. 중종 대왕께서는 혹 중국인이 표류되어 오는 경우가 있으면 극진히 무휼(撫恤)하여 쇄환(刷還)시켰는데, 지금 어찌하여 이와 같이 참혹한 일이 있었단 말인가. 이런 뜻을 대신들에게 이르라.”
(그 계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달 19일 황당선(荒唐船) 3척이 대양(大洋)에서 태풍을 만나 파손, 흥양현 지경에 정박 중인 것을 현감 소연(蘇連)이 왜인(倭人)으로 오인하여 즉시 발포(鉢浦)·여도(呂島)·사도(蛇渡) 등 진(鎭)에 글을 보내어 원조를 구하고는 이어 많은 군졸을 거느리고 급히 그 장소로 달려가 결진(結陣)하였는데 결진하고 나니 발포 만호(鉢浦萬戶) 안지(安止)가 도착하였다 합니다. 그러자 이른바 그 왜인들은 군사를 동원하여 체포하려는 상황을 보고는 모두 육지로 올라가 도망하였는데, 혹 산에 올라 피하려는 자도 있었답니다. 소연과 안지가 일시에 이들을 덮쳐 공격하여 91급(級)을 참획하였고 사도 권관(蛇渡權管) 오세웅(吳世雄)과 여도 만호 풍계정(馮繼渟)도 이로 인해 특별히 제진(諸鎭)의 적로(賊路) 중 의심 가는 곳을 수토(搜討)하여 추격한바 전후 참획한 것이 모두 1백 8급이라고 합니다. 좌도 수군절도사(佐道水軍節度使) 김세간(金世幹)이 흥양의 첩보(牒報)에 따라 21일 새벽에 달려가서 친히 살펴보니 모발이나 형체가 왜적과는 아주 다른 중국인이었다고 합니다.”)

인종은 이날 강녕전으로 돌아와 한참을 웃었다. 생각해 보면 딱한 일이고, 죄 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었으니 대신들에게야 참혹한 일이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마디 했지만, 지난봄에 중국 사신이 왔다 가면서 오는 길 가는 길에 하도 난리를 펴서 짜증이 많이 나 있던 참이었다.
조선에서 나지도 않는 수달피인지 뭔지를 바치라고 생떼를 쓰고 갔기 때문이다. 속으로야 고놈 잘했다고 상찬하고 벼슬이라도 올려 주고 싶었으나, 겉으로는 차마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