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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인종 1권(9화)
3. 기군망상의 죄(4)


인종 1년 7월 26일.
우참찬 신광한이 일본과 강화하는 일에 대해 아뢰다.

우참찬 신광한(申光漢)이 아뢰기를,
“신이 오랫동안 풍습(風濕)을 앓던 중 거듭 대휼(大恤))을 당하여 병든 몸을 이끌고 직무에 분주하였던 바 부증(浮證)이 더욱 심해져서 정사(呈辭)하기에 이르렀는데 성자(聖慈)께서 휴식하면서 조리할 것을 윤허하셨으니, 은혜를 받기가 황송스러워 실로 미안할 뿐입니다. 신은 나라에 관계되는 바가 중대한 일이 있는 것을 보고도 마침 병중에 있기 때문에 직접 계달하지는 못하였으나 또한 끝내 침묵할 수도 없습니다. 지난날 사량(蛇梁)의 변이 있자 대마도(對馬島)와 절교할 것을 의논할 적에 조정의 논의가 귀일되지 않아 절교해서는 안 된다는 자도 많았습니다만, 중종 대왕께서는 결단코 그들이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국위를 보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마도가 거절당한 이래 자못 조심할 줄을 알아 해변 어민에게까지도 감히 표략(剽掠)한 적이 없었으니, 그들이 죄를 두려워하고 자신(自新)하려는 형적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도주(島主)의 위엄과 은덕이 저 간사하고 외람된 왜적으로 하여금 우리 변방에 악행을 하지 못하게 한 것이겠습니까. 다만 한 섬의 이익이 오로지 강화(講和)에 있으며, 사람마다 스스로 보존하려면 화친하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이 곤궁과 기아를 참으면서 사악과 간특함을 억제해 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액운이 극도에 달하여 큰 상화(喪禍)가 겹침에 따라 사무가 번다하여 백성들이 그 허다한 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니, 흔단이 생긴 것을 다행으로 여겨 상중에 있는 나라를 치려는 간사한 자들이 이를 빙자, 그 흉악함을 부리지 않을 줄을 어찌 알겠습니까. 비록 여기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만일 구적(寇賊)이 기아와 곤궁에 시달린다면 변방 인민을 살해하는 경우가 반드시 없으리라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일이 여기에 이른다면 조처하기가 몹시 어렵습니다. 당초 절교를 논의할 때도 영구히 절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반드시 우리를 침범하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악독함을 믿는 심리를 징계하여 그 오만한 마음을 꺾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들도 또한 우리가 필시 오랫동안 절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헤아리고 감히 와서 범하지 않은 것이었으니, 사세로 볼 때 끝내 강화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반역을 저지른 뒤에 강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강화를 애걸할 때 타이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의 의사도 어찌 화친을 허락하고 싶겠습니까. 마땅히 예조에 계하(啓下)하신 내용대로 일본(日本) 및 대마도에 ‘절교한 이후로 약간 조심할 줄 알아서 해변 어민들까지도 살해함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도 죄를 두려워하여 자신(自新)하는 것임을 알았다. 그대들이 성심으로 덕을 닦아 오랫동안 변치 않는다면 어찌 영원히 끊겠느냐?’고 답하고, 또 온 사자(使者)에게도 이러한 내용으로 타일러서 그들의 경망 조급한 마음에 제동을 걸어 더욱 힘쓰게 한다면, 이는 행할 만한 계책인 것입니다. 또 도주가 적 왜를 방치한 채 금지시키지 않고, 항상 ‘그대 나라라고 어찌 구도(寇盜)가 없겠는가? 우리는 알 바 아니다.’ 하였습니다. 지금 왜구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비록 도주의 위엄이나 금령의 소치는 아니라 하더라도 국가에서 강화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를 도주의 공이라 하면서 이것으로 강화를 허락하는 한 단서로 삼으소서. 그렇게 하면 후일 강화한 뒤에도 두려워하여 금할 줄 알아서 갑자기 침범하지는 않을 것이고 혹 변경을 침범해 노략질을 할 때 이것을 가지고 죄를 돌리게 되면 저들은 스스로 해명할 길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잘못은 항상 저들에게 있고 정당함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게 될 것이니, 저들이 이 회답을 받으면 반드시 먼저 우려를 품고 조정의 처치가 알맞게 되었음을 더욱 두려워할 것입니다. 지난날 우의정 성세창(成世昌)이 비록 외방에서 종사하면서도 이를 잊지 않고 부중(府中)에 치서(馳書)한 바가 있고 모든 관료들도 기필코 강화를 허락하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아무런 의견 없이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이 일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니, 널리 조정의 논의를 수렴하여 사기(事機)를 잃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정원에 전교하기를,
“지금 신광한이 도이(島夷―섬나라 오랑캐)에 대한 처치 사항에 대해 제시한 것을 보니, 원려(遠慮)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이 뜻을 대신 및 병조와 비변사에 이르라.”
하였다.

이 문제는 사실 작년인 중종 39년(1544년)에 왜구 무리가 배 20여 척을 이끌고 사량진에 들어와 사람과 말을 약탈해 가서 터진 사량진 왜변 사건으로 이 사건이 터지자 그동안 크고 작은 왜구들 때문에 골치를 앓던 중종이 아예 왜와 모든 관계를 단절시켜 버린 사건으로 따지고 보면 당연히 단절해야 하고 단절을 넘어서 왜구 토벌을 명해야 했다.
그런데 그럴 만한 여력이 안 되었는지 그 뒤따르는 후속 조치가 더 이상 없었다. 그런데 일본과 조선의 중간에서 무역으로 먹고사는 대마도가 문제가 됐다.
그들은 오로지 중계무역으로 먹고살았는데 조선에서 일방적으로 모든 관계를 엄금해 버리니 인종이 생각해도 죽을 맛일 것이다.
해서 인종이 신광한의 말을 듣고 생각하기에는 아마도 신광한에게 뇌물을 몰래 바쳤던지 아니라면 신광한이 정말 미래를 생각해 대마도가 왜구 소굴이 되기 전에 그만 용서하고 왜구소굴로 변하지 않게 다독거리자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대마도와의 무역을 다시 열어 주라는 말이었다.
인종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쉽게 허해 주면 만만하게 볼 것이고, 그렇다고 마냥 통교를 안 할 수도 없었다.
사실 2년 후인 1547년에 몇 가지 조건부로 다시 무역을 허가해 주기는 한다. 인종 입장에서는 그때까지 버티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사이에 수군도 더 방비하고 내다 팔 만한 물건도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우선 대신들에게 논의해 보라하고 결정을 미뤘다.
그런데 그날부터 며칠간 줄기차게 이곳저곳에서 상소가 올라온다. 왜적들을 저리 방치하면 필시 사단이 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나름 논리 정연한 의견도 있고 나름대로의 식견을 가지고 우선 풀어 주어 다독이고 방비하여 다시 준동할 시에는 따끔하게 혼내 주어야 한다는 상소도 있었다.
그런데 하나같이 상소를 올리는 대신이나 학자들의 왜를 바라보는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물론 왜가 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이 아니고 각 지역마다 나뉘어 있고 딱히 대표라고 내세울 만한 세력이 없기 때문일는지는 몰라도, 그들을 너무 낮추어 본다는 것이다. 심하게는 좀 큰 무리의 도적 떼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물론 조정 대신들도 일본의 정치 체제나 권력 현황에 대해 나름 알고 있다. 당시 대마도뿐만 아니라 일본 각 지역의 영주나 지역의 세력 분포까지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문제라면 이런 왜의 세력들을 모두 떼를 지어 도둑질이나 하는 무리로 보았다는 것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지만 여하튼 그들을 하나의 외교상대로 취급하지는 않은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사라진 후진적 봉건제국가인 왜가 그리 강력하거나 많은 인구수를 가졌을 것이라 생각지도 않았고 또한 그들이 통일하여 하나로 뭉칠 가능성은 전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는 결정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고려 시대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 때문이었다.



4. 선남후북벌(先南後北伐)을 준비하다(1)


인종 1년 7월 28일 새벽 강녕전 인종의 침소.
한여름 밤의 비가 시원스럽게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밤은 숙면을 취하기 좋으나 인종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자려고 누우면 반 시진도 못 되어 잠이 깨곤 했다. 그러기를 3번이나 반복한 인종은 결국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지필묵을 손수 준비하여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다 그린 인종은 그림의 상단에 일본 여도라 적었다. 그러고는 아침이 되서 내관이 침소에 들어올 때까지 지도를 보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선남후북벌이 맞겠지?”
일본을 먼저 정리하고 북으로 진출해야 함을 뜻했다. 인종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왜를 단속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조만간 1550년이 되면 명은 경술의 변이라고 하는 사건을 맞게 된다.
몽골이 재통일을 하며 알탄 칸이 끊임없이 명나라를 치는 시기가 이때다. 거기다 조선도 그랬지만 명나라도 왜구들이 끊임없이 남쪽 해안가를 괴롭히던 시기이다 그래서 명 조정에서는 북로남왜라는 말이 자주 거론되는 시기이다.
그런데 이시기를 지나고 나면 바로 누르하치가 금나라를 만들고 후에 이것이 청나라가 되어 중원을 차지한다. 더구나 왜는 통일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한다.
머리가 복잡하다. 47년 후면 임진왜란이다. 아니 그전에 왜의 통일을 막아야 한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의 고민을 거듭한다. 인종은 한참 동안 지도를 보다가 결정한 듯 규수에 작은 표시를 한다. 아홉 영주가 다스린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전하 기침하셨나이까?”
“들라.”
인종의 명이 떨어지자 궁인들이 세숫물을 들고 들어왔다. 세수를 끝내고 인종이 상선에게 하문했다.
“전일 당직 근무자가 누구냐?”
“내금위종사관 남치근이옵니다.”
잠시 그가 누구인지 생각하다. 다시 명령을 했다.
“너는 밖에 나아가 남치근에게 아침을 같이하자 이르라.”
“네, 전하!”
상선이 나가자 투박하지만 정감 어린 표정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와 부복하여 예를 올렸다.
“전하! 찾아계시옵니까.”
“그래, 조식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세.”
조식을 신하들과 할 때에는 주로 아침 경연을 끝내고난 뒤이거나 당상관이나 당하관의 젊은 신료들과 특별한 날에 주로 했다. 무신들과 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그러나 아침을 함께 먹게 된 남치근에게 기쁘거나 황송한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남치근 장군은 후일 임꺽정을 잡는 공을 세우는 사람으로 내금위에 소속되어 있으나 미련스러운 지방관아나 병사들이 몇 번이고 임꺽정을 놓치거나 당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임금을 지켜야 하는 남치근을 토포사(討捕使) 삼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명불허전이라고 내금위장까지 지낸 그는 무리 없이 임꺽정 일당을 잡아들이고 그 패거리를 와해시킨다. 물론 결정적인 이유가 임꺽정의 모사인 서임의 배신 때문이었지만 지략도 군을 통솔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아니겠는가.
여하튼 소소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아침 수라를 기다리던 인종과 남치근에게 드디어 거하게 차려진 아침 밥상이 들어왔다. 평소 대신들과 식사를 하지 않을 때는 3첩 반상으로 소소하게 먹었지만 같이 먹는 신하가 있으니 나름 수라간 상궁이 신경 쓴 것 같았다. 못해도 7첩 반상은 되는 듯했다.
조식을 다 먹고 상을 물린 뒤 찻잔을 놓고 내금위장 남치근을 바라보자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하명을 기다렸다.
아침부터 임금이 거하게 한상 차려 준 것은 그만한 일을 시키려는 뜻일 것이기에 남치근도 단단히 놀랄 준비를 했다.
“왜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저 봉투에 들어 있는 몇 장의 서류만을 넘겨주었다. 남치근은 이 정도 일이니 아침부터 밥을 먹자고 했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듣는 귀가 많으니 더 이상의 말은 삼가는 두 사람이었다.

강녕전을 나온 남치근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무도 없는 숙직실에 들러 인종이 내려 준 비망기(備忘記―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문서) 펼쳐 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남치근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죽다 살아난 임금이라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밥 한상 받은 것 치고는 너무 부려먹는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서류에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대마도로 건너가 기회를 봐서 일본의 규슈 지방으로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필요한 정보와 행동 지침과 권한에 대해 적혀 있었는데 차마 다 읽지 못했다. 도적 떼 소굴로 들어갔다 오라는 말이니 분통이 터질 만도 했다.
“에이! 젠장! 딱 죽기 알맞은 임무구먼…….”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푸념을 한 남치근은 밤새 당직을 서며 잠을 잤음에도 하품을 크게 하고는 급히 비망기를 품 안에 챙기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부터는 절충장군이라는 문서에 적힌 마지막 말을 봤다면 조금은 위안이 되었겠지만 그저 앞일을 생각하니 막막한 남치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