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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인종 1권(10화)
4. 선남후북벌(先南後北伐)을 준비하다(2)


인종 1년 7월 28일 첫 번째 기사.
전라도 흥양현에서 횡액을 당한 중국인을 위해 제사를 지내게 하다.

좌의정 유관과 우찬성 권벌이 아뢰기를,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에서 잡아 참획한 사람들은 모두 폭풍을 만나 파선한 중국인이었는데도 자세히 살피지 않은 채 함부로 살육한 것이니, 매우 경악스런 일입니다. 옛날에도 한 사람이 원한을 품으면 6월에도 서리가 내리고 3년 동안 큰 가뭄이 있기도 했는데, 더구나 지금 죄 없이 억울하게 횡액을 당한 자가 1백여 명에 이르고 있으니, 어찌 원혼이 되지 않겠습니까. 말이 이에 이르니 더욱 참혹하기만 합니다. 속히 본도에 하서하여 일일이 거두어 묻어 주게 하시고, 인하여 죄 없이 억울하게 횡액을 당했다는 뜻으로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 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금년의 수재·한재는 전라도가 제일 심하였는데, 또 중국인들이 억울하게 도륙된 변이 이같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내가 심히 괴롭다. 아뢴 바가 지당하니 속히 시행하라.”
속으로는 뭐가 예뻐서 상을 치러 주나 했지만 좌의정의 말대로 그냥 모른 척하기에는 찜찜했기에 인종은 이를 허해 주었다.
죽어 저승에서 수없이 많은 망자들을 대해 보았던 인종이었다. 그들이 비록 중국인이라고 해도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는 해 주고 싶었다. 알고 보면 그들도 불쌍한 인생이니 말이다.

사정전에서 아침나절 집무를 끝내고 오후에는 왕가의 행사로 강녕전에 들자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죽었다 살아난 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가친척의 문안을 받기 위함이었다.
인종은 형제들을 끔찍이도 아꼈다. 형제가 많기도 했지만 자기 수명 다 채우지 못하고 요절한 형제들이 유독 많아서 더 애지중지하는지도 몰랐다.
하나 있던 누나가 병으로 저세상으로 떠나고 2년 뒤에 경빈 박씨가 쫓겨나면서 그의 아들 복성군이 같이 사사되고 다시 2년이 지나자 5살 어린 인순 공주가 병으로 죽었다.
그렇게 끝나나 했더니 3년 뒤에 효순 공주마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형제들이 모이자 문뜩 그때의 고통스럽던 시기가 떠올라 괴로웠다.
아버지인 중종은 정말로 자식 복이 많았다. 9남 11녀를 생전에 두었는데 자식 사랑이 끔찍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 많은 자식들을 낳기 위해 부인도 많이 얻었다는 것이다. 물론 반정으로 왕위를 찬탈했으니 그 반정 공신들이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딸들을 들여보내 정략혼을 시킨 탓도 있다. 또 어느 한쪽으로 힘이 기울어지지 않게 하려 고루고루 성은을 내려 주다 보니 자식들이 많아지기도 한 것이다.
문제는 그 내부에 있었다. 후일 여인천하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그 시대는 끔찍한 시기였다.
결국 최후의 승자는 문정왕후 윤씨가 되었지만 이제는 결과가 달라질 것 같다. 원 역사대로라면 을사사화의 여파로 2년 뒤에 봉성군 마저 죽게 되는데, 저번 윤원로의 일로 대신들이 무더기로 쫓겨났고, 인종의 빠른 건강 회복덕분에 대비 윤씨나 훈구대신들이 숨죽이고 있는 상황인지라. 앞날은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안으로 들자 군과 공주, 옹주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다. 그들을 보면서 어쩌면 그 자식 복 많은 아버지는 살아생전 심히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형제인 인종 자신도 먼저 떠나간 형제들이 애처롭고 안쓰러운데 아버지인 중종은 오죽했으랴.
그것도 신하들과 처첩들 간의 권력투쟁에 자식이 희생되었으니 말이다.
“전하의 강녕하신 모습을 뵈오니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사옵니다. 열성조의 가호이며, 조선의 홍복이옵나이다.”
“허허, 그래그래 어서들 좌정들 하십시다.”
인사를 받고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인종 입장에서는 무려 50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지만 이들은 마치 며칠 만에 다시 만난 듯 그 모습 그대로였다.
“대비마마는 뵈었는가?”
“문후 여쭙고 오는 길이옵니다.”
먼저 들려 인사하고 온 모양이다. 개중에 맏이 노릇을 하는 해안군 희였다. 인종보다 4살 많은 형이었다. 듣고 있던 혜순 옹주가 말을 꺼냈다. 그녀는 서녀이지만 중종의 딸들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다.
“그보다, 전하 옥체는 진정 강건하신 겝니까?”
“내 몸은 이제 회복이 다 되어 강건하니 정사를 돌보는 큰 무리가 없습니다. 그보다 옹주께서도 강건하시지요?”
혜순 옹주는 경빈 박씨의 소생으로 경빈 박씨와 함께 유배를 갔다가 3년 뒤에 신원이 복귀되었다. 억울하게 어머니와 오라비가 죽어서인지 심병을 얻어 몸이 많이 안 좋았었다. 인종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을 저주했다는 누명으로(작서의 변) 작은어머니격인 경빈 박씨와 큰형인 복성 군이 죽게 되고 누나까지 서인으로 신분이 낮춰져 유배 생활을 해야 했으니 지은 죄는 없지만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는데, 한쪽에서 말없이 부모뻘 되는 형님들과 누님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경원대군이었다.
경원대군은 형제 중에 제일 막내다. 바로 위의 형인 덕흥군(덕흥 대원군)하고도 4살 차이가 난다. 덕흥 군은 훗날 선조의 아버지로 덕흥 대원군이 되는 사람이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눈치 빠른 봉성군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 왕세제 저하께서는 요즘 어찌 지내십니까? 궐로 들어온 뒤로 통 본 적이 없어 매우 궁금했습니다.”
“소제는 요사이 소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짧게 대답하는 경원대군이었다. 눈을 돌려 살짝 인종을 살펴보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이제 추석이 끝나면 왕세제로서 국본에 오르실 터이니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 됩니다.”
낮추어 말하라는 것이지만 경원대군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임금인 인종도 해안군이나 금원군, 혜순 옹주에게 존대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 책봉식을 치르지도 않았기에 더더욱 이 자리가 불편했다.
그 모습을 보다가 인종이 한마디를 한다.
“왕세제에 책봉되더라도 공석과 사석을 구분하여 분별 있게 칭하면 된다. 사적으로는 윗사람이니 존대를 하는 것이 맞다. 하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국가의 위계에 관한 것이니 그에 따라 하면 될 것이다.”
“네, 전하.”
이 말은 곧 계속 존대하라는 말이었다. 왕의 형제들은 벼슬길에 나올 일이 없다. 그러니 공적인 자리에서 볼 일도 없는 것이다.
물론 적서 구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인종에게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물론 어미가 천인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엄연히 이곳에 모여 있는 왕자들과 옹주들의 어미들은 모두 사대부가의 그것도 공신들의 여식들이다.
“그래, 봉성군은 요사이 뭘 하며 지내누?”
한참 나이인 봉성군이었다. 18살이면 혈기가 왕성할 나이이고 왕족이라 벼슬길도 나아갈 일이 없으니 공부에 매진할 리도 없다. 너무 똑똑해 보여도 안 되는 것이 방계 왕족의 비애였다.
“사냥도 하옵고 가끔 덕양군 형님과 낚시도 가옵니다.”
“오호! 그래? 언제 날을 잡아 사냥을 한 번 나가야 할 듯싶구나, 요사이 밀린 업무로 매우 갑갑증이 나던 참이니…… 그나저나 그리 허송세월하는 것이 못내 안타깝구나, 내 방도를 찾아볼 터이니 호랑이 사냥 한 번 안 해 볼 터이냐?”
평생 사냥 한 번 안 해 본 인종의 입에서 사냥 이야기가 나왔다. 그것도 호랑이 사냥이란다.
“호랑이 말이옵니까?”
“그래그래. 호랑이 말이다.”
인종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도통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아직 나이 어리고 혈기왕성하니 호승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저 말이 진짜로 호랑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무엇인가를 이루게 해 주겠다는 말인지, 또는 누군가를 쳐내라는 명령인지 말이다.
“전하께옵서 기회만 주신다면 성심을 다해 해 보이겠나이다.”
“그래그래, 내 조만간 연통을 넣어 주마.”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눈빛만은 애처롭게 보이는 인종이었다. 봉성군이 바로 을사사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인종이 죽고 대윤이 다음 대통으로 세우려 하는 것이 봉성군이라는 고변에 이리저리 유배지를 전전하다 2년 뒤에 사사되는 것이다. 그의 나이 20살 때이고 자식도 없이 쓸쓸하게 사라지는 것이 봉성군이다. 생각하면 자신의 죽음 하나로 너무도 많은 이들이 억울하게 피를 흘린다.

형제들을 모두 보내고 인종은 곰곰이 조정을 일신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중에 첫째는 업무 방식의 전환이었다.
임금이야 상시대기며 언제나 비상근무 체제라고 하더라도 대신들에 하급 관료들까지 일 년에 10여 일 정해진 국경일을 제외하고는 상시 대기 체제다.
아무리 지금 시대가 급하게 일처리를 하지 않고 정해진 일의 반복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너무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열심히 집중해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어 줘야 한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대로는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될 것 같아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한다.
“한 달에 6일, 일 년 72일로 휴일을 못 박고 달력을 만들어 배포하여 특별한 일이 없으면 정해진 날짜에는 무조건 휴일로 정하고 유동성 있게 활용할 수 있는 휴일도 주고…….”
인종은 화선지를 넓게 펴 놓고 세필로 달력을 그려 놓고 하나씩 확인하며 앞뒤로 계산하여 새로운 달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달력은 8일 근무 2일 휴일이라는 원칙을 세워 놓고 만들었는데 한 달에 6일 휴무를 지킬 수 있도록 날짜를 조정했다.
1월 같은 경우는 설날과 대보름이 있으니 12월 말일에 3일 1월 초에 3일을 붙여 6일을 쉬게 하고 대보름에 하루 휴무와 월말에 2일 휴무를 주는 방식이다.
또 2월에는 1월말에 2틀을 쉬니 2월 9, 10일 휴무와 19, 20일을 휴무로 하고 27, 28일을 쉬는 방식이다.
그런데 2월엔 인종의 생일이 있다. 인종의 생일은 2월 25일로 그날은 국왕 탄신일이기에 모든 백성이 쉰다. 해서 25일 쉬고 뒤에서 하루 당겨와 28일 하루만 쉰다.
이런 식으로 한 달에 6일 일 년에 72일을 모두 쉬게 만들 참이었다.
그러나 이 휴일은 공식적인 것이고 조정의 일이나 국방에 관련된 군관들은 휴일을 그대로 따를 수 없다.
해서 날짜에 맞게 유동성 있게 조정하여 쉴 수 있도록 각 기관의 장에게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줄 것이다. 물론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꼭 쉴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더불어 세종 대왕 시절 실시했던 관노비의 출산휴가 제도나 부모상 등의 특별한 경우에는 넉넉하게 그 휴일을 잡아 업무 때문에 자식 노릇, 남편 노릇 못하는 일은 없도록 조처할 생각이다.
“이거… 대신들이 뭐라 할지 모르겠네.”
막상 달력을 만들고 그 외 유급 내지 무급 휴가에 관한 규정을 작성해 놓고 보니 대신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휴일이 수십 일이나 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종의 생각은 이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더불어 대신들도 제발 10일에 2틀은 안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하는 앵무새 같은 대신들 때문에 인종 또한 했던 대답을 계속하여 반복해야 하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인종 1년 8월 3일 첫 번째 기사.
사간 박광우가 과거에 논박을 받았던 일을 들어 체직을 청하나 불윤하다.

사간 박광우(朴光佑)가 아뢰기를,
“소신은 전에 집의(執義)로 있을 때 안일하여 직책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논박을 받고 체직되었었는데 지금 다시 언관이 되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정사를 새롭게 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처음에 결코 중한 자리를 다시 욕되게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신이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동료들과 대행 대왕의 장례 기일 당긴 일을 의논하여 아뢰었고, 간원이 즉시 논계하지 않은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주장하는 의논이 각각 다르니 더욱 서로 용납할 수 없습니다. 신의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찌 일시적인 논박으로 체직되었다고 다시 언관이 될 수 없겠는가. 간원이 즉시 장례 일을 아뢰지 못한 것 역시 모두 당시 의견이 같지 않아서인데 과연 무슨 용납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박광우가 재차 아뢰기를,
“전일 신을 논박한 관원이 아직도 본원에 있으니 반드시 용납되지 못할 것입니다. 더구나 의논이 다른 데이겠습니까. 반복해서 생각해도 끝내 직에 나갈 수가 없으니 속히 체직을 명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사간을 체직시켜야겠다. 좌상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피혐(避嫌)한다고 해서 대간의 체직을 명하는 일은 옛날부터 유례가 없던 일이라 보고 듣기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단지 사간이 피혐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좌상에게 의논함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좌상 유관 등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박광우가 피혐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듯합니다. 어찌 일시적인 일 때문에 서로 용납하지 못할 수 있겠습니까. 직에 나아가도록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피혐하지 말도록 사간에게 말하라.”
하였다.

인종은 사간 박광우와 좌상 유관을 내보내고는 짜증이 밀려옴을 느꼈다. 지들끼리 말싸움하다가 토라져서는 그것을 핑계로 보직을 옮겨 달라는 것이다. 나이를 한두 살 먹은 것도 아닌데 직장에서 서로 사이가 안 좋다고 그것을 임금에게 들고 달려오는 것이나 또한 마땅히 들어줘야 하는 인종 입장이나 답답하기만 했다. 그런 문제는 직속 상사와 의논하거나 둘이 술 한 잔하고 풀면 될 것을 꽁하게 마음에 품고 보직 변경 신청까지 하는 모습이 영 미덥지가 못했다.
저런 인사는 나중에 큰일이 닥치면 견디고 이겨낼 생각은 안 하고 도망부터 칠 위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더 두고 봐서 자꾸 땡강 부리고 못 해먹겠다고 또 찾아오면 파직시켜야겠다고 생각하는 인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