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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인종 1권(16화)
7. 산업 기술 개발의 기초를 다지다(1)
인종 1년 8월 20일 3번째 기사.
상께서 군기시에서 올린 자전차를 타시었다.
상께서 군기시에서 올린 자전차를 타시었는데 자전차는 종류가 셋이었다. 하나는 앞뒤로 바퀴가 달린 것으로 중심을 잡고 발판을 돌리면 힘을 들이지 않고도 빠른 속도로 이동이 가능했다.
다른 하나는 두 사람을 태우고 갈 수 있는 것으로 바퀴가 셋이었다. 앞에 앉은 이가 발판을 구르며 방향을 잡으면 앞으로 나아가는 기물로써, 말보다는 느리나 따로 유지비가 들지 않는 훌륭한 인력 마차가 되었다.
마지막 하나는 인력 마차와 같으나 사람을 태우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짐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인력 화물 마차였다.
군기시에서 빠르게 작업이 진행되었는지 어설프지만 그려 준 대로 따라 해서 자전거 3대를 만들어 왔다.
개선해야 할 것이 눈에 보이기도 했지만 처음 만든 것 치고는 잘했기에 담당한 장인들을 승급시켜 군기시 옆에 자전차 공방을 설치하라 명하고 화물용 자전차를 한 달에 최소 5대씩 만들도록 명했다.
일일이 손으로 만들어야 하기에 각 부품 별로 장인을 두어 생산하게 했으며 나중에 이를 하나로 조립하는 방식을 취하게 했다.
인종 1년 8월 20일 4번째 기사.
표류해 온 중국인에게 역청과 총통의 제작을 전수하게 하다.
검상(檢詳) 민기(閔箕)가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제주(濟州)에 표류해 온 중국 사람들 가운데 역청(瀝靑) 만드는 법을 아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통사(通事)가 비록 그 대강을 전습(傳習)했다고는 하지만 전수받은 걸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수한다면 정밀하지 못할 듯싶습니다. 또 역청에는 동유(桐油)가 들어간다고 하는데 동유가 마침 좌상 이기의 집에 있으니, 전습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중국인 가운데 또 총통(銃筒)을 만들 줄 아는 자가 있어 통사가 역시 그 대강을 전습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시(箭矢)가 아닌 철환(鐵丸)인 만큼 해사(該司)의 장인(匠人)들로 하여금 전습하게 하소서. 또 이런 일들을 아는 중국인은 마땅히 가장 늦은 편에 들여보내야 합니다.【중국인을 세 편으로 나누어 들여보낼 예정이었다.】그 동안에 전습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경연에 대한 일은 내일 주강 후에 정지하고, 역청과 총통 등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아랫사람들이 전습하는 사이에 다른 일을 보느라 마음을 다하여 하지 못할 것이니, 그들을 잘하고 잘못함에 따라 상벌을 주는 것이 옳을 듯하다.”
하였다.
역청은 쓰임이 많으니 그 기술이 조선의 장인보다 뛰어나다면 쓸모가 많을 것이다. 한데 총통은 중국 장인이 더 뛰어난 총통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우선 그의 기술을 옆에서 보고 견습해서 우리와 다른 점이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이미 세종 때 세총통까지 만들어 실전에 배치하였는데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총통을 주조할 청동이나 철의 수급이 어렵다는 것에 있었다.
이시기에는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다양한 화약 무기를 보유한 것이 조선이다. 천지현황의 총통에 세총통, 질려포통에 신기전을 보유한 조선이었지만 이것을 유지, 보수하고 늘려가야 하는데 그럴 만한 재력도 재료도 매우 부족했다.
오죽하면 대신들이 바다에서 왜구들을 확실하게 제압하는데 화포만한 것이 없으니 화포를 더 주조해야 한다며 폐 종을 녹여서 화포를 만들도록 윤허해 달라고 주청을 올릴 정도였다.
하나 원 역사에서 중종이나 인종, 명종까지도 그것을 허하지 않았다. 인종 또한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는 만큼 각별히 신경을 쓰긴 할 것이다.
하나 그전에 그런 문제가 벌어지는 이유가 철과 동이 귀하기에 벌어지고 운영할 여력이 안 되니 손을 못 댐을 잘 안다. 우선 재정을 늘리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세종 대왕 때에 만들어진 총통위를 부활시켜야 한다.”
사실 세종 때에 이미 포병 부대라고 할 수 있는 총통위가 만들어져 운영되었다. 한데 문종을 지나 단종이 끌려 내려오며 세조가 자리를 차지하더니 총통위를 해체해 버렸다.
많은 신하들이 총통위의 해체를 반대했다. 재정 지출이 많이 들어가서 해체해야 한다면 부대를 축소해서라도 운영해야 한다고 간했지만 세조는 그런 대신들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버지인 세종의 선정으로 나라가 평화 시기에 접어드니 화포의 중요성을 망각한 결과였다.
그 뒤로 왜구와 야인들의 약탈에 백성들이 신음해도 그들을 제압할 확실한 무력이 없는 조선은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무려 그 시간이 100년이었다.
“형님이 왜 연락이 없지? 저수지 만드는 것에 시간이 많이 드나?”
모든 것이 돈이다. 재정만 확보할 수 있다면 대신들 또한 총통위 부활을 기꺼워할 것이다. 왜구를 제압하고 야인들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화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궐 안에 위치한 혹은 궐 밖에 위치한 국가의 기관들이 모두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하게 그것은 인종이 실시하겠다고 공표한 경장 때문이었다.
그 시행은 명년 1월부터였지만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문조와 의조가 새로 생기게 되고 의법부와 국무총리에 국방총리까지 새롭게 조정되고 소속이 바뀌는 기관이 많았다.
특히 예조는 기존에 자신들 예하에 있던 아문들이 분리되어 문조나 의조로 나가기 때문에 새로운 명령 체계와 각 기관간의 소통 문제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조선은 내년이 되면 국왕 밑으로 국무총리와 수상, 국방총리가 권력을 나눠가지게 된다. 그중에서도 국방총리의 신설을 매우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었다. 국방과 행정을 완전히 분리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앞으로는 타 대신들이 군에 대하여 전혀 손을 쓸 수 없도록 격리시켰고 타 행정 부서와 국방부의 직을 겸임할 수 없게 규정을 바꾸었다.
더불어 금군을 확대하여 병조 밑에 있던 세자익위사나 세손위종사를 금군 밑으로 넣어 규모를 키웠고 국방부는 오로지 외부로부터의 국가방위 역할만을 하도록 점차 제도가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대신들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하였다. 말이 이동이고 조정이었지 완전히 새로 판을 짜는 수준이었다.
더불어 이번 경장의 가장 큰 핵심 중에 하나가 체아직의 축소였다. 체아직이란 하나의 직을 여럿이 돌아가며 수행하는 것이다. 즉 편제상에는 하나밖에 없는 자리를 서너 명이 일정시간 동안 돌아가며 근무하고 급여도 자신이 근무한 일수만큼만 받아 가는 것이다.
이것은 자리에 비해 직이 부족한 이유와 재정 부족 등이 그 이유였다. 이런 체아직의 축소는 의법부의 신설과 예조의 분리에 맞춰 일정 부분 축소되었다. 덕분에 행정기관은 늘어났지만 관원이 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의 초점은 1446년 1월에 맞춰져 있었다. 앞으로 4개월 남짓의 시간 동안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한다. 더불어 조만간 9월 10일이 되면 전국의 양반가의 가주들이 다 모일 것이다. 그일 또한 미리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인종 1년 8월 23일 첫 번째 기사.
경회루에 나가 친강하여 사학의 유생을 시험하다.
상이 경회루에 나아가 친강(親講)하여 사학(四學)의 유생(儒生)들을 시험하였다.
날씨도 좋고 하여 사학의 학동들을 모아 놓고 경연을 열었다. 사학이란 성균관 부속 초등학교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나라에서 운영하는 것이며 한양에 4곳이 운영되는데 10세 전후하여 입학하고 15, 16세쯤 되어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다 싶으면 나라에서 실시하는 과시에 응시 자격을 준다. 받아들이는 신분은 양반의 적통뿐만 아니라 서얼이나 양민도 받아 주는데 그 능력이 뛰어나면 임금이 직접 시험을 봐서 유생들을 가르치는 훈도로 삼기도 하고 벼슬자리를 주기도 한다.
현재 인종이 집권한 시기는 조선으로서는 초반이기에 양반의 숫자가 많지도 않고 양민이 벼슬길에 오르는 경우도 간혹 있던 터라 서얼이나 양민이라고 해도 능력만 되면 중히 쓰이는 시대였다.
물론 그렇다고 신분제도가 정착이 안 되거나 쉽게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라에서 꼭 필요하다고 하면 호인이라고 불리는 여진족까지도 무반 벼슬을 내려 양반으로 대우를 해 주던 시기이다.
“그때 상옥이 제자에게 한 말은 이렇다. ‘상인의 도란 돈을 많이 벌어 이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데 그 도가 있다. 장사를 하는 이유는 오직 사람을 얻기 위함이다.’ 또한 그가 죽어 가며 남긴 마지막 말이 있는데 그것은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를 일컬어 고금의 많은 이들은 상인의 길을 통하여 도를 이루었으니 진정 성인이다며 그를 추켜세웠다. 공부란 한가지만이 정도라 할 수 없고 세상의 진실을 알아가는 것 모두가 공부인 것이다. 하니 정승이라고 해서 귀한 것이 아니고 상인이라고 해서 천한 것이 아니다. 각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인애하며 나라와 부모 군주를 위해 바른길을 걷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어떤 길을 가든 그 행함이 바르게 서야 비로소 그가 선비이며 양반인 것이다.”
인종은 어린 학동들에게 조선 중후기에 활약하는 상인 임상옥의 일대기를 각색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들은 느끼는 것이 있는지 인종의 입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임상옥이 만든 말은 아니며 논어의 이인편에 나오는 말이었다.
그 구절은 ‘사람이 이익대로 한다면 원망이 많다. 이익이란 결국 나 자신을 위하는 것이니 필히 상대방에게 손해를 주는 결과가 된다. 그래서 이익을 쫓으면 원망을 부르기 쉬우니 결국 의를 따라야 한다.’ 따라서 ‘군자가 밝히는 것은 의로운 일이요, 소인이 밝히는 것은 이익인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이런 철학 때문에 이익만을 쫓는 상인들이 천하게 여기는 풍조가 생긴 것이다. 하나 인종은 같은 말도 다르게 해석했다.
즉 천하게 여기는 상인이라도 행동하기에 따라서 타고난 신분을 떠나 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마지막으로 학동들에게 질문을 허용했다. 학동 하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했다.
“하오시면 신분의 귀천에 상관없이 능력이 출중하고 뛰어난 자라면 전하께옵서는 중히 쓰시는 것이옵니까?”
“물론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나는 것은 분명 복이며 부모의 은덕이다. 하나 그것만을 가지고 그를 중히 쓸 수는 없다. 하여 나라에서 과시를 보는 것 아니더냐? 과시란 그 능력의 상하를 가리고자함이다. 능력이 출중하나 신분의 벽 때문에 비록 잡직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 그 능력은 필히 빛을 발할 것이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게 될 것이다. 세종 대왕마마 시절에 장영실이 그 본이 아니겠느냐?”
“하오나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신분이 낮으면 기회를 얻기 너무도 어렵사옵니다.”
“맞다! 그것은 아국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가 그렇다. 하나 신분이 천하다 하여 일찍이 포기한다면 그는 딱 그 정도까지밖에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군왕이란 모든 백성의 어버이이니 능력이 출중한 자가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한다. 또한 항시 관심을 가지고 뛰어난 신하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군왕의 본분이니라.”
급진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인종의 말에 머리가 제법 굵은 아이들은 놀랍다는 표정이었고 어떤 아이들은 냉소를 흘리기도 했다.
세상이 그렇게 정의롭기만 하고 임금의 생각처럼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아이들부터 서얼이나 양민들은 참석이 불허됐다. 모두 양반가의 적자들만 온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항을 인종이 모를 리는 없다. 조선이란 나라의 임금은 정치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다. 그가 곳 정치이고 그가 곳 국가인 것이다. 그의 말은 이제 그런 나라를 만들어 간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