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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인종 1권(18화)
7. 산업 기술 개발의 기초를 다지다(3)


자전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강녕전으로 들어오자 도승지 이명규가 장계를 가지고 다가왔다. 올라온 장계를 보니 짜증이 밀려오는 인종이었다.
“아니 이 문제가 언제 적 문제인데 아직도 해결을 못 본 것인가?”
그것은 전라도와 제주도 등지에 난파되어 들어온 명나라 사람들의 일이었다. 물경 600명이 넘어가는 인원이니 먹는 것도 많아서 해당 관청이 식량이 부족하다며 빨리 조치를 취해달라는 이야기였다. 전날 분명 배로 실어다 주고 온다고 한 것 같은데 여전히 실행을 안 한 것 같았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오?”
“전하, 그것은 아마도 명으로 배를 띄울 만한 여건이 되지 못하여 벌어진 것 같사옵니다. 배를 띄우려면 못해도 대맹선 서너 척은 동원해야 하옵고, 중맹선으로 치자면 몇 배는 더 늘어나야 하는데 그만한 배를 구하기가 쉽지 않고 만약 배를 징발하여 보낸다 해도 그사이 왜구라도 들이치면 큰 낭패를 보니 전라 좌수사나 우수사도 쉬이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듯 보이옵니다.”
도승지의 이야기를 듣고 해결 방안을 고민하던 인종은 문뜩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들은 분명 죄인이렷다?”
“그렇사옵니다. 밀무역을 하였으니 명으로 간다면 극형을 면키 어려울 것이옵니다.”
“그렇지 하여 조정에서도 그들을 명의 해안가에 버려 두고 오자는 말을 했던 것이 아닌가. 하나 이들이 지난 7월부터 아국에 있었으니 그동안 먹어치운 식량이 상당할 터이다. 허면 들어간 곡식 값은 받아 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오시면?”
“진산에 구리 광산이 있다고 하였지?”
“그렇사옵니다.”
“인부가 부족할 것이야. 그렇지 않나?”
“그것이……?”
인종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도승지에게 장계에 대한 비답을 작성하라 하였다. 모두 광산으로 보내 일을 시킬 생각인 것이다.

인종 1년 9월 4일.

인종이 중전과 귀인 정씨 등과 함께 중궁전에서 다과를 들고 있었다. 다과를 들며 두 여인의 대화를 듣고 있는데 대화의 주제는 화장품이었다.
“일전에 사가에 다녀오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한데 사가에 다녀오면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귀인 정씨의 말에 중전이 반문을 했다.
“네, 사가에서 부리는 계집종 하나가 박색이어서 스물다섯이 넘었는데도 혼처가 나지 않아 어머님께서 분이라도 사서 바르라며 재물을 좀 준 모양입니다. 한데 이 계집종이 어디서 구했는지 분을 바르고 얼굴이 더 흉측해졌습니다. 하여 노상 개울가에 앉아 얼굴을 보며 한숨을 짓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이런, 어쩌다 그런 일이! 그 분이라는 것을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그런 일이 생겼누?”
“관아에 사실을 알려 만든 이를 찾았사온데 그 분에 납[鉛]을 넣어 만들었다 합니다. 해서 그 장사치는 포청에 잡혀 들어갔사옵니다.”
이 시대에 화장품은 쌀을 주로 하여 여러 곡식을 갈아서 일정 비율로 섞어서 만드는 것과 분꽃의 열매를 곱게 갈아 만드는 분을 사용했다. 그런데 이런 분이 피부에 잘 흡착해야 하는데 그렇질 못했다 해서 거기에 납을 섞게 되는데 그 부작용이 심각했다.
얼굴이 푸르스름해지면서 땀구멍이 커지는 것이다. 납 중독이었다. 인종은 호조에 명해서 납 가루를 절대로 분을 만드는 것에 첨가하지 못하도록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두 여인이 화장품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자 인종은 중궁전을 둘러보았다. 이 시대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중전의 물품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중전이라고 하지만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이 정해진 것만을 사용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통 공예인 자개로 만든 장이 서너 가지 있고 중전이 심심할 때 보는 책이 서너 권 있으며 작은 동경(銅鏡)이 있었다. 장식장에 도자기 몇 점과 촛대 정도였다.
인종은 문뜩 궁금증이 일어 동경을 들어 얼굴을 비춰 보았다. 비록 열심히 닦아 반질거리기는 했지만 얼굴이 맑고 세밀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인종은 동경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유리를 만들 생각을 못한 것이다. 유리가 조선에 아예 없는 것도 아니며 만들려고 한다면 못 만들 것도 없다.
이미 유리는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유리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보석 중 하나로 인식되어진다. 물론 잘 깨지는 성질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며 매우 가격이 높은 사치품이기도 하다. 자연에서 만들어진 유리가 흑요석이다.
한데 얼마 전에 인종은 천일염을 만들지 않았던가. 천일염을 만들면서 그것을 이용하여 소다회(탄산나트륨)를 만들고 다시 그것을 이용하여 비누, 세제, 비료 등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는가.
한데 소다회는 유리의 재료 중 가장 중요한 재료였다. 소다회만 있다면 모래와 석회, 붕사 등을 일정 비율로 섞어 1,500도의 열을 가하면 유리가 만들어진다. 물론 재료는 차고 넘친다. 소다회만 만들 수 있다면 말이다.
소다회는 1790년에 프랑스의 르블랑이라는 사람이 발명한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물론 그 후에 더 좋은 솔베이법이 나오지만 현재의 조선에서는 그것까지는 무리였다.
어쩌면 소금보다도 더 큰 이득을 주는 상품을 만들어 낼지도 몰랐다. 유리는 그 활용도가 정말 무궁무진하다.
거울부터 창문, 찻잔, 장식품, 노리개, 안경, 천리경 등 무엇보다 여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각종 장신구로 유리는 안성맞춤이었다.
이를 발전시키고 개발한다면 무궁무진하게 발전가능성이 있으며 조선을 반석 위에 올려놓을 일등 공신이었다.
‘당장에 장인이 없으니 그와 비슷한 일을 하는 대장장이와 도공을 차출하여 유리 공방을 만들어야겠구나. 하면 해안군 형님에게 소다회 만드는 법을 전해 주어 극비로 강화에서만 만들게 하고 김포에 유리 공방을 만들어 생산하게하며 차즘 비누와 세제, 비료까지 그곳에서 생산케 하여 거대한 국영공단을 만들어야겠다. 아무래도 한곳에 집중하면 관리하기도편하고 지켜내기도 편하겠지’
인종은 차츰 발전시켜 나갈 방향을 잡으며 생각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뜩 눈앞에 무엇인가가 아른거리자 정신이 돌아온 인종이었다.
“전하! 또 부처가 되시었사옵니까?”
“허험, 아니 생각을 좀 하였소.”
“혹시 대화에 끼어 주지 않아 뿔이 나신 것이옵니까아아?”
귀인 정씨가 귀여운 표정으로 삐졌냐고 되묻자 인종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허, 참 사내가 그럴 일이 있겠소.”
“허면 신첩 부탁이 있사옵니다아아.”
일부러 그러는지 뒷말을 느리며 귀여운 척을 더하는 귀인 정씨였다. 서너 달 전까지만 해도 그러지 않았는데 요 근래 들어 더욱 애교가 늘어가는 귀인이었다.
한 번 지아비를 잃어 보니 그 소중함이 더욱 간절하였는지 최대한 인종에게 예쁜 짓을 하리라 다짐한 듯했다.
“무엇이오?”
“그 자전차 말이옵니다. 저도 한 대 가질 수 없사옵니까?”
“자전차를 타겠단 말이오?”
인종은 놀란 눈으로 귀인 정씨를 바라보았다. 아녀자가 자전차를 타기에는 모양새가 좋지 못했다. 그러다 양반들에게 팔려고 만든 자전차도 있음을 떠올리고 그것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허면 귀인이 탈 수 있게 더욱 신경 써서 만들어 달라고 해 보겠소.”
“아니, 아니, 그것이 아니옵고 두 발 달린 것이 필요하옵니다.”
“두 발 달린 것이라? 설마 그것을 타겠다는 것은 아니지요?”
“네, 신첩이 아니옵고 실은 사가에 있는 철이를 줄까 합니다.”
인종은 왜 귀인 정씨가 두 발 달린 자전차를 원하는지 그제야 이해를 했다. 귀인 정씨에게는 이제 8살 된 남동생이 있었다. 그가 바로 송강 정철이었다.
“그러고 보니 철이가 올해 8살이지요? 그 나이면 그런 탈 것에 관심이 가지요. 한데 철이가 언제 그것을 본 적이 있소?”
“실은 사가에 나갔다가 저와 함께 그것을 보았사옵니다. 쌀을 싣고 가는 것을 보았사온데 매우 관심을 보여 제가 전하께 주청 드려 보기로 약속했나이다.”
몇 대 만들지도 않았고 더욱이 두 발 달린 자전차는 겨우 3대를 만들어 2틀 전에 쌀 한 가마씩을 싣고 시험 운행을 하고는 내수사에서 쓰도록 명한 적이 있었다. 내수사는 궁궐 내에 들어가는 포목이나 곡식, 잡화 등을 담당하는 곳이니 그 쓰임새가 많았다. 물론 길이 잘 정비된 도성 안에서 사용하는 것이니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알았소. 하면 군기시에 말해 작은 것으로 하나 만들어 보라 이르겠소. 아직 8살이니 지금 만드는 것은 사용치 못할 것이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아아!”
중전은 일부러 더 아양을 떨며 귀여운 척을 하는 귀인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귀인이 어찌하여 저리 변했는지 짐작하기 때문이다.



8. 양반회합(1)


인종 1년 9월 10일.
제1차 국정보고대회가 열리다.

한양이 온통 양반들로 꽉 들어찼다. 10여만 정도가 살고 있는 한양에 물경 2만에 가까운 양반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왔으니 마치 과시라는 보는 것처럼 간만에 한양 거리가 활기에 넘쳤다.
사실 예상은 2만 명 정도로 했는데 그 숫자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어떤 이들은 3만이 넘어간다고도 하고 4만 가까이 된다고도 한다. 너무도 많은 숫자라 모두 궁 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 1차적으로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 4조목에 대한 답신을 서면 제출하도록 했다.
그리고 각 지역별 양반으로 100여 명씩 명망 있고 그중에서도 나이가 어느 정도 된 사람들을 간추려 국왕과 직접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뽑힌 사람들은 전전대 연산군 시절부터 현재까지 나라에서 치르는 과시에 합격 횟수가 많거나 벼슬에 나아갔다가 낙향한 사람들, 또한 제자들을 잘 키워 벼슬길에 내보낸 사림의 선비들을 대상으로 했다.
그렇게 해도 물경 1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인종은 이에 덧붙여 경복궁 담에 국왕과 선비들 간의 대화를 요약하여 받아 적은 내용을 시간대 별로 요약하여 붙이도록 했다. 찾아왔던 양반들이 그냥 돌아가게 할 수는 없기에 무슨 대화를 했고 결정된 사항은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함이다.
더불어 한 시진에 한 번씩 약 2각씩 쉬는 시간을 주어 따라온 제자나 일문의 사람들과 의논할 시간도 주었다.
이런 내용은 미리 경복궁 정문에 붙여 놓았고 이조가 빠르게 선발 작업을 하여 9일 오후가 되자 대화에 참여할 인원들도 결정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4조목의 내용이었지만 그 외에도 인종이 양반들과 합의 볼 내용을 많았다.
우선 법전의 개정과 양인 확보 계획, 부국강병책, 명과의 사대 문제, 상공업 발전 계획, 지주와 소작인에 대한 문제, 과시의 정례화 문제, 사학과 향교 문제 등등 대화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이 많았다.

드디어 국가를 이끌어 가는 두 주체가 한 자리에 마주앉게 되었다. 물경 2만에서 3만에 이르는 양반들과 조선이라는 나라의 주인이며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인종이었다.
내금위시위들로 부족해 세제익위사에 사헌부, 의금부, 포도청까지 총출동하여 궐을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고 임금인 인종은 미리 만들어 둔 근정전 뜰 앞의 단상에 올랐다.
단상에 인종이 오르자 단상 옆에 마련된 징을 내시가 힘껏 내리쳤다. 인종이 용상에 앉자 자리에서 일어나 서 있던 양반들이 하나같이 큰절을 올리며 천세를 불렀다.
“주상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누가 뭐라 해도 지금 시대는 왕조시대이며 왕은 신과 동급이다. 인사를 받은 인종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한껏 키운 목소리로 인사에 답을 하였다.
“과인의 부름에 불원천리 달려와 준 경들의 노고를 치하하노라. 오늘 이자리가 아국 조선을 반석으로 올리는 시발점이 될 것이며 부국강병의 초석이 될 것이다. 자 이제 과인이 답을 구하고자하는 4조목 중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1. 아 조선국이 건국한 지 어언 150여 년이 지났으나 건국 당시의 기상과 포부는 오간데 없고 남으로는 왜구와 북으로는 야인들의 위협에 백성들이 신음하니 통탄할지어다. 위로는 금상과 아래로는 의정부, 육조판서들이 밤으로 낮으로 논하고 따져 보아도 그 해결책이 요원하니 조선의 식자이며 장자인 선비들을 한데 모아 논하고자 한다.

명주 천에 쓴 1조목의 내용이 대나무장대에 걸려 있다. 내관이 장대를 높이 쳐들었다. 인종이 장대를 보며 다시 하문을 했다.
“아국은 고려를 이어 조선을 건국한 지 어언 150여 년이 지났다. 고려 때는 원나라에 사대했으며, 아국 조선이 되어서는 명에 사대하며 유교를 국시로 삼아 여기까지 왔다. 150여 년 전 태조 대왕께서 조선을 건국할 당시에는 아국에 20만 정병이 있었고 태종 대왕이 살아 계실 때는 대마도를 정벌했으며, 세종 대왕 때는 북방의 4군 6진을 개척하는 큰 대업을 이루었다. 하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북으로 호인(만주인)들과 남으로 왜구의 침략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명의 사신이 한 번 다녀가면 그 길에 살고 있는 백성들은 허리가 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경들 중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가지고 있는 자 있는가?”
인종이 먼저 말을 하자 미리 순서를 정해 답하기로 했던 노인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인은 전주의 최 모라고 하옵니다. 주상 전하의 성은으로 죽기 전 궐에서 전하의 하문에 답하게 되어 삼생의 영광이옵나이다. 전하의 하문에 답하자오면, 이 모든 문제의 근본은 양반이 바로서지 못해서이옵니다. 본시 양반이란 문반과 무반을 가리켜 만들어진 말이옵니다. 하나 세종 대왕마마 시절을 지나면서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시고 북방으로 땅을 넓히니 그에 대한 경계심으로 무반를 천시하고 문반을 추켜세우니 나라의 군사력이 떨어지고, 강병이었던 아국 조선의 병사들이 약졸이 되었나이다. 하여 지금처럼 문반이 무관의 수장자리에 앉는 제도를 고쳐야 할 줄 아룁니다. 허고, 차제에 양민을 확보할 방안을 논하여 군을 재정비해야 될 줄로 아옵니다.”
한 사람이 대답이 끝나자 바로 다음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주 사는 김 모라고 하옵니다. 이는 분명 양반의 잘못이 있사오나 그것은 군의 문제는 아니온 줄로 아뢰옵니다. 양반이 유학의 도리를 다하지 못함이 문제를 만든 원흉인 줄로 아뢰옵니다. 양반이 자신들의 잇속만 차리려 하고 어리석은 양민들을 가르치고 교화하지 않아서 이리된 것이지 무반을 천시해서는 아닌 줄로 아뢰옵니다. 수장이란 물론 경험과 지도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 문반이 수장이 된다고 하여 그 일을 행하지 못할 까닭도 없사옵니다. 책 안에 그 방법이 다 나와 있는데 공부를 게을리 하고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옵니다. 하니 더욱 향교와 사학에 지원을 하여 공부케 하옵고 성현의 도리를 널리 알리게 하심이 오른 줄 아뢰옵나이다.”
“청주에 사는 한 모라고 하옵니다. 주상 전하께옵서는 아국이 건국한 지 150여 년이 지나 남으로는 왜구에 북방으로는 호인들의 침략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하오나 남쪽의 왜구는 식량이 없어 오는 것이며, 북방의 호인들은 저희들끼리 싸우다 살기 위해 넘어 오는 것 아니옵니까? 아국이 건국하고 태평성대이옵니다. 굶는 자가 줄었으며, 땅이 넓어졌사옵니다. 더구나 왜구는 도적 떼이고 호인들 또한 강도 무리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치려고 하면 얼마든지 칠 수 있는 적들이옵나이다. 올해는 주상 전하의 혜안으로 용양위를 북방으로 보내 약탈에 대비케 하였으니 더 이상 호인들이 내려올 수 없을 것이며 남방의 왜구는 무역을 일절 금했으니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을 것이옵니다. 하니 그들이 사죄하며 잘못을 반성한다면 무역을 허하여 주시옵소서. 하면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옵니다. 무릇 군자는 용서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법이옵니다. 용서로써 큰 은혜를 베푸시면 저들은 더 이상 노략질을 일삼지 않고 아국의 덕에 감명하여 바른 길로 나설 것이옵니다.”
인종은 한모의 대답에 짜증이 났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경청해 주었다.
“함경도에서 올라온 심 모라 하옵니다. 주상 전하, 올해 용양위를 북방을 경계하기 위에 파병한 일은 함경도 백성이 모두가 바라마지 않던 일이옵니다. 소식을 듣고 함경도 전 백성들이 길거리로 나와 주상 전하 천세를 외쳤나이다. 남방의 왜구에 대하여서는 잘 모르오나 이들은 배로 이동한다 하오니 수군을 확충하는 것이 제일일 것이라 사료되옵나이다. 허고 북방의 도적 떼들은 토병을 징집하여 징치하심이 가한 줄 아뢰옵니다.”
인종은 함경도 출신 양반의 대답이 끝나자 손을 들어 자신이 말할 것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