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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인종 1권(19화)
8. 양반회합(2)


“병력을 늘려 막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 국가의 재정이 허락지 않음이다. 또한 군비를 책임질 양인들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으니 이 문제는 어찌해야 하는가?”
“광주 사는 박 모라 하옵니다. 전하의 옥음을 경청할 수 있어 광영이옵니다. 전하, 무릇 사람은 두 다리로 서옵고 국가는 문반과 무반 두 개의 다리가 서로 조화를 이뤄 이끌어 나가는 것이옵니다. 하오니 문반의 무반직에 실직하심은 거두어 주시고 왜구와 북방 오랑캐는 병력의 증원이나 재정을 많이 들이지 않고도 해결이 가능하옵니다. 지난날 세종 대왕께옵서는 4군 6진과 대마도를 정벌하실 때 화포의 운영으로 큰 득을 본 전례가 있사옵니다. 고려조 때도 최무선이 화포를 전함에 장착하여 왜구를 물리쳤사옵니다. 이는 화포가 그만큼 전장에서 큰 힘이 된다는 반증이옵나이다. 하니 염초 생산을 독려하고 화포의 주조와 개발에 공을 들이신다면, 아국의 군이 더욱 강병이 될 것이옵니다. 일부 양반들은 덕이 있고 성현을 말씀을 잘 따른다면 도적 떼가 이를 알고 감히 범접치 못할 것이라 하나, 이는 정말 현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의 말들이옵니다. 왜구와 호인들이 아국을 침탈하는 것은 그들이 죽음을 면키 위해서 이옵니다.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양반은 3일도 굶어 보지 못한 자이옵니다. 사람이란 하루를 굶으면 참을 수 있나이다. 2틀을 굶어도 배운 바를 지키려 노력한다면 망극한 일을 저지르지 않사옵니다. 하나 3일을 굶게 되면 동기간도 몰라보며, 도덕을 신경 쓸 여력이 없사옵니다. 죽지 않기 위해 도적이 되고 살인자가 되는 것이 사람인 것이옵니다. 하여 세종 대왕마마께옵서도 말씀하시기를 쌀이 곧 하늘이라 이는 무릇 굶지 않아야 도덕도 윤리도 지킬 수 있다는 것이옵니다. 한데 그런 자들을 상대로 윤리와 도덕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옵니다. 이는 아국 백성이 후일에도 끊임없이 고통을 감수해야 하니 강병을 육성하시옵소서. 하여 그들로 하여금 아국을 범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함을 알게 해 주어야 하옵니다.”
“천안 사는 유 모라 하옵니다. 일전에 전라도 땅에 중국인 상인들이 풍랑으로 난파되어 들어왔다 들었사옵니다. 그들은 국가에서 금한 무역을 하기 위해 배를 타고 왜로 향하다 난파되어 아국으로 들어왔다 들었사옵니다. 또한 남방의 유구국과 대마도 왜인들도 배를 타고 무역을 하여 부를 쌓고 있나이다. 한데 아국 조선은 일절 무역을 금하여 물산의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사옵니다. 대저 상업이란 많이 생산한 것을 가져가 모자란 것과 바꾸는 것으로 잘만 활용한다면 아국 백성에 매우 이득이 되는 것이옵니다. 무조건 안 된다 할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은 무역을 통해 활용한다면 나라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허고 이는 왜구의 준동을 막을 수 있는 방편도 되옵니다. 북방의 야인들도 그들에게 많이 나는 가축과 약초, 피륙 등을 아국의 쌀, 종이, 면포, 소금 등과 바꿔 준다면 침략할 이유가 없는 것이옵니다. 이는 전화를 막고 아국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는 좋은 수이옵니다. 명국이 사 무역을 금한다고 하나, 그것은 명국의 경우이지 아국이 그것을 따라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명국은 땅이 크고 사람이 많아 자체적으로 해결이 되나 아국은 그렇지 못합니다. 또한 사대한다고 하나 아국과 명은 근본이 다르옵니다. 사는 곳이 다르며 물산이 다른데 무조건 명국의 법을 적용하여 시행할 이유가 없사옵니다. 만약 명국이 이를 제재하려 한다면 아국의 상황을 설명하여 양해를 구하면 될 것이옵니다. 아무리 명에 사대한다고 하나 아국 백성이 중하지 명국법이 중한 것이 아니옵니다. 가납하여 주시옵소서.”
인종은 자신이 원하던 답이 나오기 시작하자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상황은 명에 사대는 하나 엄연히 근본이 다른 나라로 인식하는 조선 초였다.
아직 임진란을 겪지 않는 시점이었고 조선이 건국하고 명에 사대하기로 한 것도 당장에 힘이 없어서였지 명에 목을 매는 상황도 아니며 그들을 대단하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 그저 대국이고 조선보다 큰 나라인지라 따르는 것뿐이다.
더 큰 이득이 있다면 언제라도 명과 척을 질 수도 있는 것이 조선의 입장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도 후일 임진왜란을 겪으며 바뀌어 가다가 결국 청이 들어서면서 고착화되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명에 목을 매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사신들이 오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오히려 반감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도 많았다. 하니 이런 발언은 조금 과격하기는 하나 충분히 납득하는 상황이었다.
이후로도 많은 답이 나왔고 간혹 가다 인종이 답에 대해 반문을 하곤 하였다. 이런 토론은 각 지역에 사는 양반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알게 해 주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만을 생각하던 입장에서 국가 전체의 입장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변화를 주고 있었다.

2번째 조목은 관리의 부정부패를 고하라는 것이다. 때문에 궐 문 앞에 마련된 의금부의 관원에게 상세하게 적은 내용을 접수하는 것으로 끝났고 3번째 조목은 양반들대부분이 만장일치로 양인이라 하더라도 향교와 사학에서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다 하여 이것을 거부하는 자는 마땅히 벌을 받는 것이 옳다라며 지지하여 넘어가게 되었다.
더불어 사학과 향교를 더욱 지원하여 줄 것을 간하였는데 이는 국가의 재정이 허락지 않으니 차차 늘려 가기로 했다.
물론 인종 입장에서는 교육 방식이나 운영 방식을 지금과는 다르게 바꿀 계획이었다. 문제가 있지만 조선 후기처럼 타락하지 않았기에 차차 운영 방식과 교육 내용을 바꿔 나가면 탈이 없을 것이라 여긴 것이다.
이제 1조목과 함께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4조목에 관한 내용이었다. 무려 4시진 동안 이루어진 토론이 이제 마지막 조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동안 승정원 관리들이 바쁘게 임금과 양반들과의 대화를 받아 적어 궐 문 양쪽에 마련된 담에 시간별로 하나씩 붙이면서 궐 밖에서도 국왕과 양반들 간의 대화 내용을 보고 각자의 생각을 말하며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제 1조목의 대저 신분이란 그 사람의 행실로 결정되는 것인데, 고로 직첩(職牒)이 있다 하여 양반이 아니며 양반이란 그 행실이 바르고 덕이 있으며, 학식이 있어야 하고 성현의 말씀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행하여야 한다.
하나 작금에 이르러 양반이란 대지주이며, 직첩을 가지고 그 위세를 믿고 백성 위에 군림하려만 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폐단을 바로세울 방안을 논하라는 국왕의 말은 바꿔 말하면 양반 사회를 재정비하겠다는 것이다.
즉 양반이라고 다 같은 양반이 아니고 일정이상의 자격을 갖추어야 양반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이었고 조선에서 특권층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는 양반들 스스로 논하여 심하면 수족을 잘라내라는 말이었다. 직첩을 받고도 양반취급 못 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개성 사는 박 모라 하옵니다. 양반이 된 경위는 여럿이라 첫째로 나라의 큰 공을 세운 자들이나 그 후손이온데 이런 자들을 대우하는 것은 당연하옵니다. 하나 시간이 흘러 그 정신은 오간데 없고 그저 특권만을 누리려 함이니 이 또한 큰 문제이옵니다. 두 번째로 아국 조선의 당하관 이상의 벼슬을 하면 양반으로 인정하는데, 이 또한 문제이옵니다. 양반의 자식이라고 하여 나라를 위해 어떠한 일도 하지 않았는데 그를 양반으로 받드는 것도 문제이옵니다. 차제에 양반 법을 제정하시어 엄격히 그 신분을 가려 국가에 공이 있는 자로 하여금 봉작의 위를 내리심이 가한 줄 아뢰옵니다.”
양반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때 부터였다. 양반은 문무 관직을 지내거나 지낼 수 있는 신분을 지칭한다. 하나 그 성립이 꼭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가족들도 양반으로 불렸으며, 박모가 말한 것처럼 나라에 공을 세운 자들이 양반이 된 것도 아니었다.
지방 호족이나 지주가 중앙에 진출하여 4품 이상의 벼슬을 하면 대부라 하였고 4품 이하는 사라 하였다. 이를 합쳐 사대부라 불렀고 이들이 양반이 되었다. 귀족이라는 특권계층이 왕조시대이기에 없을 수는 없다. 왕 자체가 그런 특권계층의 정점에 있기 때문이다.
양반들 또한 웬만해서는 양반층이 더 늘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경쟁자가 늘어날 뿐 자신들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이들은 결혼을 해도 양반층과만 했고 자식에게 재산을 증여할 때도 양반의 신분을 유지하게 하도록 아들에게 그것도 장자에게 물려주려 했다.
여말선초까지만 해도 재산은 남녀 구분 없이 모두에게 골고루 증여했으며 제사도 출가한 딸이 올리는 등 조선 중기와는 사뭇 다른 모양새였다.
본격적으로 양반이라는 특권층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은 16세기를 지나 17세기가 되어야 완성된다. 현재의 조선은 일종의 과도기적인 상황이었다.
하여 인종은 양반 중 아주 적은 인원만을 남겨 두고 대부분의 양반들을 중인으로 낮추려는 계획을 했다. 또한 중인과 양인들의 관직 진출을 인위적으로 막는 것을 금하여 조선의 신분층을 마름모꼴로 만들려는 생각을 했다. 중인과 양인을 가장 많은 계층으로 하고 직업으로 천인을 나누는 것이 아닌 그에 합당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여 한시적으로 천인을 만들도록 할 생각이었다.
이런 발상을 하게 된 근거에는 어차피 자신의 대에서는 힘들지 모르나 다음다음 대쯤에는 산업화의 발달과 근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천인과 양인, 중인들의 신분 차는 없어질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산업화가 된다고 해도 귀족은 남아 있을 것이라 인종도 생각했다. 먼 미래의 세상을 보더라도 특권계층은 살아남기 때문이다.
유럽의 몇몇 나라는 민주주의가 도입되어 신분 차별이 없어지더라도 귀족과 왕족이 살아남고 중산층과 하층민이 엄연히 존재하게 되며 아시아는 여전히 신분 차별이 지속되며, 왕족과 귀족들이 여전히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하층민을 최대한 상위 단계로 어떻게 끌어올리느냐가 관건인 것이다.
“허면 그 공은 어떤 기준으로 나눌 것이며, 이를 증명할 방법은 무엇인가? 또한 그것을 자식에게 상속하는 것은 어찌 봐야 할 것인가?”
인종이 다시 되물었다.
“평양의 김 모이옵니다. 국가가 위난에 휩싸였을 때 앞에 나선 자, 학문적 업적을 크게 이룬 자 등의 기준을 마련하여 봉작하시면 될 줄로 아뢰옵니다. 하옵고 작금의 조선도 아비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 하여 그자식이 그것을 물려받지는 않사옵니다.”
“하나 봉작하라 하는 것은 그에게 봉토를 내리라는 말과 같다. 아비가 죽으면 그 땅을 다시 나라에서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하오시면 봉토를 내리시지 말고 그에 상응하는 징표와 당대에 한하여 세를 감하여 주는 등의 면책특권, 일정량의 하사금을 내리시는 것은 어떻사옵니까?”
“참으로 옳은 방법이나 이는 과인이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닐 듯하다. 하여 이 문제는 앞으로 새로 만들어질 의법부에서 다시 논의하여 결정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매우 전향적인 태도로 자신들의 권한과 세력을 줄이는 것에 나서는 양반들이었다. 물론 이런 대화가 가능한 이유는 인종이 4조목을 내걸 때부터 예상되었다.
본시 100년 전까지만 해도 지방 호족으로 당당하게 같이 상류층에 속했던 사람들이 중앙으로 진출하여 한쪽은 사대부가 되었고 남아 있는 한쪽은 향리가 되거나 중인이 된 것이다. 출발은 같은데 신분이 갈려 차이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현상은 지속되고 있다. 특정 양반 계급은 지속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가고 지방 양반들은 그 영향력과 지위가 떨어지고 있었다.
한두 대만 더 내려가면 그들의 후손들도 중인이 될 것이 명확했다. 중앙에 힘을 쓸 수 없는 지방의 양반들은 차라리 그럴 바엔 모두가 공감할 만한 몇몇을 대 귀족으로 인정해 주고 나머지는 모두 공평하게 중인 신분이 되자는 생각이었다.
이런 논의는 사림 세력에 의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반대하는 쪽은 기득권에 가까운 훈구 세력들이었다.
그러나 훈구 세력들은 이 대화에 거의 참여하지를 못했다. 해서 지방에서 올라온 양반들과 사림 세력에 속하는 양반들은 목소리를 키울 수 있었다.
인종이 내세운 조목만을 보자면 그렇게 모두가 중인 신분으로 내려앉게 되면 오히려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수월해 보였다.
또한 양반이라서 하지 못하는 직업의 진출도 가능해 보였다.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은 예조에 속한 사역원이나 호조에 속한 몇몇 자리는 중인들이 하는 일이지만 매우 벌이가 좋았다.
더불어 이번에 새로 만들어지는 문조나 의조에도 그런 자리가 생각보다 많았다. 차라리 양반이라는 허울을 털어내 버리면 기회가 더 많아질 것 같았다.
“오늘의 대화는 여기서 마쳐야 할듯하다. 당초 예상은 오늘 하루만으로 대화를 끝내려 했으나 아직 논하지 못한 많은 사안이 있는 관계로 하루 더 연장하여 논할 것이다. 하니 모두 돌아가 의견을 수렴하고 생각을 정리하여 내일 다시 이 자리에 모이도록 하라!”
인종의 말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는 양반들이었다. 인종은 자신이 계속 있으면 저들이 자리를 뜰 수 없으니 먼저 내관들과 함께 강녕전으로 돌아 들어갔다.
양반들은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 대화 내용을 경청하며 대화에 참여도 했기에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하나같이 모두 국왕을 알현하고 국가 대사를 논하였다는 자부심에 눈에는 빛이 났다. 이런 작은일 하나에도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인종이 다시없을 성군이 될 것이라 칭찬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역대 왕 중에 백성과 직접 대화를 하여 국가정책을 결정한 사람은 세종 대왕 빼고는 전무했다. 세종 대왕 때를 생각해 보면 얼마나 태평성대였는가. 왜구를 징치하고 야인들을 물리친 왕이며 기술과 문학이 최고 정점으로 발전하여 다시없을 성군으로 칭송받았던 분이다.
이런 세종 대왕의 모습을 인종에게서 보았으니 아무리 이기적인 것이 사람 마음이라고 해도 인종을 높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