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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안전보장 사무소 1(20화)
8. 비밀을 지켜드립니다(1)


이시이 시로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실험해 온 원령들이 모두 성불도 하지 못한 채 사라졌지만 아쉬운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눈빛은 반짝였다.
그는 의사로서의 호기심이 발동한다.
덩치 큰 사내는 참으로 흥미로웠다. 보통의 사람들은 저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포기한다.
앞뒤가 꽉 막힌 상태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데 혼란스럽지 않은 자들은 없었다.
대부분은 삶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며 ‘여보, 아이들을 부탁하오.’ 나 ‘부모님. 죄송합니다. 불효자식 먼저 갑니다.’ 따위의 쓸모라고는 조금도 없는 말들을 지껄였다.
하지만 덩치 큰 사내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절대로 포기하는 일이 없었다.
지독한 투쟁 본능이다.
신의 영적 능력을 받아들여 각성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인간 자체가 위험 분자였다.
그자의 뇌를 해부해 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리고 방금 전에 나타났던 술법사도 흥미로웠다.
한국의 주술사는 대부분이 대일본제국시대에 사라졌다. 지금 남아 있는 자들은 사기꾼이 많았다.
하지만 소년의 주술은 진짜였다.
근근이 이어오고 있는 조선의 술법을 이은 자가 분명했다. 일본은 술법과 분신술, 은폐술이 발달되어 있었다. 다이묘를 지키기 위한 술법이나 상대방 다이묘를 암살하기 위한 술법이 발전된 셈이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과 확연하게 달랐다.
영주보다는 왕을 사랑하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위주로 했다.
그래서인지 술법의 대가 길고 굵었다.
뭐랄까.
대륙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한국의 술법이 일본보다 발전했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해졌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 기원을 찾으면 된다.
“사로잡지 못한 것이 아쉽군. 그나저나 꽤나 흥미로운 인물들이 나타났어. 치우의 후예들이라. 대일본제국시대에도 찾아내지 못한 불순분자들. 모조리 끄집어내 주지. 다시는 그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거야. 이 땅은 우리의 것. 열등 민족으로서 우리에게 봉사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지.”
이제 덩치가 큰 사내를 찾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치우의 후예들이 나타나 그를 보호할 테니 말이다. 안타깝지만 저들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찾는 방법을 최대한 빨리 발견해야만 했다.
“할 수 없지. 일단 다른 방법으로 흔들어 봐야겠어. 가자, 흑표.”
이시이 시로가 흑표란 자를 부르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의 후드가 펄럭거렸다.
후드는 검은 날개처럼 퍼지며 이시이 시로를 감쌌다. 둘의 모습이 투명 망토를 쓴 것처럼 서서히 흐릿해져 갔다.
이시이 시로가 남은 자리에는 담배 몇 개피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소장님. 그러니까 제가 이번에 쓴 부적이 자그마치 200만 원이라고요. 지금 당장 필요해요. 주세요.”
이하현이 미스터 킴을 졸랐다.
그러나 미스터 킴은 요지부동이었다. 어지간해야지 들어주지 한 번 출장 갔다 오기만 하면 출장비를 마구 부풀린다.
차량 기름 값은 사무소에 댈 것이고 식사는 하지 않았다. 이강철의 말로는 부적도 다섯 장이 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 하현은 고급 인력이다.
고급 인력이라 치고 야간 근무를 했다.
다섯 시간이 되지 않지만 20만 원을 쳐줬다. 생명 수당? 좋다. 위험하니까 그것도 10만 원 쳐줬다.
부양 가족 수당? 저놈은 중학생이지만 혼자다. 자기 몸 먹여 살려야 한다고 쳐준다.
출 퇴근 수당? 택시비로 쳐준다.
조기 출근 수당? 일찍 와서 게임해도 쳐준다.
직책 수당? 주술사가 무슨 직책이 있겠는가. 그래도 단 한 명의 주술사이기에 이강철보다 월 5만 원이나 더 쳐줬다.
모두 쳐도 5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섯 시간 나갔다 와서 2백만 원을 내놓으라니.
도둑도 이런 날도둑이 없다.
오냐오냐하고 귀엽다 귀엽다 했더니 이제는 수염을 뽑으려고 들었다.
“영수증 가지고 와. 그럼 통장으로 쏴줄게.”
“에엑? 부적에 무슨 영수증이 필요해요.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긴 너도 마찬가지야.”
두현은 그런 두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장의 책상 뒤에는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손님용 큰 탁자가 중앙에 놓였다.
그리고 네 개의 철제 책상이 양옆으로 놓여 있었다.
철제 책상.
정말 오랜만에 본다. 사무실 전체가 올드했다. 전화기도 다이얼이었다. 어렸을 적에 이장댁밖에 전화기가 없어서 마을 사람 전체가 그 집에 신세를 진 적이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잔잔하게 스팅의 ‘Shape Of My Heart’라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두현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 중에 하나였다. 그는 삶이 너무 힘들어 음악과는 별다른 연이 없었다.
하지만 아내와 종종 들르던 음악다방에서 들었던 스팅의 ‘Shape Of My Heart’는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때 이후로 이 노래가 좋아졌다.
아내가 생각날 때면 이 노래를 들으면서 술 한잔씩 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으니까.
요즘 들을 수 있는 숨소리까지 생생한 그런 음질이 아니다.
뭔가 아련하고 농부들이 벼를 베는 광경을 보는 듯한 추억이 담긴 소리였다.
“LP에요. 요즘 같은 시대에 오랜만에 들어보죠? 우리 보스가 이상한 구닥다리 망령이 붙어서 그래요. 보시면 알겠지만 사무소가 마치 1970∼80년대 같으니까요.”
페르민은 두현의 앞에 쌍화차를 내놓으며 말했다. 쌍화차 위에 노른자 둥실 떠 있었다. 다방을 간 지도 오래되었고 다시 추억에 잠겨 쌍화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았던 두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아무리 봐도 페르민은 외국인이었다.
그런데 외국인치고는 한국어 발음이 너무 유창했다. 그리고 외국인이 직접 쌍화차를 만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챈 페르민이 웃었다. 살짝 눈꼬리가 내려간다. 사람들은 소위 눈웃음을 친다고 말한다. 확실히 그런 표정은 애교가 있어 보였다.
그리고 웃을 때 한쪽 볼에만 보조개가 들어갔다. 외국인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뜯어보니 한국적인 모습도 남아 있었다.
“설마?”
“그 설마에요. 전 혼혈이에요. 독일에서 태어났죠. 아버님이 한국분이고 어머님이 독일분이죠. 그래서 어렸을 적부터 한국말을 자연스럽게 배웠어요.”
“그렇군요.”
두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엇부터 물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나기 전에는 물어볼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직접 대면하니 오히려 그 말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이 난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물어볼 필요는 없는 말들이었다.
“먼저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라 생각해요.”
“네.”
두현은 머뭇거렸다.
“생각나지 않나요?”
“음. 막상 대면하니까 생각이 나지 않는군요”
“그럼 이것부터 먼저.”
페르민이 파일 속에 들어 있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거기에는 계약직 ‘기간제 근로자 계약서’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무엇이죠?”
“뭐긴요. 계약서죠.”
“그런데 왜 제게 이런 걸…….”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긴 처음부터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별수 있을까.
아니면 소통 문제 때문일까.
페르민은 거두절미를 다 떼고 몸통만 말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재능이 있어요. 먼저 여기서 인턴으로 일을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스카우트 제의인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이 옳다.
세상에 이런 스카우트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다짜고짜 이곳으로 데리고 와 근로 계약서는 내밀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음, 이해를 못하나 보네요.”
당연히 못하지.
너 같으면 이해하겠나.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맴돈다.
“아, 저희 회사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런가 보군요.”
두현은 머리가 띵해왔다.
이 여자는 보기와는 다르게 사물의 관점을 제멋대로 판단한다.
자신이 어딜 봐서 회사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으로 보일까.
그의 생각은 상관없다는 듯 페르민은 말을 이었다.
“먼저 우리의 보스인 미스터 킴 소장님입니다. 이름도 나이도 저희는 모릅니다. 그냥 미스터 킴으로 부르세요. 월급은 저분이 주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저 남자 분은 이강철 팀장입니다. 주로 폭파, 암살, 격투, 침투, 정찰, 대타격의 임무를 맡죠.”
다시 머리가 띵해졌다.
여긴 테러리스트 집단인가.
“그리고 저 소년은 이하현 팀장이에요. 주로 저주, 정보 조작, 적의 전투력 저하, 대인폭격, 치료 등의 임무를 맡습니다.”
저주?
웃기지도 않는다.
하긴 이하현이란 소년이 쓴 부적이 몸에 붙으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처가 흉터만 남기고 아물었다.
지금도 믿기지 않는 힘이었다. 믿기지 않는 힘이지만 믿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 자체가 젊어진 것이 믿기지가 않는데 다른 일들이야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이자들은 테러리스트가 맞다.
중동에서 온 것일까?
아니면 북한에서?
이강철의 말투로 보아 북한에서 온 것이 맞는 것 같다.
“저는 페르민 팀장이에요. 보기와는 다르게 주임무는 적의 완전 타격. 완전 섬멸입니다. 제가 투입되면 상대가 침몰할 때까지 계속 싸우게 되는 겁니다.”
페르민은 자신의 얇은 팔을 탕탕거렸다.
완전 섬멸?
살벌한 말이다.
이 중에서 가장 호전적이며 악질이라는 말인 것 같다. 그녀의 말대로 보기와는 너무 달랐다.
“그럼 사원들은?”
“사원이요?”
페르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네.”
“음. 사원은 없어요. 이제 인턴 사원 하나 뽑을 예정입니다.”
이건 또 무슨 너구리 풀 뜯어 먹는 소린가.
이제껏 팀장만 있고 사원이 없는 회사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럼?”
“네. 두현 씨가 회사 최초의 사원입니다. 단, 1년간 무사히 인턴을 끝마쳐야 하겠지만요.”
“일단 고등학교에 편입하게 해준 점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정체도 알 수 없는 이런 회사에 다니고 싶지는 않군요.”
“어머,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하세요. 저희가 하는 일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데요. 주소득원은 주로 악령들을 잡는 것이죠. 요즘 세상에는 워낙 원한을 가진 혼령들이 많아서요. 귀신에 씌인 집 나간 며느리 찾기, 귀신에 씌인 가출한 모범생 아들 찾기, 귀신에 씌인 사랑받는 강아지 구하기는 부수적인 일입니다. 생각보다 연매출이 높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게 아닙니다. 제가 처한 사항을 알고 싶군요.”
“먼저 계약서에 사인을…….”
페르민은 계약서를 두현의 앞으로 밀었다.
이것은 반쯤 협박이다.
생각보다 치사한 놈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속에 쌓인 것이 많았던 두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하도록 하죠.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 향수도 고맙게 쓰겠습니다. 후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이곳에 들르지요.”
그리고는 사무실에서 나가려고 움직였다.
“어? 궁금한 것이 많다면서.”
페르민은 당황했다.
자신의 말이 씨알도 먹지 않는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왜? 라는 표정을 지었다.
“동무.”
그때였다.
이강철이 두현을 불러 세웠다.
“더 이상 듣고 싶은 말은 없습니다. 궁금한 것은 제가 알아서 알아보지요.”
“그 말이 아니네. 동무, 지금 고등학교 다니면서 돈을 벌 수 있네?”
당연히 벌지 못한다.
이 덩치로 ‘롯데리앙이나 KFD’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노동일도 하기는 싫었다.
평생 해왔던 노동일이다.
이제는 열심히 공부를 하여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다. 예를 들면 정장을 입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다. 어쩌면 노동일을 했던 그에게 정장을 입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동경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