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현자의 질주 1권(12화)
3장 산적 토벌(7)
“길을 내어라! 백작님이 친히 엘빈 마을을 구하러 가신다!”
“와! 감사합니다. 저희 마을을 구해 주십시요. 와!”
“와! 백작님, 감사합니다! 흑흑흑.”
이렇게 백작이 기사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출발하려고 하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청년들이 수레를 이끌고 아주 꾀죄죄한 복장으로 나타났다.
“으아, 힘들어 더 이상 못 가겠다.”
“주니 형님, 쉬었다 가죠, 네?”
“네. 좀 쉬었다 가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조금만 쉬었다 가요.”
“아님 식사라도 하고 가죠?”
퍽!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녀석의 뒤통수를 주니는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듯이 한 대 후려갈겼다.
“아야! 또 왜 때리십니까?”
“야, 저길 봐라. 니들 눈은 개미 눈이야 저게 안 보여?”
“와! 영주성이다!”
“저게 영주성이야? 우아, 크다.”
“진짜 크네.”
엘빈 마을이 근래 들어 여유로워져 물물교환을 영주성까지 와서 많이 한다지만, 대부분의 엘빈 마을 사람들이 영주성을 자유로이 다닌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영주성을 보고 대부분의 반응이 놀라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이들은 영주성 성문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디서 오는 이들인가? 어서 밝히지 못할까? 여기 계신 분이 백작님이다. 어서 밝혀라!”
기사의 외침에 20명은 모두는 행렬을 멈추고 바닥에 엎드렸다.
4장 공주 때문에(1)
엘르 백작령 영주성 성문 앞.
“저희는 엘빈 마을에서 왔습니다. 산적들을 무찌르고 그 수급들을 가지고 왔습니다.”
“와! 우리 마을 청년들이 살아 돌아왔다! 저기 봐, 제노리다! 미로도 있다! 와! 마을 청년들이 모두 살아 돌아왔다!”
갑자기 나타난 장정들을 피난 온 엘빈 마을의 주민들이 너무나도 반갑게 맞이하기 시작하자 엘르 백작은 속으로 너무나도 놀라고 있었다.
아니, 엘르 백작만 놀라는 게 아니라, 백작령의 기사와 병사들, 출정을 마중 나온 성의 주민, 그리고 공주까지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
‘산적을 물리쳤다니?’
이때 주니가 산적 두목의 수급을 담아 놓은 항아리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소인은 엘빈 마을의 공노 주니라고 합니다. 백작님께 산적 두목의 수급과 170개의 산적 수급을 바칩니다.”
주니가 이렇게 말하고 엎드려 항아리를 내놓자 말스 기사가 항아리를 받아 들고는 수급을 꺼내어 백작에게 보여 주었다. 한데 수급을 받아든 백작의 표정이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일그러지며 주니에게 소리쳤다.
“네 이놈! 네놈이 나와 농을 하자는 것이냐? 이건 산적의 수급이 아니라 영지병의 수급이 아니냐?”
“아닙니다. 분명 저희 마을을 습격한 산적의 수급입니다. 죽기 살기로 싸워 벤 산적들의 수급입니다.”
“이 투구는 영지병이 쓰는 투구이다. 한데 산적들이 이 투구를 쓴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수급을 본 백작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말에서 내려 나머지 수급을 싣고 온 수레로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는 수급이 담겨져 있는 상자를 열어 보더니만 영주가 소리를 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기스노, 그 자식을 당장 내 앞으로 데리고 와라. 어서!”
백작의 명을 받은 기사 몇 명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내 다시 한 번 묻겠다. 이들이 정말로 너희 마을을 습격한 산적들이 맞느냐?”
“네, 정말입니다, 백작님. 소인들이 어찌 거짓을 고합니까?”
“백작님, 저희 마을 청년들의 말을 믿어 주십시오. 제발 믿어 주십시오.”
“믿어 주세요, 백작님. 저들은 산적들과 죽기 살기로 싸운 것뿐이 없습니다.”
갑작스런 백작의 반응에 엘빈 마을 사람들은 다시 엎드려 울며 불며 마을 청년들을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이런 모습들을 지켜본 영지 주민들은 백작이 노발대발하며 한 말을 생각하면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산적들이 영지병이었어?”
“그런가 봐. 그러니 백작님이 저렇게 난리지.”
“그나저나 저 공노들 대단하다. 어찌 병사들과 싸워서 이기냐?”
“그러게. 참 영지병이 산적이었다니. 이젠 누굴 믿어야 하는 거야?”
“조용히들 해라. 조용히들 하라고!”
“병사들은 무엇들 하는가? 다들 조용히 시켜.”
영주성 주민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말스 기사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병사들을 시켜서 주민들을 조용히 시키기 시작했다.
잠시 후 기사들이 기스노를 데리고 나오자 백작은 체면이고 뭐고 없이 기스노를 사정없이 짓밟기 시작했다.
퍽! 팍!
“억! 영주님 살려 주십시오! 영주님! 컥! 컥! 영주… 컥!”
엘르 백작은 기스노를 한참 동안 패고 난 후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네 이놈! 네놈이 나를 속이고 영지병들을 동원하여 마을을 습격해!”
“백작님! 아, 아닙니다! 정, 정말로 아, 아닙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십니다!”
“오해? 여기 수급들이 다 영지병의 투구를 쓰고 있는데도 오해? 여봐라, 병사들을 이끌고 이 자식의 집을 수색하고 이 녀석과 관련된 자식들을 다 끌어내 내 앞으로 끌고 와라! 그리고 기사 말스 너는 저 기스노의 사무실을 수색해”
“알겠습니다, 백작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병력을 이끌고 기스노의 사무실과 자택으로 몰려 가기 시작했다. 그런 후 백작은 공주를 쳐다보았지만 곧 속으로 후회를 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공주가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백작님, 전 저의 기사들과 함께 접견실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공주가 말을 마치고 자신의 호위 기사 둘과 함께 영주성 접견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는 백작은 이를 갈며 속으로 화를 삭히고 있었다.
뿌드득!
‘이런 개 같은… 이게 무슨 망신인가? 이젠 저 공주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줘야 할 판국이군.’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백작은 기스노를 쳐다보았다.
백작의 노기 어린 눈빛과 마주친 기스노는 이미 공포에 질려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백작님,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정말로 영지병을 동원해 엘빈 마을을 습격… 컥!”
백작은 기스노가 오줌을 지리면서도 변명을 늘어놓자 다시 구타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이! 아직도 뚫린 입이라고 지껄여? 내가 공주 앞에서 이런 개망신을 당하고도 너를 살려 둘 거 같으냐?”
퍽! 퍽! 퍽!
“컥! 살려… 컥!”
어느 정도 구타가 끝나자 백작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주변을 둘러보자, 주변에 몰려 있던 많은 사람들은 백작의 이런 노기 어린 음성과 과격한 구타에 놀랐는지 침묵으로 백작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작도 주변 사람들의 이런 반응에 뻘쭘했는지 한 가지 명을 내리어 이 상황을 모면하고 있었다.
“여봐라! 내 친히 산적을 맞아 용감히 맞서 싸운 엘빈 마을 청년들에게 상을 치하할 것이니, 기사들은 엘빈 마을 촌장과 저 청년들을 영주관으로 데리고 오도록 해라. 그리고 엘빈 마을에서 피난 온 사람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어 나의 너그러움을 알리도록해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기스노 저 자식은 저놈의 처자식들을 다 잡아들일 때까지 물 한 모금 먹이지 말고 옥에 가두도록 해라!”
“네!”
백작은 명령을 내리고 영주성으로 들어갔다.
백작이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자 기사 한 명이 촌장에게 다가갔다.
“촌장, 백작님의 말씀 들었겠지? 어서 마을 청년들을 모아서 나를 따라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나으리.”
촌장은 기사의 말을 듣고는 주니와 청년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생들 했다. 현자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영주성으로 들어가시죠.”
“저, 촌장님 한 가지 말씀드리죠. 절대로 남들 앞에서는 저를 현자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그냥 주니라고 부르십시오.”
“아니, 현자님…….”
“다시 말씀 드립니다. 제가 죽기를 원하신다면 그냥 현자로 부르십시오. 하나, 제가 살기를 바라신다면 그냥 주니라고 부르십시오.”
촌장은 주니의 이런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르 백작령 영주성 접견실.
“공주님, 앞으로 어찌 될 것 같습니까?”
기사의 질문에 공주는 한참을 웃기만 했다.
“호호, 우리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아주 좋습니다. 엘르 백작은 집안이 장사꾼으로 성공한 집안이라 그동안 귀족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도 집안 내력으로 남작 작위를 자진 자들한테도 무시를 당했었는데 지금의 이 상황을 제가 왕성으로 가서 떠벌리기라도 한다면, 망신을 제대로 당할 것은 뻔할 것이니 아마도 제 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웬만한 사항은 다 들어주려고 들 것입니다.”
“그러면 공주님은 어느 정도를 백작에게 요구하실 것인지요?”
“글쎄요… 차차 생각해 봐야겠지요?”
공주는 기사와의 대화를 마치고 왕성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현 카리우스 왕성에서의 정치적 상황은 좀 복잡해지고 있었다. 현 국왕인 매션 카리우스 국왕은 두 명의 여성에게서 자식을 얻었다.
한 명은 현 왕녀인 스텔라 왕녀. 그녀는 현재 세자로 있는 19세의 알도르 세자와 엘가 공주와 동갑내기인 17세의 먀샤 공주를 낳았다.
또 한 명의 여인은 17세의 엘가 공주와 8세의 쎄르 왕자를 낳은 테리라는 여인으로 어렸을 때부터 매션 국왕의 시중을 들던 시녀였다가 매션왕의 성은을 입어 두 명의 자식을 낳고, 후궁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어느날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여인이었다.
사실 이런 집안 사정은 왕가에서 대부분 있는 상황이다. 하나 카리우스 왕국은 약간 문제가 있었다.
세자인 알도르를 지지하는 자들은 약간 보수적인 경향을 띠는 안정을 외치는 일명 귀족파였다.
한데, 옛 제국의 명성을 되찾자고 외치기 시작하는 개혁 귀족들이 나타나면서, 세력을 귀합하더니만 쎄르 왕자를 공공연히 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개혁 귀족들이 쎄르 왕자를 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스텔라 왕녀도 테리 후궁의 자식인 쎄르와 엘가 공주와 자주 만나기도 했었다.
하나 어느 날부터 쎄르와 엘가 공주가 알도르 세자의 지위를 위협한다고 느끼면서 멀리하게 되고 오늘날처럼 냉냉한 관계로 돌아선 지 벌써 3년째이다. 처음에는 영특한 엘가 공주는 저 개혁파라 칭하는 힘도 별로 없는 개혁 귀족들이 싫었다.
저들 때문에 오히려 자신과 자신의 동생이 위험에 처했고, 의심만 가지만 스텔라 왕녀가 후궁이었던 자신의 어머니를 죽게 만드는 사단을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미 사이는 멀어졌고, 서로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이를 드러내 놓고 싸우기 시작했으니. 어쩔 수 없이 개혁파라 칭하는 귀족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혁파 귀족들은 보수파 귀족들보다 한 수 아래였다.
그래서 엘가 공주는 스텔라 왕녀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이렇게 각각의 귀족을 찾아다니며 병력이나 병참금을 얻으러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멍청한 작자들. 뻔한 계략에 그렇게 쉽사리 넘어가다니.’
공주가 이런 생각에 빠져들었을 때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공주님, 데리고 왔습니다.”
“오, 그래요? 이쪽으로 데리고 오세요.”
공주는 다른 기사가 데리고 들어온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엘르 백작령 영주성 영주관.
“자, 촌장. 한잔 받게나.”
“아니, 백작님. 저같이 천한 자에게 어찌 직접 술을…….”
백작이 촌장에게 술을 건네자 촌장은 바닥에 바짝 엎드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실 백작도 지금의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 어쩌겠는가? 잘못하면 영지병들이 산적질한 것이 백작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기에 다 쇼를 하는 것이다.
‘누구는 너희 같은 천한 것과 밥을 먹고 싶어서 먹는 줄 아느냐? 닥치고 받기나 해라.’
“아, 괜찮네. 자네들은 우리 백작령의 영웅들 아닌가? 그 영웅들을 이끄는 수장인 촌장인 자네야말로 술 한잔 받을 자격이 있네.”
“그러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백작님.”
“자, 자네들도 맘 편히 먹고 즐기게. 나도 오늘은 저 골 아픈 산적들을 물리쳐 준 자네들과 같이 맘 편하게 먹고 즐기고 싶으니.”
백작이 이렇게 촌장과 마을 청년들을 일일이 챙기며 술자리를 가지고 있을 때 누군가 들어와 동석을 원하기 시작했다.
“저도 같이 즐기면 안 되겠습니까, 백작님?”
“아니, 공주님. 여긴 어쩐 일로……?”
“왜요? 제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요? 호호호.”
“아닙니다. 앉으시지요.”
자신의 등장으로 백작이 당황하자 공주는 그 표정을 즐기듯이 백작 옆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