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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안전보장 사무소 1(23화)
9. 한가한 하루(3)
서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선국과 종민이는 두현의 눈치를 봤고 미희와 진희는 무서워서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나타샤는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껄끄러운 것은 일몽이었다. 초반부터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다.
“우리 맥주라도 마실까.”
조금 이른 시간이기는 하지만 술이라도 한잔 들어가면 분위기가 훨씬 나아질 것 같았다.
여자아이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을 무참하게 깨트리는 인간은 꼭 한 명씩 존재한다.
고문관이나 폭탄이라는 존재다.
“학생이 무슨 맥주를 마시나. 그냥 주스나 마시거라.”
두현이었다.
자신도 학생이라는 생각을 종종 망각한다. 가끔씩 그는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던 버릇이 나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다시 한 번 냉각이 찾아왔다.
이런 미팅은 처음 겪어본다.
누군가 말을 해야 하지만 두현의 눈치가 보여 제대로 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심장박동 소리가 건너편 여자아이들에게까지 들릴 것 같았다.
미팅이 아니라 다른 학교 일진회와 집단 난투극을 벌이기 전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숨 막힐 것 같은 이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선국과 종민은 엉덩이가 배겼지만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특히 종민의 옆자리에는 두현이 앉아 있었다. 그와 최대한 밀착이 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와 살이라도 맞닿으면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일몽과 나타샤는 이런 상황이 답답했다. 미팅을 주선한 그들로서는 어떡하든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야 했다.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분위기는 더욱 참담해진다.
“우리 게임할까?”
나타샤가 게임을 제안했다.
“그, 그럴까. 그래 우리 왕 게임을 하자. 그거 재밌겠다.”
모두가 찬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두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전 친구들과 룸에 가서 왕 게임을 하고 즐겼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퇴폐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옷을 걸친 것이 오히려 민망할 정도다.
그것을 이런 훤한 낯에 하자고 하니 두현은 기겁했다. 학생들이 너무 까졌다.
선생님들의 애로 사항이 많을 것 같았다. 선생님의 마음과 동질감을 느끼자 학생들을 선도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지 마. 학생은 학생다워야지.”
이건 또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
게임하자는 것이 학생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초괴수의 정신세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그래. 다른 것 하자. 뭐할까? 아, 우리 비디오방이나 가서 영화나 한 편씩 때릴까.”
두현이 못마땅해 하자 일몽이 얼른 말을 바꿨다.
다시 두현의 머릿속에 언젠가 봤던 뉴스가 떠올랐다. 요즘 청소년들의 탈선을 유발하는 것이 변태적으로 운영하는 방들이라고 하였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며 성관계를 맺는다고 했었다.
“허허 참.”
지금 일몽은 이 어린 여자들 중 하나를 자신에게 받칠 셈인가.
그렇게 안 봤는데.
두현은 일몽을 노려봤다.
깜짝 놀란 일몽은 심장이 마구 두근거렸다. 도대체 왜 이렇게 두현이 기분이 나쁜지 알 수가 없었다.
잘못하여 그때처럼 폭발이라도 하면 이 일대는 쑥대밭이 될 것 같았다.
“왜, 왜요?”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안 되겠군. 정신을 차려야 하겠나.”
그러니까 뭐가?
“형님,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은데요. 그럼 노래방이라도 갈까요?”
노래방.
이 자식이 여기까지 타락을 했던가.
설마 여학생들을 불러놓고 도우미 아가씨들을 부를 셈인가.
아무래도 여학생들을 보내고 정신 개조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일몽을 바라보는 두현의 눈빛이 점점 강해졌다. 두현과 같이 있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엄청난 압박감을 알지 못한다.
두현과 친하다는 일몽조차 가끔 철창으로 둘러싸인 우리 안에 식인 곰 한 마리와 같이 있다고 느낄 정도니 말이다.
하물며 다른 학생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두현의 눈만 마주쳐도 머리가 하얗게 변하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한다.
그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테이블만 바라보았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지만 꺼낼 수도 없었다.
미희와 진희는 속으로 하느님과 부처님을 찾았다. 찾을 수 있는 모든 신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눈앞에 사내들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녀들은 웨이터에게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들은 매몰차게 외면했다.
그들도 살고 싶은 표정이나 탓할 수는 없었다.
너무 겁이 나서 오줌이 찔끔거리고 나올 것 같았다.
18년을 살면서 가장 잘못한 선택을 꼽으라면 단연코 미팅에 나온 것이다.
아마 대학을 간다고 하더라도 미팅 따위는 죽어도 안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이 호로 새끼들. 여긴 웬일이야. 재범이가 없다고 애새끼들이 아주 빠져서리.”
누군가 그들의 테이블로 와서 손을 얹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껌을 질겅질겅 씹는 모습이 불량스럽다. 코와 입술에 피어싱을 했고 머리는 흰색으로 탈색을 했다.
3학년 일진회 중 한 명인 영수였다. 다른 두 명의 3학년도 보였다.
종로에 무슨 볼일이 있는 모양이지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대학 가기를 포기했으니 주말에도 이렇게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는 것일 테니까.
이럴 거면 공고를 가서 기술을 배울 것이지 왜 인문계를 와서 다른 아이들 석차를 높여주는지 모르겠다.
일몽의 얼굴이 밝아졌다.
학교에서는 마주치기도 싫은 3학년들이지만 이때만큼은 밝아졌다.
이제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왜 욕을 하고 지랄이야!”
갑자기 나타샤가 벌떡 일어나더니 영수에게 소리를 질렀다.
영수는 황당했다.
자신들을 보기만 하면 꼬리를 말던 놈들이 잘못된 약을 먹은 것처럼 대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들이 돌았나.”
영수는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두현의 뒤통수를 갈겼다. 그리고 그의 뒷머리를 잡고는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새끼들. 여자 앞이라고 눈에 뵈는 것이 없구만. 나와. 씨발 놈들아.”
그는 두현의 머리채를 잡고 당겼다.
아이들은 기겁을 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왠지 모를 통쾌함이 일어났다.
비록 저 3학년에게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게 무슨 짓이지?”
묵직한 저음이 영수의 귀를 꿰뚫었다. 뭔지 모를 불길함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는 고개를 내려 두현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머리통이 다른 사람들보다 곱은 크다.
두현이 시선을 돌리자 영수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서 많이 봤던 얼굴이다.
“초, 초괴수?”
아닐 것이다.
학교에서도 초A급 위험 인물로 소문이 난 초괴수가 미팅 따위에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영수 뒤에서 실실 웃고 있던 다른 일진회 멤버들의 얼굴도 굳어졌다.
두현은 자신의 머리채를 움켜잡은 영수의 팔목을 붙잡았다.
“으으아아악!”
아귀의 힘만으로 팔목이 꺾였다.
두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영수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맞다.
설마 했던 초괴수가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별로였던 두현에게 기름을 가져다 부은 영수였다.
두현은 영수의 양쪽 팔목을 한 손으로 잡았다. 한 손에 두 팔목이 잡혔는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엄청난 괴력이었다.
두현의 손바닥이 천천히 들렸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특히 일몽과 선국, 종민은 두현이 때리는 따귀가 일반적인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두현에게 따귀를 맞으면 갱생이 된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갱생따귀’쯤 될 것이다.
짝!
동시에 영수의 몸이 한 바퀴 회전을 했다. 단순히 따귀만으로 이런 위력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딱 한 대를 맞고 영수가 쓰러졌지만 다른 일진회 학생들은 끼어들지도 못했다.
그들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야, 이 새끼들아. 너희 때문에 우리 미팅이 엉망이 됐잖아.”
일몽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일진회에게 덤볐다. 선국과 종민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다니. 3학년이면 다야!”
조용히 미팅을 할 때보다 지금이 훨씬 활기차 보였다.
나타샤는 여학생들을 데리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맑은 하늘이 보였다.
두현의 전설은 진짜였다.
술에 취했을 때 보는 것과 맨 정신을 보는 것과는 체감 온도가 달랐다.
아무래도 자신이 사는 세상과는 다른 곳에 있는 사람 같았다.
“얘들아. 미안해. 괜히 미팅을 하자고 해서.”
“아니야. 괜찮아. 좋은 경험했어.”
나타샤의 말에 미희가 배시시 웃었다.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라 기분이 좋았다.
저곳에서 탈출을 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린 것만 같았다.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미희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향했다. 매일 이런 기분만 든다면 서울대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초괴수와 함께 있는 것보다 전교 1등이 훨씬 쉬워 보였다.
두현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이들이 나타나서 방해를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젊어지고 나서는 이해 가지 않는 상황이 너무 많았다. 짜증이 밀려왔다.
다짜고짜 뒤통수를 친 저놈에게 분풀이를 해야 했다. 두현은 쓰러져 있는 영수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죽은 척하려고 했던 영수는 두현의 완력에 맥없이 끌려왔다.
3학년 일진회도 두현에게만은 손을 대지 않는다. 너무 험악한 소문이 많아서였다.
그런 두현을 향해 먼저 손을 댔으니 영수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말도 되지 않는다면서 나중에 걸리면 고지라든 킹키도라든 ‘아작’을 내고 말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었다.
하지만 따귀 한 대를 맞고는 그런 생각은 모두 하늘 너머로 날려 버렸다.
어쩌면 초괴수의 전설은 진짜일지도 모른다. 그런 초괴수에게 손을 댔으니 자신이 어떻게 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대로 끌려가서 북한산 뒷자락에 묻힐지도 몰랐다.
살려달라고 하면 몸값으로 ‘1억’을 요구하겠지.
부모님은 힘겹게 맞벌이를 하시는데 그런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돈이 없다는 것을 안 초괴수는 자신을 장기매매 업자에게 넘길지도 몰랐다. 빼낼 수 있는 장기를 모두 빼낸 후 경찰에 손에 닿지 않는 섬에 팔 것이다.
주르륵.
영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죄, 죄송합니다. 목숨만 살려주세요.”
어찌 보면 사내로서 추한 모습이지만 일몽은 공감이 갔다. 절대로 추한 모습이 아니다. 저렇게 해서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못할까.
그의 말을 들은 두현은 영수의 멱살을 놓았다.
목숨만 살려달라니?
먼저 시비를 건 것은 3학년 선배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주위를 돌아보자 난장판이 됐는데 사람들은 모른 척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몇몇은 아예 자는 척을 한다.
너무 사람들이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고 느꼈다.
두현은 맥이 풀리고 말았다.
두현의 첫 미팅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