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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월비화 1권 (7화)
제2장 심결과 심공 (3)


살문의 비고에 들어선 조운비는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왔다 간 흔적은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조운비는 미친 듯이 동굴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동굴 끝의 바닥을 정신없이 파헤쳤다.
곧 흙 속에 묻혀 있던 검은색의 상자가 드러났고, 조운비는 다급히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서 금원보와 은자들이 반짝거렸다.
‘조금도 손댄 흔적이 없어. 이곳에 오지 않았어. 아주머니에게도 안 가고 이곳에도 오지 않았으면 도대체 어디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좌세량에게 들은 대로라면 인근 지역에서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고 당문에 발각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도대체 이옥화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과의 약속을 어길 이옥화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불길한 추측들이 조운비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조운비는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끼며 상자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혼이 빠져나간 듯 조운비의 눈빛은 공허하기만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근방을 벗어난 것은 명확했다.
정신을 잃고 있던 시간이 오 일이요, 치료를 하며 누워 있은 시간이 십 일이었다.
마음먹고 움직이면 성 몇 곳은 지나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넓은 천하에서 어디로 간 줄 알고 찾는다는 말인가.
거의 한 시진을 넋을 잃은 채 앉아 있던 조운비가 갑자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이유이든 당문과는 관계가 없으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 있다면 그 시기가 언제든 이곳에 올 것이다.’
찌이익!
조운비가 장삼의 한편을 찢어 바닥에 펴고 약지를 깨물었다.
곧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조운비는 장삼에 그 피로 글을 써 나갔다.
조운비는 혈서를 조심스럽게 접어 상자에 담고 다시 제자리에 묻었다.
동굴 밖으로 나간 조운비의 눈에 지루한 듯 한껏 인상을 쓰고 있는 마무강의 모습이 보였다.

* * *

서른 정도로 보이는 밝은 인상에 진한 눈썹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잘생긴 청년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좌세량이라 한다. 천마신교 교주의 둘째 제자이고 천마대의 대주를 맡고 있지. 참고로 나는 이공자라 불리는 것보다 대주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 청년의 앞에는 조운비가 앉아 있었다.
“곧 신교에 돌아갈 것이다. 사실 네가 낫기를 기다리느라 꽤 늦었다. 쳇! 사부한테 잔소리 들을 생각을 하니 너를 괜히 구한 것이 아닌가 싶구나.”
미간을 찌푸리며 꽤나 진지하게 말하는 좌세량의 모습에 조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지었다.
“운비!”
“네, 대주님.”
“대주님이라고 부르지 마라.”
조운비의 눈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분명 이공자라 부르는 것보다 대주라 부르는 것이 좋다고 하지 않았던가.
조운비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좌세량의 말이 이어졌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조운비가 눈을 크게 떴다.
“어찌 그리하겠습니까?”
그리하라 한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구명지은은 뒤로한다 해도 우선 나이 차이부터 근 이십 년이 났고, 좌세량의 신분 또한 평범하지가 않았다.
왕이나 제후는 아니나 무림 중에서는 그에 못지않은 신분을 가지고 있는 좌세량이었다.
한데 자신은 어떠한가? 근본도 알지 못하는 고아 출신에 고작 조그마한 살문의 제자였다.
무슨 생각으로 좌세량이 그리하라 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좌세량을 형님이라 부른다는 것은 누가 봐도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난감함이 가득 담겨 있는 조운비의 대답이었다.
“나를 따르겠다고 하고는 처음부터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냐?”
짐짓 눈을 부라리는 좌세량의 우스운 모습에도 조운비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네 형으로 부족하다 생각하는 것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 부족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천마신교의 이공자라 하셨습니다. 폐가 될 것입니다.”
“근본도 모르는 고아에 살문 출신이라서 그러느냐? 그런 이유라면 잘못 생각한 것이다. 나도 너와 다를 바가 없다. 사부님이 거두어 주시기 전에는 이름조차 없이 길거리를 배회하고 다니는 거지였다. 사부님이 자신의 성을 주어 이름을 지어 주시기 전까지 내 이름은 거지새끼였다. 그리고 폐가 된다? 네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느냐, 현재의 너와 미래의 네가 다를 것이라고. 내게 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인물조차 될 자신이 없는 것이냐?”
쾌활하고 장난기가 가득하던 좌세량이 아니었다.
좌세량의 얼굴은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게 느껴질 정도였고 목소리는 진중하기만 했다.
조운비는 생각지도 못했던 좌세량의 과거와 추궁 섞인 물음에 쉽게 입을 열 수 없었다.
“굳이 강요하지는 않겠다만 나는 너에게 형이라는 말이 듣고 싶구나. 그동안 살아오면서 가족이니 정이니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사실 그다지 필요하다고 느꼈던 적도 없었다. 그런데 너를 만나고 네가 네 동생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문뜩 나도 가족이라 할 만한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다시 말을 이어 가는 좌세량에게 조금 전의 엄숙함이나 진중함은 남아 있지 않았으나 그 표정이나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조운비는 왠지 울컥거리는 기분과 코끝이 아린 느낌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쉽게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던 조운비였으나 무심한 듯한 좌세량의 말은 가슴속을 찌르는 부분이 있었다.
조운비 또한 그와 같았기 때문이다.
사부에게 거두어지고 사부와 사형들은 자신을 무척이나 아껴 주었다.
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지만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부친처럼 생각했던 사부였지만 부친은 아니었고 형제처럼 생각했던 사형들이었으나 형제는 아니었다.
거리감이 없을 수 없었다.
정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라 필요에 의해 묶인 것이 맞았다.
굳이 생각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아무 쓸모가 없다면, 그래서 짐 덩어리밖에 되지 못했다면 자신은 버려졌을 것이다.
아마 마음속 깊이 어느 한구석에 그러한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 노력하고 또 노력했을 것이다.
조건이 없는 그저 가족이기에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러한 누군가를 그리워했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이 있기를 꿈에서도 원했었다.
그리고 조운비의 그러한 바람은 이옥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옥화는 조운비의 모든 것이었다.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유일한 가족인 것이다.
평범하게 가족들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을 감정이었지만 세상의 어둠 속에 언제나 홀로였던 조운비에게 가족의 의미는 삶의 빛이자 전부였던 것이다.
좌세량이 조운비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지는 않다고 해도 꼭 다르지만도 않을 것이다.
“운비야!”
좌세량의 은근한 목소리가 하염없이 생각에 빠져 있는 조운비를 일깨웠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조운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혀, 형님.”
“하하하핫! 듣기 좋구나.”
좌세량이 즐거운 듯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조운비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뜻을 이해해 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그리고 이제 내가 너를 동생으로 삼았으니 은혜니 하는 말은 다시는 꺼내지도 말거라. 형이 동생을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어찌 은혜가 되겠느냐. 그저 너는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된다.”
갑작스러운 좌세량의 말에 조운비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한 얼굴이 되었고, 그러한 모습에 좌세량은 손을 휘휘 저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그냥 그렇게 알고만 있어라. 그 얘기는 그만 하고 원래 하려던 것을 하도록 하자.”
조운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저 부르기에 온 것이니 원래 하려던 것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었다.
“신교에 가기 전까지 네게 무공의 기초를 잡아 주려고 한다. 너도 무공을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쓸모 있는 것이 없다. 우선 내공심법만 하여도 너무 하급의 것을 익히고 있는 듯하더구나. 네가 익히고 있는 심법이 육합심법이 맞느냐?”
“네, 육합심법입니다.”
“다른 무공은 배운 것이 무엇이 있느냐?”
“비도술인 혈섬비와 삼재보법, 매영신법을 배웠습니다.”
좌세량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되었다. 다 잊어버리도록 해라. 우선 내공심법부터 다시 배우도록 하자. 그전에 먼저 네가 선택을 해야 할 것이 있다. 천마신공과 태허심공 중에 한 가지를 택하도록 해라.”
이지문이나 마무강이 옆에 있었다면 기겁을 할 말이었다.
태허심공도 문제가 적지 않겠지만 천마신공은 천마신교의 최고 심법으로 전수하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아무리 좌세량이 교주의 제자라 해도 허락을 얻지 않고 전수했다가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 조운비가 그러한 것을 알 턱이 없었다.
“제가 심법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운비의 말에 좌세량은 잠시 귀찮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입을 열었다.
“내공심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정공과 사공이지. 정공은 말 그대로 정파의 내공심법이다. 사공은 사파의 내공심법인 것이고. 정공과 사공의 가장 큰 차이는 심법의 목적이다. 정파의 심법의 종류가 무수히 많기는 하지만 그 바탕은 불가나 도가에 근원을 두고 있다. 중이나 도사들의 수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흔히 말하는 해탈이나 우화등선을 위한 과정인 것이지. 그렇다 보니 심법 자체가 불순한 기운을 최대한 배제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받아들이는 진기의 양은 적고 과정은 복잡하여 효율이 떨어지기 때문에 내공을 얻는 속도가 느리다. 장점도 적지 않다. 정순한 기운을 얻기 때문에 정신이 맑아지고 신체의 기능도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게 해 준다. 주화입마를 할 우려도 적지. 사공은 정공과 반대라고 보면 된다. 살상의 능력에 중심을 두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효율을 가장 중요시한다. 내공을 얻는 속도가 정공과 비교하기 힘들만큼 빠르다. 짧은 시간에 강한 힘을 얻을 수가 있지. 오 년의 수련이면 정공을 십 년 수련한 정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불순한 기운까지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에 혈기가 들끓고 신체의 상태는 불안정하다. 주화입마의 위험도 크고 성격이 과격하게 변하기도 한다.”
조운비는 좌세량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어째서 자신에게 그러한 설명을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언뜻 명칭을 보아도 태허심공은 도가의 느낌이 물씬 풍겼고 천마신공은 천마신교의 심법인 듯싶었다.
올해로 조운비의 나이가 열셋이었고 무공을 배운 지는 오 년이 되었다.
좌세량의 말마따나 살문의 무공이다 보니 배운 무공 자체가 천박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대단한 무공이 있으면 살수 따위를 할 필요가 없었고, 살수는 무공보다는 은신술이나 잠입술, 암습 따위의 흔히 말하는 잡술 쪽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열셋의 조운비가 지금부터 정공을 배운다면 명문 정파에서 체계적으로 배운 자들을 따라잡는다는 것은 요원한 일인 것이다.
게다가 좌세량은 천마신교의 사람이었고, 어찌 되었건 자신도 좌세량을 따르기로 했으면 천마신교에 속하게 되는 것이니 천마신공을 배우라 하는 것이 옳았다.
조운비의 생각을 끊으며 좌세량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반적이라면 너는 천마신공을 배워야 할 것이다. 천마신공은 천마신교가 보유하고 있는 내공심법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것으로, 보통의 사공이 가지고 있는 단점들이 적은 데다 효율 면에서도 무척이나 뛰어난 심법이다. 허나 그러함에도 정공의 장점만을 본다면 모자란 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사공 자체의 결함이지. 그러한 이유와 너의 묘한 상태로 인해 너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조운비가 의문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저의 묘한 상태라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우선 네가 배운 심법이다. 육합심법은 하급의 심법이기는 하나 도가의 목적에 가장 충실하다고 할 수 있는 심법이다. 게다가 네 자질이 범상치 않아 네 나이에 비해 많은 내공을 얻었고 정순하기 이를 데 없다. 명문 정파에서 정통으로 배운 것에 못지않다. 쉽게 버리기는 아까울 정도이지. 그리고 너는 모르고 있겠지만 너를 살리기 위해 천마신단이라는 영단을 사용했다. 내공 증진의 효험이 적지 않은 것이지. 내공을 수련하기 시작하면 일 년 이내에 적어도 삼사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좌세량의 이어지는 말에 조운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신의 몸 상태에서 살아난 것에 의문이 있기는 했지만 그러한 영단을 사용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언뜻 생각해도 그 효능이 소림의 대환단에 못지않을 영단이니 그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좌세량이 무슨 생각으로 처음 본 자신에게 그러한 기물을 사용했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런 생각도 잠시, 곧 좌세량에 대한 고마운 심정이 가슴을 채워 갔다.
“허나 사실 그 두 가지 이유뿐이라면 나는 주저 없이 너에게 천마신공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저 내공만의 차이라면 십여 년이면 천마신공이 태허심공을 따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익힌 고해심결이 나를 갈등하게 만드는구나. 말해 주었다시피 고해심결은 환골탈태와 비슷한 효과가 있다. 천마신공을 익힌다 해도 사공의 폐해를 많이 감소시켜 줄 것이나 정공을 익혔을 때 얻어지는 것이 훨씬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행히 내게 예전에 우연히 얻은 태허심공이 있으니 선택은 네가 하도록 해라. 태허심공은 지금은 사라진 전진파의 심법으로 정종의 심법 중에서도 최상급이라 할 수 있는 심법이다.”
조운비는 잠시 생각을 해 보다 곧 입을 열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아는 것이 적어 장단점이나 득실을 판단할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굳이 제게 고르라 하시면 그리하겠으나 기왕이면 형님이 선택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좌세량이 고민스럽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찌푸렸다.